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719)
괴담 호텔 탈출기 719화(718/794)
719화 – 결착과 선택 (6)
– 유송이
언니가 의식을 잃은 직후, 장내에 희뿌연 안개와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분위기만 보면 끔찍한 악마가 등장하는 상황 같았지만, 실제로는 다행이야.
새로이 나타난 존재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아군이니깐!
“A! 언니가 쓰러졌 -”
— 팟!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날카로운 침이 푹 찌르는 느낌이 들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곧,회색 안개로 가득한 영역에서 눈을 떴다.
“뭐야?”
당황하는 것도 잠시, 사람의 목소리를 닮은 A의 전언이 들려왔다.
“네 생각보다 훨씬 급박한 상황이다. 10초 내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하지.”
현실에서 말하기엔 시간이 없어서 환영 속에 데려온 모양인데?
다음 말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선왕께서 공주의 정신에 개입 중이시다.”
“으읏! 틀림없이 사악한 의도의 개입이야. 막을 수 있겠어?”
“…”
“지금은 네가 왕보다 강하다며?”
설마 못 하는 거야?
공작 A가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말을 꺼냈다.
“지금은 나 역시 온전치 않다. 내가 다른 두 공작과 연이어 충돌했음을 잊지 말라.”
“그 말은 -”
“적어도 약간의 휴식은 필요하다.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 그 약간의 시간이 없을 것 같군.”
천상에서 거의 모든 힘을 잃은 이스의 왕은 공작 A보다 약하다.
그러나, 지금은 공작 A 역시 다른 두 공작과의 연전으로 인해 힘이 빠진 상태!
딱 이 상황에서 왕이 언니에게 개입하니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하필 이 타이밍에! 싶었지만, 당연하게도 딱 이 타이밍에 언니가 쓰러진 게 우연일 리 없어.
이스의 왕이 공작 A가 약해진 타이밍을 노렸겠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그때, 공작에게서 기이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감정이었다.
혼돈체의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권능, ‘이심전심’이 내게 속삭이고 있다.
공작이 언니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처음엔 공작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나와 대화하며 언니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거야?
이성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외친다.
공작이 언니를 죽일 이유가 없지 않냐며, 언니를 죽이면 이스의 왕을 대체할 존재가 없지 않냐고 말한다.
다른 한편, 나는 한 가지 슬픈 사실을 떠올렸다.
솔직히 내가 가인 오빠나 아리만큼 상황 판단력이 뛰어나진 않잖아?
그러니까, 이 상황에선 내 판단을 믿기보다는 축복을 믿어야 해!
“멈춰!”
“…”
끓어오르는 안개가 보내오는 섬뜩한 시선.
나는 공작이 언니를 죽이려 함을 알았다.
공작은내가 그 사실을 알았음을 알았다.
“다른… 다른 수가 있어.”
“무엇이 있지?”
“내겐 사람의 꿈속에 들어가는 도구가 있다고! 바깥, 내 진짜 몸에 꿈의 왕국이 있어.”
“…”
“깨워줘. 깨자마자 바로 그림을 펼치면 늦지 않을 거야.”
하강할 때 가져온 도구 중 하나, 꿈의 왕국.
그동안은 쓸 일이 없었지만, 어쩌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도구.
공작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인간의 꿈에 들어가는 일 정도는 나에게도 가능하다. 애초에 너와 대화하고 있지 않나. 문제는, 선왕의 마법을 뚫을 수 있는지다. 도구 따위에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충분히 가능하지. 천상의 도구니까!”
“… 천상의 도구?”
보통은호텔이 귀하게 여기는 유산들조차 죄수의 힘을 감당할 수 없어.
꿈의 왕국이라 해도 이스의 왕이 부리는 마법에 개입하긴 쉽지 않겠지.
죄수조차 절대 개입할 수 없는 ‘모래시계’가 그런 면에선 대단히 특이한 도구라고 생각해.
얻는 과정 자체도 굉장히 특별했으니 말이야.
이스의 왕이 만전의 상태라면 꿈의 왕국 역시 개입하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죄수가 전성기 힘을 대부분 잃어 피조물에게도 위협당하는 상황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역시, 별수 없군.”
그 잠깐 사이에 공작의 살의가 더욱 강해졌다.
