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804)
괴담 호텔 탈출기 804화(803/836)
804화 – 마법사의 연구 (6) Fin
— 박승엽
혼란에 빠진 남극 기지의 수습이 끝날 무렵,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이해했다.
의사 선생님과 송이 누나를 비롯한 동료들이 죄수의 손에서 날 구출하기까지 25년이 걸렸다.
7년 차부터 문명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하니, 약 18년가량의 무질서한 세월이 있었다는 뜻.
이 시기를 세간에선 대전쟁이라고 한다.
남극 기지의 참극은 대전쟁이 낳은 여러 비극 중 하나였다.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혹한의 땅.
관리국과의 연결이 끊기니,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는 이야기.
처음엔 어떻게든 그나마 가까운 칠레 쪽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탈출선을 파괴했다고 한다.
이후의 일은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였다.
부족한 식량, 무너져 가는 질서.
매일매일 말라비틀어지는 사람들.
서서히 시작된 식인의 공포.
“흐으으… 다, 당신은 모릅니다.”
“그만.”
“가족처럼 지냈던 동료가, 어느새 형형한 눈으로 내 몸을 보는 게 어떤 기분인지!”
“필립 모리슨 소장. 더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생존자가 두 자릿수 미만으로 떨어졌을 때, 그들은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남극에 악마가 나타났다.
“나는… 평생 인류를 위해 헌신했다 생각합니다.”
“…”
“과, 관리국에 충성을 다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감히 우리를, 타, 타락했다고 -”
“소장, 아니라고 했잖아요.”
“…”
광인처럼 지껄이던 소장이 넋 나간 듯 내 쪽을 보았다.
“말했죠? 내가 관리국 본부 실세라니까? 내가 한마디 하면 데이비드 그놈도 꼼짝 못 해.”
“…”
“내가 책임집니다. 치료받고 관리국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해줄게요. 그러니까, 지하로 갈 수 있는 승강기나 준비하세요.”
— 덜컹!
*
— 김상현
“어떤 의미에서, 나는 당신의 동료를 존경합니다.”
이 목소리! 한 번 들어본 것 같은데?
곧,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오르며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두 번째 시도 후반, TT 빌딩에 나타나 동료들과 데이비드를 죽였던 존재!
정황상, 데이비드가 언급한 이미 풀려난 악마 중 하나가 이놈이다.
관리국의 비밀 기지에 난데없이 난입한 괴물!
상대의 형상은 살아 숨 쉬는 검붉은 벌레들의 집합처럼 보였다.
악마는 끊임없이 꾸물거리며 사람의 얼굴을 흉내 냈는데, 몸 없이 얼굴만 있는 모습이 불쾌한 골짜기를 자극해 더욱 끔찍했다.
“이번에도 당할까보냐!”
눈을 부릅뜨는 순간, 상대가 재밌다는 듯 답했다.
“이번에도 당하다니요? 하하! 저로서는 초면입니다만.”
악마 놈이 나와 동료들을 죽인 건 두 번째 시도 후반, 즉 ‘전 회차’의 일.
상대는 대단히 강하긴 하나 죄수는 아니었고, 참가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따라서 전 회차의 일을 모른다는 말은 사실이겠지.
“우리, 전에 만난 적 있는 모양이지요?”
하지만, 조롱하는 듯한 말투가 심히 불쾌하다.
“너 이 자식…!”
언제든 최후의 섬광을 쏠 수 있도록 준비하려는 때, 귀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나와 싸울 생각입니까? 주변을 한번 돌아보시지요.”
“…”
“싸우기 좋은 장소는 아닌 것 같아요. 그렇죠?”
두 번째 시도 당시 나와 동료들을 찢어 죽인 흉측한 악마.
이런 괴물과 대화하고 있으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고, 목구멍에선 뭔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싸우기 좋은 장소가 아니라는 악마의 말은 사실이다.
