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778)
괴담 호텔 탈출기 778화(777/794)
778화 – 302호, 저주의 방 – ‘멋진 신세계’ (44)
— 김상현
데이비드와 접촉한 후, 우리는 관리국 내 두 계파가 처한 상황을 명확히 이해했다.
여명의 아들을 현실과 묶어두는 매개체가 깃털이니, 깃털의 파괴는 곧 승리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순수파 역시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문제는, 도무지 깃털을 파괴할 수 없었다는 것.
깃털을 탈취한 순수파는 파괴할 수 없었다.
깃털을 빼앗긴 구원파는 깃털을 반쯤 포기하고, 나를 회유해 마도 의식을 완성하려고 했다.
이 교착상태가 장기간 유지된 것이 현재 상황.
여기까지 이해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302호의 관리국은 202호의 ‘터미네이터’ 같은 강대한 혼돈체를 위협할 만한 무기를 개발하지 못했구나.
격이 높은 혼돈체를 멸하기 위해선, 단순히 물리적인 위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무기 쪽에도 초현실적인 마법 혹은 궁극의 기술력이 들어가야 한다.
이계의 별 조각을 예로 들어보자.
별 조각이 뿜어내는 물리적인 파괴력은 냉정히 말해 그렇게까지 대단치 않다.
핵미사일은커녕, 대전차 미사일만 해도 별 조각보다 훨씬 빠르게 우리를 죽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핵미사일에 직격당해도 거뜬히 버텨낼 강대한 혼돈체조차 별 조각에 의한 뒤틀림을 방어하지 못한다.
물리적인 파괴력과 별개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
내 ‘최후의 섬광’ 역시 마찬가지다.
최후의 섬광에 외계의 마력이나 악마의 저주가 깃든 건 아니지만, 궁극의 기술력은 마법조차 능가할 수 있는 법이지.
인류의 악몽과도 같았던 달조차도, 최후의 섬광에 직격당하자 바로 외피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
약 5일 전, 순수파의 수뇌부를 모아놓고 최후의 섬광을 시연해 보였다.
그들이 준비한 정체불명의 혼돈체 – 강철 구슬과 거대 문어, 그리고 나무를 불쾌하게 뒤섞은 듯한 외형이었다 -가 단숨에 한 줌 핏물로 변했을 때, 데이비드의 눈에 ‘설마’하는 감정이 깃들었다.
깃털을 탈취했음에도 파괴할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순수파.
나는 그들에게 ‘깃털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 셈이다.
*
“이럴 수가! 레비아탄은 살점 한 조각에서 반신을 재생할 수 있는 불멸의 혼돈체인데!”
“이젠 아닌 것 같군.”
*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5일이 채 지나기 전에 순수파는 본격적으로 구원파와 충돌하며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했다.
깃털을 파괴하여 이 모든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 말이다.
적어도 순수파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야, 데이비드 이놈아!”
“…”
“관리국 고위 요원 출신이라는 놈이 비행기가 뭐냐, 비행기가.”
“…”
“차 타고 10분 정도 운전하면 한국에 딱! 도착하는 그런 루트 없어?”
현실에서 아리 양은 정말 그런 루트를 쓰곤 했었지.
데이비드가 크게 한숨 쉬었다.
“그런 루트는 구원파가 점거한 지 오래다. 비행기가 더 안전해.”
“이런 한심한 놈들 같으니!”
데이비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쪽을 보았다.
“조니, 1시간 내로 한국에 도착할 거야.”
“그래?”
“도착하는 대로 멋진 신세계를 일시 정지하고, ‘깃털’을 끌어내도록 하지. 파괴할 수 있을 것 같나?”
“물론이지.”
“믿음직하군.”
한 가지 미안한 이야기.
최후의 섬광은 한번 쓰고 나면 다시 쓸 수 있기까지 시간이 제법 필요하다.
당연하게도, 이와 같은 사실을 순수파에게 알려주진 않았다.
김묵성 : 최후의 섬광 재충전까지 얼마나 남았냐?
김상현 : 아직 2일 정도 더 필요합니다.
엘레나 : 도착하자마자 멋진 신세계 정지하겠다는데요? 바로 깃털 파괴하길 바라는 것 같은데.
김상현 :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최후의 섬광으로 파괴할 생각 없는데.