나는 꿈의 왕국으로 상황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공작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A는 극도로 초이성적인 논리의 화신 같은 존재.
내가말 몇 마디로 저 괴물을 설득할 수 있을까?
“…”
불가능하겠지.
논리로는 공작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래서 – 세상에서 논리와 가장 거리가 먼 힘을 사용했다.
「‘사랑받는 자’가 발동합니다.」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애초에친화가 있음에도 상대는 내게 단 한 번도 호의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딱 하나를 바랐다.
공작이 세운 견고한 논리의 성에 가장 비합리적인 균열이 발생하기를.
이로써 상대가 ‘비합리적으로’ 내 의견을 믿어주길 바랐다.
*
– 이은솔
“딱 한 명만 죽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구나.”
충격 속에서 사고의 흐름이 멈췄다.
왕위에 오를 자격을 나와 공유하는 유일무이한 존재 – 오빠.
오빠가 살아있는 한, 공작 A는 필요하다 싶으면 날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A가 날 해칠 수 없게 하려면 오빠를 죽여야 한다!
“딸아, 마지막 기회를 주마.”
“… 기회?”
“네가 두려워하는 일을 멈춰주마. 나는네 안에서 깨어나는 존재를 다시 재울 수 있단다. 그 대신, 네 오빠를 죽이겠다고 맹세하거라.”
오빠를 죽이겠다고 맹세해라.
그리하면, 각성 중인 복제체를 다시 잠들게 하겠다.
여기서 맹세라는 건 단순한 말이 아닐 거야.
결코 어길 수 없는 강력한 마법의 계약이겠지.
숨이 턱 멎었다.
사고의 흐름이 정지했다.
이 잔혹한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침착하게 생각하렴. 네가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야 한단다. 너는 이미 살기 위해 많은 생명을 해치지 않았느냐?”
스쳐 가는 과거의 기억.
공작들이 날 납치하려 했을 때, 나는 탐욕의 손을 써서 상황을 벗어났다.
당시엔 A 또한 내 편이 아니었기에 별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 하나 살자고 많은 이를 해친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 앞으로도 주저 없이 탐욕의 손이든 뭐든 쓸 거야.
무고한 이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은 있었지만…
죄책감의 무게란,결국 내 목숨만큼 무거울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말한다.
너는 수백에 달하는 타인의 목숨보다 내 목숨의 무게를 더 무겁다 여기지 않았느냐고.
그 저울에이번엔 네 오빠의 목숨과 네 목숨을 올려보라고 말이다.
나는 그러니까 –
그 순간, 어머니의 표정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푸르른 산과 같았던 풍경 일부에 갑자기 균열이 생겨났다.
마치, 또 다른 힘이 어머니의 마력을 잠시나마 걷어내는 것 같았다.
“송 -”
“이런!”
송이는 등장하자마자 나와 내 건너편의 어머니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곧, 희뿌연 섬광과 함께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 꽈악!
누군가의 강한 손길.
본능적으로 이것이 직전까지 대화하던 어머니가 아닌, 송이의 손임을 느꼈다.
“송이야?”
“절 따라오세요. 나가서 -”
“위, 위험해!”
“예?”
나가자는 송이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직전까지 어머니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금, 내 몸속에서 어머니의 복제체가 깨어나고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공작 A가 눈치채면, 즉각 나를 처단하고 오빠를 대체자로 세울 것이다.
“나가면, 나가면 위험해. A가 -”
그때, 날 붙잡은 송이의 손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난, 저 괴물이 언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요.”
“그건 -”
“설명할 필요 없어요. 보나 마나 되게 그럴듯하고 논리적인 말이겠죠. 중요한 건!”
순간, 송이에게 상당한 박력을 느꼈다.
“악마의 말에 귀 기울이면 안 된다는 사실이죠!”
“…”
“오빠가 했던 말을 잊었나요? 저건, 언니의 어머니가 아니에요. 외계인이고, 괴물이고, 악마죠. 내 가족, 언니의 가족, 과거의 나, 과거의 언니까지 – 우리 모두를 지옥으로 몰아넣으려 한 괴물이라고요.”
“…”
“무슨 말을 했든, 언니를 위하는 말이 아니에요. 교활한 속임수죠.”
어머니 – 아니, ‘이스의 왕’은 사악한 존재다.