주변은 기껏해야 30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고, 심지어 지하 15층이기 때문이다.
이런 장소에서 최후의 섬광을 쏜다?
악마가 죽고 말고를 떠나서, 이후에 벌어질 지반 침하로 나는 무조건 죽겠지.
“…”
위층의 승엽 군도 위험하다.
행운의 축복이 있지만, 그 힘이 승엽 군을 무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또, 승엽 군의 가장 강력한 힘인 ‘천운’은 302호 해결 당시 사용해서 아직 쓸 수 없고.
“진정하신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아, 사과라도 해야 합니까?”
“…”
“아이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사라진 역사 속에서 당신을 잡아먹어서 죄송합니다.”
“… 잡아먹진 않았다.”
“아, 그건 다행이군요.”
이 악마, 전 회차의 일을 기억하진 못하는 것 같지만, 호텔에 수집 당한 세상이 반복된다는 사실은 아는 것 같다.
“장난은 이쯤 하자. 무슨 생각이지? 불령해탈(不令解脫)?”
마지막 단어, 불령해탈을 사용한 건 다소 즉흥적인 판단이었다.
은근슬쩍 기세가 상대 쪽으로 넘어간 상황.
따라서, 나도 네놈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다는 블러핑이 필요해 보였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 불령해탈. 그단어가 무슨 뜻인지는 압니까?”
시종일관 장난기 어린 태도를 고수하던 상대가 처음으로 진지한 반응을 보였으니 말이다.
“물론! 관리국에 너희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었다.”
“…”
“데이비드에게 들었다. 관리국에 대대로 전해오는 신화 같은 이야기가 있다고.”
요원은 물론, 선각자들조차 구전설화처럼 여기는 수준의 오래된 이야기.
두 번의 몰락.
‘시작과 끝을 무수히 거슬러 올라가면, 진실로 위대한 문명이 있었다. 우리의 선조는 지금의 우리를 원숭이로 여길 정도로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다.’
‘두 번의 몰락이 있었다. 첫 번째 몰락이 100을 10으로 만들었고, 두 번째 몰락이 10을 1로 만들었다.’
‘첫 번째 몰락에 대한 정보는 훨씬 부족하다. 더 오래전 일이니, 당연한 일이다. 알려진 유일한 정보에 따르면, 해탈을 막는 자들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너희들, 해탈을 막는 자들이…!”
“…”
“위대한 첫 번째 문명을 무너트렸다.”
그때, 인간의 얼굴을 흉내 낸 검붉은 형체가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뭐?”
“첫째, 우리는 당신 생각처럼 단일한 집단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
“내가 여명의 아들의 하수인처럼 보입니까?”
“…”
“직접 생각해 보시길. 나야 이전 회차의 일은 모릅니다만, 당신은 알 테니까.”
침착하게 생각해 보니, 악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여명의 아들은 불령해탈에 속한다.
눈앞의 악마도 불령해탈에 속한다.
하지만, 두 존재는 딱히 서로를 돕지 않았다.
여명의 아들이 악마를 영화관에서 구해낸 적도 없고, 악마가 여명의 아들을 위해 우리와 맞선 적도 없다.
“당신이 모시는 분 – 천상의 옥좌에 앉은 분. 그는 자기 뜻에 반하는 자를 모조리 역천이라 여깁니다.”
“… 천국에 반하는 존재?”
“그리 말할 수도 있겠지요.”
삼천 세계를 위해 눈물 흘리는 자는 천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따라서이에 반하는 이를 모두 ‘불령해탈’이라 칭한다는 이야기.
물론, 이는 한 쪽의 일방적인 의견임을 감안하자.
“둘째, 우리가 최초의 문명을 몰락시켰다는 말은 글쎄… 동의하기 어렵군요.”
“…”
“노트에 적힌 내용 기억하시지요? 제가 보여드리지 않았습니까?”
…
A라는 지식이 있다.
