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789)
괴담 호텔 탈출기 789화(788/794)
789화 – 302호, 저주의 방 – ‘멋진 신세계’ (52)
— 김상현
— 끼익…!
문이 열렸을 때, 내 입가가 자연스레 미소를 지었다.
“왔군요.”
상대는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외형은 십수 년째 변함이 없었는데, 엘릭서의 효험이 확실히 대단한 것 같았다.
“안녕하세 – 어멋, 험피!”
송이 양이 손을 까딱하기도 전에 검고 둥그런 생물이 데구르르 내 옆에 굴러왔다.
— 쩌억!
다짜고짜 입부터 벌리는 모습.
곧, 송이 양이 눈살을 찌푸리며 험프티덤프티를 떼어냈다.
“험피, 얘 또 이러네.”
위기 상황마다 날 삼키고 이동한 기억 때문인지, 험프티덤프티는 나만 보면 입을 벌리곤 한다.
익숙해진 일이라 개의치 않고 따뜻한 차 한잔을 준비했다.
“송이 양, 한잔하시지요.”
“어머,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할아버지가 지금 대화 들으면 황당해하시겠네요.”
“음?”
“수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양양 거리냐고 하실 것 같아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뭐, 내겐 이게 편합니다.”
그 사이, 차를 들이켠 송이 양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으… 이거, 맛이 왜 이래요? 유통기한이 지난 지 오래된 보존식품인가 보죠? 멀쩡했을 때도 맛이 별로였을 것 같네. 돈이 아깝 -”
“내가 직접 나뭇잎 따고 말려서 만든 겁니다.”
“- 쌉싸름한 향이 매력적이네요.”
“…”
“…”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송이 양이 본론을 말했다.
“승엽이가 있는 멋진 신세계, 찾았어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발 준비합시다.”
*
— 휘이잉…!
실시간으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깥 환경.
그 때문에 방탄 방한복이나 총 등의 장비를 점검하고 있으니, 송이 양이 다가왔다.
“험프티덤프티에게 약간의 준비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예전에, 제가 막 화냈던 날 기억하세요?”
물론 기억한다.
그날은 송이 양이 처음으로 흔들린 날이기도 했지만, 엘레나 양이 죽은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그때, 제가 막 울먹거리면서 긍정이라는 소리가 나오냐고 했었죠.”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이 여정의 끝이 거의 다 왔다고 하셨고요.”
“내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와, 딱 불리한 구간만 까먹은 거 봐!”
사실, 그때 내가 한 말도 잊지 않았다.
불리한 이야기라 모른 체 할 뿐이지.
“거기서 또 4년이 흘렀잖아요? 벌써 승엽이 사라지고 25년 차네.”
“허허… 내 몸이 벌써 80살 가까이 됐군요. 송이 양은 -”
“20살요.”
“…”
“엘릭서 먹은 후에는 나이 안 먹었어요.”
“… 엘릭서를 먹을 때도 20살은 아니었습니다만.”
“험피, 이 사람 삼켜!”
— 할짝!
“… 20살이 맞는 것 같군요. 이놈, 왜 이리 혀가 끈적거립니까?”
송이 양은 잠시 쿡쿡거린 후,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도 딱히 구체적인 방법론을 알고 있던 건 아니었네요.”
“당연하지요. 내가 가인 군도 아니고, 알아봐야 뭘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냥… 그냥 진짜 믿음으로 한 말이었어요.”
“그렇습니다만,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 송이 양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아…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승엽 군이 북극에 있다는 사실 자체는 4년 전에 알아냈지.
하지만, 생각해 보라.
북극이 무슨 손바닥만 한 섬도 아니고, 우리와 함께 승엽 군을 탐색했던 순수파도 반쯤 망한 지 오래다.
탐색이 단기간에 끝날 리 없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송이 양이 엘릭서를 먹은 게 다행입니다.”
“… 관측소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 할짝할짝!