나와 송이의 가족을 해쳤고, 우리 모두의 인생을 무너트리려 한 우주적인 악마다.
“언니… 알잖아요? 저 괴물에겐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어요. 피리를 사용해 보세요.”
곧, 익숙하기 그지없는 단단한 물체가 손에 잡혔다.
현실은 물론이고 꿈에서조차 날 가호하는 소중한 유산 – 안식의 피리.
— 라아아…!
지옥에서조차 빛바래지 않을 청명한 소리가 꿈의 세계를 가로질렀다.
안타깝지만, 피리의 힘으로도 내가 태어날 때부터 심어진 거악(巨嶽)은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이스의 왕 – 고대의 악이 미혹한 내 정신을 맑게 할 수는 있었다.
“하!”
“언니?”
“네 말대로네. 웃기지도 않은 속임수에 걸려들 뻔했잖아? 나가자!”
“괜찮겠어요?”
조금 전까진 무조건 나가자더니, 막상 나가자고 하니 이번엔 괜찮냐고 하는 송이의 모습.
지금은 청개구리 같은 모습조차 너무나 귀여워 보였다.
“물론!”
그 순간, 누군가의 사특한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딸아, 정녕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거니? 침착하게 널 위한 선택을 하라고 -”
이번에는 웃으면서 답할 수 있었다.
“미안한데, 이게 침착하게 선택한 결과라고!”
사악하기 그지없던 악마의 제안.
1. 네 마음속에서 내 복제체가 깨어나고 있다.
2. 이 상태로 밖으로 나가면, A는 널 죽이고 오빠를 왕위에 올릴 것이다.
3. 복제체의 각성을 잠시 멈출 테니, 그 사이 A가 널 해칠 수 없도록 네 오빠를 죽이겠다고 맹세해라.
“풋!”
“언니?”
“다시 생각하니 허점이 너무 뻔했네. 왜 네가 오기 전엔 몰랐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악마가 사람을 홀린다고 하는 거죠.”
— 펄럭!
다시금 꿈의 왕국이 펼쳐졌을 때, 나는 악마의 제안에 숨겨진 간단한 허점을 떠올렸다.
위대한 자의 자아 관념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
내 마음속 복제체는 이스의 왕이 여기기엔 정말로 왕 본인과 다르지 않다.
오빠라는 변수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빠는 나와 달리 참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오빠의 영혼에서 복제체가 깨어난다 해도 그 존재는 결코 천상에 오를 수 없다.
그러므로 ‘아직도’ 천상을 꿈꾸는 이스의 왕에게 오빠는 나의 대체가 될 수 없다.
공작에게 오빠는 나의 대체제가 될 수 있는 존재지만, 이스의 왕에겐 오직 나뿐이라는 것.
따라서 오빠를 죽이겠다고 맹세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지금처럼 밖에 나가도 되고 아니면 시간만 끌어도 되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맹세하든 말든 왕은 각성 중인 복제체를 다시 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우지 않으면 A에게 내가 죽으니까.
내가 죽으면, 왕의 마지막 희망인 내 안의 복제체 역시 소멸하니까.
이스의 왕이 언젠가 내 속에서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니까.
그랬기에,주저 없이 바깥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의 사랑이 아닌 어머니의 사악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
다시금, 지하 유적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악마의 환몽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것.
곧, 희뿌연 안개와 같은 A가 다가왔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잊지 말자.
악마의 말은 사악한 유혹이요, 거짓이었지만 그 안에도 진실은 있었다.
본디, 하나의 거짓은 아홉의 진실 사이에 숨겨야 효과가 뛰어난 법이니 말이다.
A가 내게 위협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괜찮다. 그대가 있는 한, 선왕이 날 해칠 수는 없을 테니.”
“도움이 되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어설프게 시전된 은총 때문일까?
반쯤 무너져 가는 지하 유적의 격벽 틈새로 바깥 하늘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안타깝게도, 태양의 온기조차 유적의 광기와 음울함을 걷어낼 수는 없었다.
천륜을 끊기에 딱 좋은 분위기가 아닐까?
“이 지리한 싸움을 끝낼 때가 되었구나.”
“…”
“세 번째 공작이여, 명령을 내리겠다.”
“당신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선왕을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