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710)
괴담 호텔 탈출기 710화(709/794)
710화 – 누군가의 휴식, 누군가의 고행 (6)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21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3, 관측소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 탁!
은솔 누나와 송이가 하강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진행 중이던 관측을 잠시 멈추었다.
슬슬 두통이 심했고, 당장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음…”
복잡한 생각에 빠지려던 차, 옆에서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쉬는 건가요?”
“아, 그렇죠. 당장은 별일 없어 보여서.”
“언니랑 송이는 어때요?”
“계획대로 하고 있네요. 난동 부리는 이스의 종족을 처단하며 혼란을 가라앉히고 있습니다. 공작들은 당장은 개입하지 않고 있는데, 아마 본인들도 극도의 혼란에 빠져있겠죠.”
인간이 세운 국가도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이나 총리가 사망하면 정치적 혼란에 빠지고, 즉각 내전이 시작되는 경우도 많다.
하물며 억겁의 세월 동안 종족을 지탱한 신이 소멸에 준하는 위기에 처했다?
아무리 위대한 종족이라고 해도 넋이 나갈 수밖에 없지.
하위 개체는 물론, 공작들도 제정신이 아니리라.
“새로운 능력은 잘 쓰고 있었나요?”
“그게, 아직은 헷갈리는 것 같더군요.”
관측 중인 나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려운 능력이에요?”
“처음엔 일종의 카리스마라고 생각했습니다. 은솔 누나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것 같은데…”
“그런데?”
“뭔가, 쉽게 단정할 수 없어 보이네요.”
그때, 엘레나가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 불길한 상상을 얻었을 때가 생각나네요.”
“음?”
다음 순간, 엘레나는 그릇 위의 쿠키 조각을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 끼리릭!
“…”
곧, 쿠키 조각에서 무슨 벌레의 발 같은 것이 튀어나와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면 즉시 먹던 걸 뱉어내지 않았을까?
다행히 이 자리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처음엔, 일종의 악마 제조 능력이라고 생각했죠.”
“그런가요?”
“다음에는…”
— 달가닥!
갑자기 커피잔이 흔들리며 부글거리는 거품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일종의 저주 능력처럼 생각했고요.”
“마시던 커피가 갑자기 독으로 변하는?”
“비슷하죠. 또 어떤 때는, 사람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흑마법처럼 느꼈어요.”
“… 지금은 어떻습니까?”
엘레나가 슬며시 웃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 깜빡!
순간, 관측소의 조명이 깜빡거리며 일대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테이블 위에서는 불그스름한 액체가 흘렀고,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 끼이익!
당장이라도 침실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무언가는 화룡점정이었다.
삽시간에 관측소가 공포영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지옥도로 변해간다.
그리고 –
— 짝!
중앙에 선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금발 아가씨가 가볍게 손뼉 치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현상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냥, 구태여 다른 설명을 찾을 필요가 없었어요. 말 그대로 불길한 상상이었죠.”
“…”
“제 말이 이해가 가시나요?”
이 순간, 나는 엘레나의 설명보다는 행동에 놀랐다.
방금 불길한 상상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한 것 같은데?
능력을 처음 얻었을 당시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숙련도다.
달 내부에서 불길한 상상을 극한까지 활용했다고 들었는데, 그걸 기점으로 한 단계 넘어선 것 같았다.
“으으…! 좀 쉽게 말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불길한 상상을 사용하며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엘레나.
그러니까, 엘레나의 생각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유산 혹은 축복의 불명확하고 추상적인 면을 억지로 이해할 필요 없다는 말 같군요.”
“비슷한 것 같아요!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면, 능력의 잠재력이 떨어진다?”
“이해했습니다.”
불길한 상상을 굳이 ‘악마 창조’, ‘저주’, ‘흑마법’ 같은 별도의 개념으로 바꿔서 이해할 필요 없다.
그렇게 이해하면, 정말 그런 형태로 능력이 고착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호텔이 100을 내렸는데, 사람의 지성으로 100을 이해할 수 없어 10의 개념으로 좁혀서 억지로 이해한다?