갑자기 튀어나온 관측소 이야기.
“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2,000년도 아니고, 20년 정도로 큰 문제 생길 사람들은 아닙니다. 아, 진철 군은 좀 위험하려나?”
“…”
“가인 군이나 아리 양은 괜찮을 겁니다. 진철 군도 뭐, 105호에 한번 들르면 괜찮아질 테고.”
“관측소에서 아무 신호를 보내지 않은 지 7년이 넘었어요.”
“잊으셨습니까? 미로 양이 살아있었을 때, 소환체 가인 군이 전해주지 않았습니까. 장기전에선 망원경 활용이 어려워진다고 하니, 그 때문일 겁니다.”
“그러면, 아리랑 가인 오빠 둘이 뭐 하고 있을까요?”
“…”
자연스레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이 주제는 이쯤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할짝!
게다가 아까부터 자꾸 혓바닥으로 내 다리를 핥는 험프티덤프티가 신경 쓰였다.
“이 녀석, 개도 아니고 왜 이러는 겁니까? 지능이 성장하질 않는군요.”
“…”
“기껏해야 똑똑한 개 수준입니다.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페로가 얼마나 똑똑한 생물이었는지 새삼 느끼곤 합니다.”
“…”
“그래도 이스의 공작이 남긴 유해에서 태어난 놈 아닙니까. 이렇게 지능이 성장하지 않을 줄은 몰랐 -”
“그건, 저 때문이에요.”
“예?”
“험피는 주기적으로 뇌에 해당하는 신경조직을 발달시키려고 해요. 발달이 끝나면 분명 똑똑해지겠죠?”
“설마…”
“그때마다 사람을 시켜서 신경조직을 파괴했죠.”
“…”
“이 녀석은 페로와 달라요. 정말로 인간을 고깃덩어리처럼 여기죠. 외계 종족이니까요.”
“…”
“친화 때문에 내게는 어미를 따르듯이 복종하지만… 지능이 높아진 후에도 그럴까요?”
“이해했습니다.”
송이 양의 마음은 이해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험프티덤프티가 지능을 발달시키려 할 때마다 신경절을 파괴한다니?
이건 조금 과한 행동이 아닐까?
“그런데, 이 녀석 왜 자꾸 내 다리를 핥는 겁니까?”
“아, 최근에는 점점 다리 고기 맛을 좋아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아래를 보니, 두꺼운 방탄 방한복 때문에 마치 두툼한 닭 다리처럼 부풀어 오른 다리가 보였다.
… 다시 생각하자.
송이 양의 행동은 전혀 과하지 않은 것 같다.
“출발합시다.”
“험피, 선생님 삼켜!”
“…”
— 쩌어억!
*
— 유송이
살갗이 얼어붙을 듯한 통증을 느끼며 도착한 북극 기지.
도착 직후, 선생님이 제일 먼저 보인 반응은 ‘?’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 아까 설명은 들었습니다만, 직접 확인하니 놀랍군요. 정말 보이지 않습니다.”
북극 기지는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다.
애초에 현실에 속해있다고 보기 어려운 장소였다.
이래서 오래전, 미로가 소환했던 가인 오빠도 북극 기지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오직, 다양한 관점의 경계면 이동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불가해한 영역.
— 철컥!
“들어갑시다.”
“싸우실 수 있겠어요?”
“그게 무슨 – 아하, 내가 너무 늙어 보입니까?”
“…”
“하하! 아직 짐이 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북극 기지에 진입하기 직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너무 긴 고통’이었지만, 입장을 바꿔보자.
여명의 아들이 생각하기엔 ‘너무 짧은 고통’이 아닐까?
내가 여명의 아들이었다면, 우리를 고작 20여 년 괴롭히려고 이 상황을 만들진 않았을 것 같아.
최소 수백 년, 심하면 수천 년 끌고 갈 생각이었겠지.