엘레나 : 그것도 그렇네요.
지금까지의 분석에 따르면, 깃털이란 곧 소연이다.
최후의 섬광으로 소연이를 죽이자고?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지.
그 가엾은 소녀는 아버지와 연인이 얽힌 일을 깨달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끼리 회의할 때 내가 꺼낸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적어도 목표는 해피엔딩으로 잡아야지요.’
가능하면 소연이를 죽이지 않고 끝내는 게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걸 위한 너무나 적절한 수단이 마침, 승엽 군 본인에게 있지 않던가?
김묵성 : 진짜 계획은 그 여자애를 영혼의 함에 담는 것이지.
엘레나 : 가능하겠죠? 그 여자애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긴 한데.
김묵성 : 유미는 뭐 평범했냐?
깃털 – 소연이를 영혼의 함에 담는 것이 진짜 계획.
성공하면, 가엾은 소녀는 미친 신이자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곧 닻이 현실에서 사라진다는 뜻이니, 여명의 아들은 더 이상 현실에 개입할 수 없으리라.
이론적으로 완벽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계획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래서…
“…”
불안한데?
호텔의 시련을 수없이 이겨내며 얻은 교훈.
가장 완벽한 계획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계획이다.
이게 뭐지?싶은 황당한 해결법이 뜬금없이 답인 경우가 적지 않다.
덕분에, 논리적으로 그럴듯한 해결법을 알아내고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불길함이라는 이름의 모닥불에는 적절한 땔감 역시 있었다.
세 번째 시도가 시작하기 전, 통찰을 한계까지 사용한 가인 군의 불길한 예언 말이다.
‘마지막까지 신념을 지키시길.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 당신을 실제로 이기게 할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나는 가인 군을 굳게 믿지만, 가끔은 – 정말 가끔이다 – 조금만 친절하게 말해주길 바란다.
예언을 참고하려고 해도 최소한 의미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건너편에서 반응이 왔다.
“무슨 일 있나?”
“별일 아니네.”
“하핫! 조니, 결전을 앞두고 한숨 쉬지 말라고. 나까지 불안해지니까 말이지.”
“…”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데이비드도 내심 불안하다는 소리겠지.
최후의 섬광으로 정말 깃털을 파괴할 수 있을지 우려 중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면, 극비에 속한 정보도 슬쩍 말해줄 것 같았다.
“데이비드.”
“음?”
“한 가지를 확실히 하고 싶군. 깃털은 사람이야. 그렇지?”
흑백 그라데이션의 청년, 데이비드는 놀라기보단 ‘올 게 왔구나!’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알고 있었군.”
일단 대화의 물꼬가 트이니, 다음 정보도 술술 나왔다.
“엄밀히 말해서 깃털이 곧 사람인 건 아니야.”
“음?”
“깃털이 하드웨어라면, 사람은 소프트웨어라고 볼 수 있지.”
“무슨 소리인가?”
“우선순위를 말하는 거야. 하드를 박살 내면 소프트웨어도 사라지지만, 소프트웨어를 삭제한다고 하드가 파괴당하진 않으니까.”
깃털이 파괴되면 사람 쪽은 사라진다.
하지만, 사람이 사라진다고 깃털이 파괴되진 않는 것 같다.
깃털은 별도로 파괴해야 한다는 것.
“아아… 예전 일이 떠오르는군.”
“예전 일?”
“깃털을 확보한 후, 우리는 온갖 수단을 써 깃털을 파괴하려 했네.”
“…”
“전에 말했듯이, 실패했네. 철저히 실패했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글쎄…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모르겠네. 정말 모르겠어. 깃털은 너무나 통제가 어려운 존재였고, 무수히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네. 이것 말고는 더 설명할 방법이 없군.”
“…”
“결국, 우리는 깃털에게 일종의 봉인을 덧씌운 채 멋진 신세계에 가두었다네.”
봉인?
“봉인?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래? 워낙 모르는 게 없는 친구들이니, 봉인에 대해서도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 설명을 부탁하지. 봉인이란 게 구체적으로 뭐지?”
“우리는 깃털에게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가르쳤을 뿐이야.”
“…”
“곧 도착이군. 자, 슬슬 준비하자고.”