이 상태로 시간이 흐르면 정말 10의 힘만 남게 되곤 한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은솔 누나에게 적용하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무를 지면 고귀함을 얻는다. 여기서 의무는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고귀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개념인지 이해하려 할 필요가 없군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일리 있는 의견입니다. 누나도 이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
“음, 언니도 조만간 깨달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정도 이야기하던 중, 탁자 위의 절반 정도 찬 커피잔과 과자 부스러기만 남은 접시를 보았다.
엘레나는 관측소 테이블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하하! 혹시 내가 관측을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나요?”
“어머, 티 났어요?”
“눈치가 없어서 이제 알았네요. 할 말 있으신가요?”
다음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으음, 혹시 현실에서 절 본 적 있으세요?”
“예?”
“직접 만났냐는 게 아니라, TV에서 봤어도 상관없어요.”
“어…”
호텔에 오기 전의 일을 말하는 건가?
“잘 모르겠네요.”
엘레나의 표정이 즉각 어두워졌다.
“… 역시 아닌가.”
뭐가 아니라는 거지?
“아시겠지만, 전 호텔에 오기 전에도 여러 번의 삶을 겪었죠. 덕분에 기억은 굉장히 불분명하고, 파편화가 심합니다.”
“그, 그러면, 봤는데 잊었을 수도 있는 거죠?”
“그렇죠.”
“헤헷!”
엘레나가 기쁜 듯이 웃으며 관측소 밖으로 나갔다.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
대화 중 엘레나가 실망했다가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것까진 이해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통찰에도 한계가 있음을 느끼곤 한다.
“… 한번 써볼까?”
「조언 : 3 -> 2」
‘엘레나가 갑자기 왜 저러는 겁니까?’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이 새는 또 뭐라는 거야?
*
.
..
…
〿◀◨▱◈는 생각 한다.
작금의 상황은 현실이 아닌 악몽임이 틀림없다고 말이다.
여느 때처럼 기탈스모어 항성계 제3 거주 구역의 황산 바다에서 유영을 즐기던 어느 날, 13호 공작으로부터 충격적인 전언이 전해졌다.
왕께서 물질 우주를 떠나신 것 같다고.
인과의 흐름을 계측한 결과, 어쩌면 소멸의 위기에 처하셨는지도 모르겠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언이라고 생각했다.
위대한 종족의 왕은 나약한 필멸의 운명과 동떨어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자란 모름지기 블랙홀이 내뿜는 제트에 직격당해도, 초신성의 감마선 폭발에 휩쓸려도 가벼이 떨쳐내는 불멸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공작의 명령이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왕이 실종된 장소는 은하계 외곽의 자그마한 행성이었다.
특별하다면 특별한 행성이긴 했지.
어쨌든, 우주 진출을 꿈꿀 수 있는 지성체의 모행성이니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결국 별것 없는 행성이기도 했다.
대도서관에 비축한 12등급 이상의 무기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으며, 9호 안쪽의 고위 대공들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1만 내외의 하위 개체가 현지에 파견되는 정도로 충분히 문명을 뒤엎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는 자신 역시 ‘하위 개체’에 속함을 유감으로 여기곤 했다.
어쨌든, 〿◀◨▱◈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정도 수준의 문명에 의해 왕이 살해당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종의 선악을 떠나서 그럴 능력이 없다.
용이 넋 놓고 잠들어 있어도 쥐가 해칠 수는 없는 것이다.
…
은총의 시작과 함께 들려온 머나먼 성천의 소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고한 영역에서 내리쬐는 아득함을 느꼈다.
그 아득함 앞에서는 위대한 종족과 강가의 벌레를 구분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벌레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채 불가해한 절망이 끝나기만을 기다린 추한 기억들.
상황이 끝났음을 알고 고개를 들었을 때, 〿◀◨▱◈는 깨달았다.
왕이 소멸했음을 말이다.
이는, 〿◀◨▱◈가 살아온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했다.
…
이성을 잃은 채 짐승처럼 날뛴 덧없는 시간.
딱히,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날뛴 건 아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노출된 인간이 비명 지르며 물건을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어리석은 행동임은 알았지만, 해일처럼 일어난 감정의 격류를 막아내기에 이성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의 인지를 차단했다.
