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755)
괴담 호텔 탈출기 755화(754/794)
755화 – 302호, 저주의 방 – ‘멋진 신세계’ (25)
– 김상현
저녁 무렵, 은솔 양이 우리 쪽에 합류했다.
차에 타는 은솔 양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그려져 있었는데, 꽤 많은 성과를 얻어낸 것 같았다.
날 감시하던 직원에게 묵성 요원이 사격하고, 은솔 양이 구해주면서 은혜를 베풀었다는 판정을 얻어낸 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적용하는 것.
당시엔 정말 어거지로 능력을 쓴다고 느꼈는데, 어쨌든 성과를 냈으니 상관없겠지.
차에 타자마자 키워드가 툭 튀어나왔다.
“구원파, 순수파.”
“뭐?”
“자기들끼리는 계파를 이렇게 분류하고 있더라고요.”
“… 구원파는 여명의 아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냐?”
“그렇죠. 순수파는 그 반대, 인류의 순수함을 추구하는 쪽이고.”
구원파, 순수파.
“과거에는 두 세력의 골이 깊지 않았다고 해요.”
“내 기억을 돌이켜보면, 그럴 것 같습니다.”
최초의 소원을 자각하며 깨달은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보자.
난 여명의 아들을 지상에 불러내려는 관리국과 힘을 합쳤었지.
그런데, 당시의 관리국은 내가 요청하자 당일 바로 멋진 신세계를 보여주었다.
‘구원파’의 선각자가 내게 ‘순수파’ 통제하에 있는 멋진 신세계를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
당시엔 두 세력의 갈등이 깊지 않았다는 뜻이다.
“본격적으로 쪼개진 건 이번 루프부터인 거죠. 아, 직원은 루프라는 개념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으니, 이건 내 추측.”
“왜 이번 루프 와서 쪼개진 거냐?”
다음 이야기는 흥미로우면서도 대단히 설득력 있었다.
“여명의 아들이 세상을 오염시키기 시작했으니까.”
“무슨 – 아.”
뒤늦게 묵성 요원이 깨달았다는 듯 입을 반쯤 벌렸다.
“타임라인을 정리해 볼까요? 상현 씨가 최초의 소원을 빈 회차를 A1, 지금 302호를 A2라고 하죠. A1 시점에선 구원파와 순수파의 갈등이 크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
“… 당시엔 여명의 아들이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니까.”
“그렇죠. 당시엔 위대한 자가 모두를 지켜주리라는 환상만 있던 거죠.”
내가 최초의 소원을 빈 회차, A1 시기엔 여명에 아들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순수파의 세력이 크지 않았고, 구원파는 여명의 아들 강림을 목표로 우주선을 쏘기까지 했지.
“A1 말기에 상현 씨가 의식을 망쳤어요. 덕분에 여명의 아들은 불완전한 영향만 끼치기 시작했고, 그게 지금 상황이죠.”
“전 인류의 분노조절장애 말이군.”
“예전엔 지금처럼 심하진 않았다고 해요. 21세기 들어서 갑자기 심해졌다고.”
“으음…”
“덕분에 꽤 많은 관리국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 거죠. 여명의 아들이 강림하는 건 지옥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해했다.”
A1 말기, 위대한 자 강림 의식이 나로 인해 실패했다.
여명의 아들은 세상 전체를 불완전하게 뒤틀기 시작했고, 이를 느낀 관리국 내에 회의론이 강해졌다.
“현 상황에 대해 구원파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의식이 불완전해서 생긴 문제다. 여명의 아들을 온전히 불러내면 해결된다.”
“뭐,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구만. 온전히 불러내면 천지창조가 시작되니 말이다.”
“순수파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눈을 뜨고 세상 꼬라지를 봐라. 반만 깨어나도 세상 전체를 말아먹은 존재를 온전히 깨우자고?”
“하핫! 그것도 맞는 말인데?”
“이러면서 두 세력이 쪼개진 거죠.”
이제야 302호의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 느낌.
새삼스럽지만, 내게 다른 동료들처럼 타인의 정신을 뒤흔드는 힘이 없음이 살짝 아쉬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힘이 있다면, 첫 시도 때 나도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
없는 것을 부러워해 봐야 의미 없지.
나에게 있는 것부터 잘 쓸 생각 하는 게 우선인 법.
“이 다음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 과거, 40년쯤 전에 두 세력이 크게 충돌했다고 해요.”
“그래서?”
“순수파가 아주 귀중한 물건을 훔쳤다고 합니다.”
“귀중한 물건?”
“황혼의 깃털이라고 하더군요.”
“황혼의 깃털? 그게 정확히 뭐냐?
“몰라요.”
“뭐?”
“할아버님이 저격한 직원은 말단까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위층도 아니었거든요. 지금 말한 정도가 그 직원이 가진 정보의 한계였죠.”
“알아들었다. 하긴, 중간 관리직은 설령 요원이라 해도 모르는 게 많은 법이니까.”
황혼의 깃털.
새로운 정보를 해석하기 위해 나와 묵성 요원이 잠시 침묵에 빠졌다.