우리는 전부 밖에서 말라 죽고, 관측소의 동료들도 심신이 무너질 만한 기나긴 시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 멋진 신세계에 갇혀있던 승엽이가 물리적인 나이를 아예 먹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된다.
분명, 승엽이는 지금도 10대 중반의 외형 그대로겠지.
여명의 아들?
그쪽은 수천 년이 아니라 수십만 년이 흘러도 코웃음 칠 존재야.
…
우리가 위대한 자의 계획보다 훨씬 빨리 승엽이를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
— 크르륵!
“… 네덕분이구나.”
다양한 관점과 험프티덤프티 덕분이다.
즉, 내가 302호에서 ‘새롭게 얻은 능력’ 때문이다.
“송이 양?”
“위대한 자의 예측, 계획에도 한계가 있네요.”
“무슨 말입니까?”
“세 번째 시도가 시작할 때까진 존재하지 않았던 요소. 여기까진 위대한 자도 읽을 수 없었어요. 험프티덤프티는 사실상302호에서 태어났으니까.”
“호오… 그렇다면, 이 교훈을 다음에도 써먹으면 되겠군요.”
“네?”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기존에 없던 요소를 활용해서 – 으윽! 왜 차는 겁니까?”
“다음은 무슨 다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
기지 내부를 진압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부에 관리하는 사람이라곤 겨우 두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허엇! 이곳에는 어떻게 -”
— 탕!
“보, 본부에 신호를 – ”
— 타당! 으적!
“어허! 먹는 거 아니야!”
“참, 식욕이 많은 친구군요.”
하기야, 사람이 많았으면 우리에게 더 빨리 들켰겠지.
“저거, 스크린입니다. 멋진 신세계의 입구군요. 들어갑시다.”
짐작은 했지만, 승엽이가 갇혀있던 멋진 신세계는 정상이 아니었다.
내부에 다른 사람도 없고, 상영 중인 영화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멋진 신세계라고 부르기도 뭐하다.
그냥, 승엽이를 가두기 위한 감옥에 멋진 신세계의 구성원리 일부를 이용했을 뿐.
…
쇠사슬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집 혹은 방이 있었다.
내부에는 제법 거대한, 얼음 동상 같은 것이 있었고…
건너편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소년이 있었다.
아주, 아주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동료.
승엽이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끔찍하고, 더없이 고통스러운 꿈.
스스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악몽.
“이런 상태였군요. 어쩐지, 꿈의 왕국으로도 접근할 수 없더라니.”
“…”
“깨웁시다.”
승엽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마침내, 25년의 세월을 넘어 구조대가 도착한 것이다.
*
오랜 시간 승엽이를 탐색하며 항상 궁금했어.
아무리 3층이라지만, 죄수가 이렇게까지 개입할 수 있는 걸까?
물론, 301호의 죄수였던 이스의 왕 역시 만만치 않게 개입이 심하긴 했지.
1, 2층과 3층은 층수부터 다르니까, 죄수도 더 큰 힘을 쓸 수 있을지도 몰라.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 정도는 좀 심하지 않아?
…
어쩌면, 여명의 아들이 더 강하게 개입할 수 있는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이 충족된 게 아닐까?
정답이었다.
“… 위대한 자의 신념이란 곧 본질이며, 방향성입니다.”
우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고통받은 승엽이.
그는 어느샌가 여명의 아들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이해한 것 같았다.
“승엽 군,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겠습니까?”
“사람은 마음이 동하는 일을 하면 생산성이 높아지고, 싫어하는 일을 하면 생산성이 떨어지잖아요?”
“그렇지요.”
“여명의 아들에게는 이와 같은 현상이 훨씬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는 신념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그 부분은 쉽게 이해가 가는군요. 실제로 천사가 된 소연 양의 자유의지를 빼앗는 대신, 다음 회차를 택한 존재니까.”
“반대로, 신념에 맞는 행동을 할 때는 강해지죠.”
쉽게 말해, 여명의 아들은 신념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다.