숙주의 몸에 이변이 생긴 줄 알고 이탈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숙주를 찾을 수 없으니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상황.
의외로, 〿◀◨▱◈는 죽음이 딱히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음에 초연할 정도의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저, 위대한 자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이 사고의 흐름을 망가트렸을 뿐.
죽음으로 끝내고 싶었다.
죽음으로 탈출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주의 먼지가 될 운명을 받아들였을 때…
목소리를 들었다.
“이 몸에 빙의해.”
“고양이인데 괜찮을까요?”
“얘네는 짐승의 몸에 깃들어도 살 수 있잖아?”
고양이의 몸에서 깨어나니, 눈 앞에 신비로운 분위기의 인간 두 명이 보였다.
예전이라면 호모 사피엔스의 개체적 특성을 구분하진 못했겠지만, 이 작은 별에서 임무를 수행한 지 몇 년이 흐른 지금은 안다.
연령대는 하나는 10대 후반, 다른 하나는 20대 후반 정도이며, 성별은 둘 다 여성이다.
주변 개체를 손짓 하나로 부리는 것을 볼 때, 이들은 지도자 격 개체다.
인간사회에 대한 정보를 기반으로 판단해 보면, 관리국 소속일 확률이 높다.
진즉 관리국을 반 이상 붕괴시키고, 잔여 세력은 집어삼켰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아있던 후예가 있던 건가?
아아…
의미 없는 생각이다.
애초에 살아서 뭘 어쩌겠다고 짐승의 몸에 깃들었단 말인가?
“에헴! 내 말 들리지?”
“…”
“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끝내고 인간과 이스의 종족의 전쟁을 멈추고 싶은데. 휴전하고 싶단 말이지.”
“…”
하는 말이 우스워서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관리국 출신인 것 같았는데, 판단력은 저능한 원숭이만도 못한 것 같았다.
왕께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셨는데 휴전은 무슨 놈의 휴전이란 말인가?
“으, 은솔 요원님! 저는 과, 관리국 부산 지부에서 근무해서 저 괴물들에 대해 조금은 압니다!”
“그래서?”
“요원님, 이 괴물들은 몸을 갈아탈 수 있습니다! 고양이 몸에 들어가 있다고 무슨, 어, 갇힌 게 아닙니다. 철창 따윈 아무 의미 없단 말입니다! 지금은 좀 지쳐있을 뿐이니, 기운을 차리는 대로 사람을 해칠 겁니다.”
“…”
“죽여야 합니다… 제발! 죽여야 합니다!”
지금 떠드는 관리국 직원 출신이라는 인간 – 중년 남성 개체로 보였다 -의 말이 차라리 현실적이었다.
인간이 만든 철창 따위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을 거야.”
“요원님, 그게 무슨 -”
“조용.”
그녀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환란의 원인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너희에게 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그런데도 나는 복수를 내려두고 휴전을 택했으니, 이는 만인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뜻이라.”
문득, 상대의 화법이 이전과 기이하게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 시작이 너이니라. 나는 난동을 부리던 네게 죽음이 아닌 삶을 내렸으니, 이는 자비이다.”
살려달라고 한 적 없다.
“그러므로 너는 명예를 알아야 하며,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상대는 갑자기 무슨 연극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가 생각하기에, 상대가 말하는 ‘명예’라는 것은 전근대의 인간이나 추종하던 우스운 망상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예 외은하에서 온 이스의 종족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시대의 인간들조차 황당하게 여길 소리였다.
…
이상하게도 주변의 인간들은 눈을 몽롱하게 뜬 채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마치, 왕은 신의 대리인이요, 봉건영주는 그 왕의 대리인이라 믿었던 오래된 망집에 사로잡힌 것처럼.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는 뒤늦게 깨달았다.
상대는 어리석은 여인도, 시대착오적인 광인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무서운 능력의 소유자였을 뿐이다.
…
은혜를 입었으니, 고귀한 자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아랫것들에게 주어진 숙명이니, 거부는 곧 불충이라.
“이제부터 네 이름은 해피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