은솔 양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이에 적어 보란 듯이 흔들었는데, 필시 관측소 동료들 보기 편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여러분, 밖에서 회의할 때 아리 양이 했던 질문 기억나십니까?”
은솔 양이 즉시 답변했는데, 분명 비슷한 생각을 본인도 떠올린 듯했다.
“아리가 멋진 신세계의 붕괴와 여명의 아들 강림이 무슨 상관이냐고 했었죠.”
첫 번째 시도 당시, 승엽 군의 파괴적인 행보로 멋진 신세계가 붕괴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여명의 아들이 강림하며 종말 이후 세계가 시작되었다.
왜 멋진 신세계의 붕괴는 여명의 아들 강림으로 이어지지?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지금 알아냈다.
“최초에, 구원파는 마도 의식을 통해 여명의 아들을 불러내려고 했습니다. 이 시도는 내가 저지했죠. 그러자, 구원파가 여명의 아들을 강림하기 위한 별도의 수단을 만든 겁니다. 그게 황혼의 깃털입니다.”
“황혼의 깃털을 순수파가 강탈해서… 멋진 신세계에 숨겼군요.”
여명의 아들이 강림하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 황혼의 깃털.
이걸 순수파가 빼앗아 멋진 신세계에 숨겼다.
왜 하필 멋진 신세계에 숨겼냐고?
멋진 신세계는 302호의 죄수, 위대한 자, 여명의 아들조차도 섣불리 파괴할 수 없는 장소다.
마신조차 부술 수 없는 금고인데, 귀한 물건을 이런 곳에 숨기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히야… 잠깐 사이에 많은 의문이 풀렸습니다. 은솔 양,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하핫!”
성취감이 느껴지는 은솔 양의 웃음소리.
문득, 아까부터 묵성 요원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원님?”
“… 나도 하나 깨달은 것 같은데.”
“무엇을 말입니까?”
“황혼의 깃털이 누구 손에 있는지 알겠다.”
“예? 그게 무슨 -”
직후, 나 역시 묵성 요원이 하려는 말을 깨달았다.
멋진 신세계란, 아리 양이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끝없이 반복되는 영화다.
상상을 넘어서는 악마들을 관객으로 삼는 기괴한 현상이다.
그 영화 속에, 세상의 기이함을 제일 먼저 깨달은 소녀가 있다.
종말 이후,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여덟 날개의 천사로 환생할 운명의 소녀가 있다.
“… 유소연.”
*
– 김아리
점심시간 무렵, 나는 멍하니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상황을 구경 중이다.
언젠가부터는 아예 존재감 없는 소녀를 사용 중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멍청한 애들이 자꾸 고백한다고 난리였기 때문이다.
“야, 야! 승엽아, 수풀에 Q 써봐.”
“… 아니, 스킬을 거기에 왜 쓰라는 -”
진짜 모르겠어.
승엽이는 책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머리통에 종이비행기를 날려도 생각보다 덤덤했거든?
그런데 왜 게임 가지고 놀리니까 저렇게 얼굴이 새빨개지는 거야?
“아~ 답답하네. 뒤에 저거, 파란색 애 잡아야지.”
“지, 지금 잡을 타이밍 아니야.”
무슨 핸드폰 게임 따위에 저렇게 몰입하지?
참 신기해.
내가 핸드폰이라는 걸 처음 봤을 때는 사람 팔뚝만 한 물건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런 불편한 물건이 일반인에게 널리 퍼지긴 어렵다고 생각했거든.
게다가 게임?
나는 아직도 어린애들이 게임에 환장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
막 흥분하고 그런게 필요한 거야?
생각해 보면, 나도 오래전에 재미로 주식투자를 했던 적이 있었지.
회귀자의 기억을 배제하고 순수한 감으로 도전해 봤는데, 일주일 동안 7억 5천만 원 정도 잃었어.
누군가에겐 큰일이겠지만, 나한테는 별일 아니었지.
그냥 본부장에게 웃으면서 계좌를 메꿔달라고 했거든.
본부장 표정이 한참 동안 굳더니, 내 증권 계좌를 전부 동결하는 사소한 문제가 생기긴 했다.
“와… 또 빗나갔어. 일부러 빗맞히는 거야? 아, 혹시 심리전? 일부러 개 못하는 척 연기하는 거지?”
어쨌든, 태초의 인간 버전 승엽이를 관찰하며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태초의 인간이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태초의 인간은 게임 중독에 유약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중학생 승엽이의 모습을 정말 잘 구현하고 있었다.
덕분에 최근의 승엽이는 과거와 정말 달라졌다는 점도 느꼈다.
똑똑하거나 심계가 깊은 건 솔직히 아니지만, 자신감 내지는 기세가 달라.
지금의 승엽이라면, 굳이 주먹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중학교 애들 정도는 기세로 휘어잡을 것 같다.
… 물론 주먹도 쓸 것 같아. 걔는 좀 그런 성격이라.
둘째, 이런 식으로 최초의 소원을 자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포장하든, 지금의 승엽이는 진짜 승엽이라고 보기 어렵다.
진짜 인격은 잠들어 있고 가상 인격이 대리 체험 중이라고 봐야겠지.