누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죄수 본인의 마음이 본인을 그런 식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오래전에… 그는 제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어요.”
“…”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죠.”
“그 제안을 승엽 군이 받았군요.”
“…”
“참가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는 상황이니, 여명의 아들은 강림하지 않았는데도 더 큰 개입력을 얻었고.”
“…”
“무슨 제안이었습니까?”
아주 오래전, 소년을 지옥에 떨어트린 마신의 속삭임.
“소연이…”
“그 애와 관련한 제안이었습니까?”
“그 애는 죽기 직전에 여명의 아들에게 살려달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영혼 자체가 위대한 자에게 붙들려 있었죠.”
아.
이 말을 듣는 순간, 문자 그대로 숨이 막혔다.
“그래서?”
“… 어떻게 구할 생각이냐고 했어요. 참가자가 아니니 티켓으로 살릴 수도 없고, 영혼의 함에 담고 싶어도 영혼이 위대한 자에게 잡혀있으니까요.”
“참가자가 아니니 티켓으로 살릴 수 없다. 이건, 부활의 방만 고려한 이야기군요. 거울의 방으로도 유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지 않습니까?”
참가자가 아니니 부활의 방에서 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거울의 방에서 소원을 비는 가능성도 있지 않냐는 반문.
“…”
승엽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선생님은 곧 그 답을 스스로 알아차렸다.
“아하, 거울의 방에 정상적으로 소원을 빌기 위해선, 마음을 한 점으로 모아야 합니다.”
“…”
“이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군요? 생각해 보면, 승엽 군에겐 또 다른 사랑이 있고…”
“…”
“심지어, 티켓은 본래 유미 양을 살리는 데 쓰자고 했었으니 말입니다.”
거울의 방에서 참가자가 아닌 소연이를 살릴 수 있을까?
가능과 불가능을 떠나서, 승엽이는 이 소원을 제대로 빌 수 없다.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이해했을 때, 나와 선생님은 한 가지를 이해했다.
“당신의 첫사랑 – 소연 양을 정상적으로 살릴 방법이 없군요.”
“…”
“오직, 죄수의 협조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영혼을 얻어낼 방법이 아예 없습니다.”
“…”
“거래란 주고받는 게 있어야 성립하는 것. 소연 양의 영혼이 대가였군요. 그렇다면, 죄수는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 한 번.”
“한 번?”
“한 번 더 놀아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승엽이는 이렇게 몇십 년 끄는 지연전까진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제안을 받을 때는 한 회차 더 놀아보자는 이야기만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명의 아들도 약속을 어긴 건 아니다.
한 번 더 가자고 했지 ‘언제’ 가자고 하진 않았으니까.
“하핫! 하하하! 여명의 아들, 이 유치한 양반 같으니!”
“예?”
“한 번 더 놀아보자는 말, 가인 군이 예전에 했던 말 아닙니까? 은근히 마음에 담아둔 모양입니다.”
어설프게 상황 이해를 마칠 무렵, 선생님이 손을 뻗어 얼음 동상을 가리켰다.
“문제의 아가씨, 저 동상입니까?”
“…”
“여명의 아들이 약속을 지키긴 했군요. 이것까지도 어길 수 없는 신념의 일부인가?”
“…”
“그런데, 영혼의 함에 아직 담지 않은 모양입니다?”
바로 그 순간.
아까부터 넋 나간 듯 멈춰있던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 죄송합니다.”
“승엽 군?”
“흐으으… 제가 너무, 너무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서…”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후회했어요.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제안을 받지 않았어야 했는데… 아아…!”
후회였다.
위대한 자의 유혹에 넘어간 것에 대한 절망과 비탄이었다.
제안을 받아들이니, 계약 자체가 일종의 마법이 되어 자신을 묶어버렸다는 이야기가 함께 나왔다.
이래서 그동안 혼자 탈출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게, 승엽이가 한참 동안 절망 섞인 울음을 토해냈을 때.