인천 공항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올 무렵.
다시금, 마음속 회의론자가 조심스레 의문을 던졌다.
여명의 아들이 숨겨둔 속임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마지막까지 신념을 지키시길.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 당신을 실제로 이기게 할 겁니다.’
“…”
아직, 내게 큰 시련이 남아있으리라.
*
— 박승엽
난데없이 도망간 소연이를 쫓아서 뛰고 또 뛰었다.
“허억! 얘는 어디까지 가는 거야?”
송이 누나는 진즉 뒤처져서 보이지 않은 지 오래.
내가 이래 봬도 무림 고수임을 고려하면, 누나가 내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야.
이상한 건 소연이 쪽이지!
15분 이상 미친 듯이 뛰었는데, 거리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한 걸음을 떼면, 소연이도 딱 그만큼 내게 멀어졌기 때문이다.
아킬레스의 역설을 연상케 하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흐으… 허억!”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졌고, 주변 풍경은 익숙해졌다.
이곳은 학교다.
나와 소연이가 매일 마주하는 장소 말이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가가니, 운동장 중앙에 가만히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갈색 머리칼의 소녀가 나타났다.
“왜…”
“…”
“왜 갑자기 도망간 거야? 뭔가 깨달았어?”
말없이 밤하늘을 응시하는 소녀.
잠시 후, 소연이가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
“응?”
“내가 루프를 처음으로 인지한 장소는 집이 아니었어.”
송이 누나는 소연이가 처음 루프를 깨달은 장소는 집일 거라고 했었지.
‘월요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건드리다가 깨달았을걸? 날짜가 과거로 돌아가 있었을 테니깐.’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 어디였어?”
“여기.”
“뭐?”
“딱 이 장소였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기억은 안 나지만, 호텔에서 환상으로 보여줬어.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소연이에게 고백한 장소다.
“내가, 너에게…”
“좋아한다고 했지.”
“그때 뭔가 깨달은 거야?”
갈색 머리칼의 소녀가 빙그레 웃었다.
“응. 이게 내게 가장 중요한 순간이니까.”
“… 가장 중요한 순간?”
“그래. 네가 나에게 ‘좋아해’라고 말하는 순간은,내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야.”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평소의 소연이라면, 이런 말을 맨정신으로 하지 못했을 것 같아.
지금의 소연이는 어딘가 달랐다.
부끄러운 기색 따위는 전혀 없었고, 지극히 담담한 표정만 보일 뿐이었다.
마치, 그 어떤 과장도 축소도 없는 담백한 사실만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 알아?”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대충은 알지만… 제우스, 헤라 이런 거 아니야?”
“인간에게 최초로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 그에게는 에피메테우스라는 동생이 있었어.”
“…”
“제우스는 에피메테우스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내렸는데, 바로 판도라야. 판도라는 알지?”
“… 판도라의 상자.”
“그래. 판도라는 상자를 열어서 인간 세상에 모든 악을 뿌렸으니, 이는 제우스의 뜻이었지.”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이야기.
곧, 갈색 머리칼의 소녀가 빙그레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수없이 많은 환영이 스쳐 간다.
환영 속에는 잠깐이지만 아리 누나가 있었고, 리링가노르가 있었고…
유미가 있었다.
이 순간, 소녀는 내가 소망했던 모든 아름다움이 형체를 입은 무언가였다.
“나는 너의 사랑이야. 꿈이고, 갈망이야.”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환영이 뻗어옴을 느낀다.
“저 하늘의 위대한 분이 네게 내린 판도라야. 그러니까…”
부드러운 키스가 이마에 닿았을 때, 내 깊은 곳에서 금고가 열리기 시작했음을 알았다.
오래전, 나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고 있던 자가 해준 이야기.
‘믿어라. 믿음으로 살아라.’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바다에는 거북이가 있고, 널 섬으로 데려다줄 거야. 그냥 믿어봐.’
“널, 인간이 만든 상식의 감옥에서 풀어줄게.”
꿈이 시작된다.
아주 오래된 기억, 최초의 소원이 담긴 –
— 지직!
순간, 마치 불가해한 외력이 간섭하듯 모든 흐름을 끊으며 들려온 힘이 담긴 목소리.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는 법.’
직후, 기나긴 환영이 내 의식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