이래도 최초의 소원 자각할 수 있어?
모르겠어.
다른 동료들도 이 부분에 의문을 품었지만, 호텔은 답을 주지 않았다.
다만, 이 정도 이야기는 나왔다.
선택지가 A와 B인데, A가 오답임이 확실하다면, B가 미심쩍어도 고를 수밖에 없지 않냐는 것.
이 말은 솔직히 반박 못 하겠네.
저주의 방을 진행하며 내렸던 선택을 복기해 보면, 정답임을 확신한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많은 경우, ‘다른 선택은 오답이니까’ 남은 선택을 골랐을 뿐.
이번도 마찬가지다.
승엽이가 혼자서 시도했더니 실패했으니, 상황을 바꿀 수밖에 없지.
또, 이런 생각도 들어.
첫 번째 시도에서 승엽이는 과거의 기억을 ‘일부’ 되찾았다.
즉, 당시의 전개가 아주 틀리진 않았다는 이야기야.
문제가 1번부터 10번까지 있다면, 5, 6번까진 정답인데 7번부터 틀리면서 엇나간 상황.
어디가 틀린 전개인지, 맞는 전개는 무엇인지 알아내야 해.
“아, 이 게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거야? 그럼 인정!”
“…”
“어? 판수가… 3,200판? 그런데 티어가…”
이쯤에서 승엽이 표정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몇 마디 더 하면 송이를 한 대 칠 것 같았는데, 송이는 거기까지 예상했는지 슬며시 팔찌를 쓰다듬었다.
바로 그 순간.
“말이 너무 심해. 적당히 해.”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는 소녀.
갈색 머리칼, 동그랗고 큰 눈망울, 새하얀 목선.
유소연이다.
소녀는 매서운 눈으로 송이를 째려보며 말했다.
“애초에 지금 점심시간이잖아? 밥도 안 먹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얘가 열심히 핸드폰만 붙잡고 있길래 뭐 하나 봤을 뿐인데.”
송이는 겉으로는 유소연의 시비에 화가 난 듯했는데, 내 눈에는 연기임이 뻔히 보였다.
진짜 생각은 요 정도겠지.
‘어머! 얘 좀 봐? 너 지금 내가 승엽이에게 몇 마디 하니까 화난 거니?’
장담하는데 송이는 이런 상황 자체를 재밌어한다.
204호의 호텔 시네마를 즐기던 모습, 현실에서 만들었던 제국고 아이돌, 여기에 이번 사례까지.
송이는 은근히 이런 만화 같은 상황을 즐기는 성격이야.
뭔가, 만화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네.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마음 역시 저 애의 일부다.
“그냥 본 거 아니잖아. 계속 뒤에서 놀렸잖아?”
“그래서? 너랑 무슨 상관인데? 누가 보면 승엽이 여친인 줄!”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와… 대화 수준 봐! 유치한 거 실화야?
송이야, 이런 대사를 즉석에서 떠올린 거야?
누가 보면 진짜 16세인 줄 알겠다!
그나저나 가인이 말이 맞았잖아?
소연이라는 애는 원래도 승엽이에게 호감이 있었어.
솔직히 지금 승엽이가 음, 여자애를 반하게 할만한 캐릭터는 아닌데…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 모두가 NPC인 세상에 단둘뿐인 진짜 인간.
게다가 본인에게 고백도 한 적 있는 소년.
이런 요소들이 소연이의 마음을 자극하고 있는 건가?
어쨌든, 그래서 상황이 이런 식으로 풀리면 전개가 어떻게 바뀌는 거야?
애초에 지금 정확히 뭐가 바뀌었지?
“야! 박승엽!”
“어? 왜, 왜 그래?”
“할 말 있으니까 나와.”
“어? 하, 할 말? 나 이 판 아직 안 끝나 -”
“야!”
“아, 알겠어. 바로 끌게.”
곧, 소연이가 승엽이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다른 애들은 점심 식사한다고 교내 식당으로 떠났고, 승엽이와 소연이마저 떠난 교실.
유일하게 남은 두 명의 ‘중학생’이 서로를 본다.
“어때?”
“인상 깊은 연기였어.”
“오~ 정확히 어디가?”
“유치한 초등학생 같은 대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와서 감탄했어. 마치, 그 어떤 고민 없이 마음속 대사를 그대로 읊는데 그 수준이 딱 초등학생인 것 같네.”
“… 네 엄마랑 닮았다는 소리지?”
“오~ 지금 이것도 완전 미로인줄.”
“그러면 나한테 엄마라고 불러보렴.”
“…”
“…”
장소가 중학교라 그런가?
나도 뭔가 자꾸 유치해지려고 하네.
곧, 송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진지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으흠, 아리야. 지금 정확히 뭐가 바뀐 것 같아?”
“소연이랑 승엽이의 첫 만남이 바뀌긴 했네.”
“누군가 승엽이를 괴롭히고, 그걸 본 소연이가 구해주는 식으로 바뀌었어. 그치?”
“그렇네.”
송이가 모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첫 만남의 변화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바뀔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떻게?”
“그걸 지금부터 우리가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