…
지그시 바라보던 의사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 승엽 군. 당신이 여명의 아들의 협박에 당했다고 했을 때, 나는 전혀 화나지 않았습니다.”
“예?”
“날 보시길. 내가 203호에서 겪은 일을 기억해 보십시오. 나도 아드라비타의 제안에 넘어갔고, 내 손으로 아리 양을 죽일 뻔했습니다.”
“어-”
“사랑하는 아가씨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사나이에게 아가씨보다 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그, 그건 -”
“당신이 지연전과 관련한 위대한 자의 속임수에 당했다고 했을 때, 역시 전혀 화나지 않았습니다. 여명의 아들이 간교하고 사악했을 뿐이지.”
“…”
“애초에, 궁지에 몰린 인간 하나도 속이지 못한다? 그건 그냥 잡귀지, 위대한 자가 아닙니다.”
의사 선생님은 승엽이가 협박에 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승엽이가 여명의 아들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이로 인해 우리가 고생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예?”
“수백 수천 번 후회했다고? 아니, 뭘 후회했다는 겁니까?”
“그건 -”
“이 고생을 했으니, 한 개도 빠짐없이 다 얻어가도 모자랄 판인데. 뭐? 사랑하는 아가씨를 포기하는 게 맞았다는 소립니까?”
지금의 승엽이가 과거의 선택을 후회한다고 했을 때 화가 난 것이다.
승엽이가 허둥지둥하며 답했다.
“가, 가인 형이 말했잖아요? 과거의 일은 포기하라고!”
“그래서?”
“시간이 흐르며 이해했어요. 그 말의 뜻이 이거였구나. 모두가 이 고생을 하느니, 소연이를 포기하는 게 맞았 -”
가인 오빠는 ‘소연이를 포기하라’고 말했다.
승엽이는 그 뜻을 이해하고 긴 세월 후회했다.
…
이때, 나는 진심으로 선생님의 답이 궁금했다.
언제나 가인 오빠의 충신과 같던 사람이 어떻게 답할지 궁금 –
“이 병신 새끼!”
“으악!”
“그 양반이 무슨 신이냐? 인간성이 좀 메마른 양반이니, 애인 같은 건 대충 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거지!”
“어, 어 -”
“너는 최초의 소원부터 사랑을 구하겠다는 놈이!”
“…”
“그러면, 그 양반이 뭐라고 했든지 간에 네 선택을 후회하지 말아야지!”
말문을 잃은 소년에게 의사 선생님이 거칠게 팔을 걷어붙이며 다가갔다.
“내, 오늘에야 아리 양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예? 예?”
“예전에 아리 양이 말했었죠. 승엽이 녀석 부모님이 왜 이리 제대로 혼내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승천자도 당신에게 제대로 된 부모가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어 -”
“오늘, 내가 승엽 군 부모님과 이자성 그 양반이 못한 일을 끝내겠습니다.”
“으악, 서, 선생 -”
“본래, 소년이 남자가 되려면 한번 제대로 맞아야 하지요. 오늘이 그날입니다. 마침, 내가 아들을 키워본 적 있어서 다행이군요.”
소년이 마침내 ‘아버지’를 만났다.
혹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겠지.
설마 여기까지 호텔의 의도는 아니었겠지?
…
교육이 끝날 무렵, 승엽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25년 내내 후회만 한 건 아니지?”
“누나, 제가 그렇게까지 병신은 아니에요. 아마도.”
승엽이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휘광.
깨달음의 징표와도 같은 것.
그 빛이, 내 마음속 한 켠에 남아있던 절망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씻어냈다.
…
근데 승엽아.
누나도 진짜 딱 하나만 묻고 싶은데 참았거든?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아서 거울의 방에 소원을 빌 수 없을 것 같았다는 말, 대체 무슨 뜻이니?
이 말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진짜 엄청나게 때려주고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