A를 알게 되면 A1이라는 대응을 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그런데, 모두가 A1을 택할 경우 모두가 패배한다면 어떨까?
…
“우리는 여러분께 A를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
“A1을 선택한 건 과거의 인간 여러분 자신입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래전, 우리의 선조는 스스로 A1을 선택했다고 한다.
… ‘모두’가 말이다.
“대체, A는 뭐고 A1은 뭐지? 무슨 이런 말장난을 – 으읍!”
다음 순간, 갑자기 검붉은 촉수가 벼락같이 날아와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으읍! 크윽!”
“욕심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그 정도는 스스로 알아내셔야지.”
천천히, 가혹하게 목을 조여오는 촉수.
어떻게든 저항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아까와 같은 이유로 도저히 최후의 섬광을 쏠 수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악마에게 죽는 건가?
이대로 죽으면, 천상의 동료들이 티켓을 써서 날 살리겠지?
이런 생각에 휩싸여 의식을 잃기 직전.
— 휘이잉!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다.
곧, 악마가 천천히 천장을 보았다.
— 서걱!
벼락같이 내리친 묵빛 벼락이 악마를 쪼갰다!
“선생님! 괜찮으시죠?”
*
.
..
…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남극 기지 전체를 집어삼켰던 사악한 마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마왕을 멸할 비수’를 챙겨서 지상으로 돌아왔고, 승엽 군은 살짝 흥분한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예를 들면, 데이비드에게 말해서 남극 기지 연구원들을 죽지 않게 해달라는 이야기.
“그렇게 합시다.”
“괜찮겠죠? 이 사람들이 악마의 속삭임에 흔들리긴 했지만, 어, 자의는 아니었잖아요. 어쩔 수 없이 굴복했을 뿐이니까 -”
관리국은 자의로 타락했든 협박에 당해 타락했든 따지는 조직이 아니다.
식빵에 곰팡이가 피었을 때, 곰팡이의 이유까지 따질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나와 승엽 군이 부탁한다면 그건 통하겠지.
“괜찮을 겁니다.”
남극 기지 직원들이 더 이상 관리국에서 일하긴 어렵겠지만, 기억 소거 조치 등을 받은 후 일반인으로 살아갈 수는 있으리라.
“어떻게, 비밀 무기는 얻으셨나요?”
“챙겼습니다.”
“하핫! 다행이네요.”
“승엽 군도 깃털의 힘을 쓸 수 있게 된 모양입니다? 아까 악마를 처치했던 힘, 분명 포르투나의 힘으로 보였습니다.”
승엽 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네. 그러니까… 예전의 깨달음의 연장선이었어요.”
“예전의 깨달음?”
“말했잖아요? 깃털의 본질은 여명의 아들과 같다. 따라서 사람을 위할 때 그 힘이 극대화한다.”
“이해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하강.
성과는 있었다.
승엽 군은 인간을 위해 행동할 때, 깃털의 힘을 다시 쓸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 철컥!
“이게 비밀 무기인가요?”
“그렇습니다.”
“으윽! 자, 잠깐만 봐도 눈이 아픈데…”
“내 눈도 아프군요. 아무래도 계속 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뫼비우스의 띠’를 얻었다.
하강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걸 모두 이룬 셈이다.
따라서 나와 승엽 군은 조만간 호텔로 돌아간다.
“…”
다만, 한 가지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선생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 승엽 군, 악마에게 날렸던 마지막 일격 말입니다.”
“하하! 천하제일의 참격 말이죠?”
“객관적으로 위력이 어느 정도입니까?”
“예?”
“최후의 섬광 정도입니까?”
“어, 어, 그, 그렇진 않을 것 같은데요.”
“…”
두 번째 시도 말미의 일을 생각하자.
상대는 죄수와 비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강한 악마였다.
이런 존재가 승엽 군의 참격 한 방에 죽었다고?
강자라 해도 약자의 비수에 찔리면 죽을 수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남극 기지 전체를 지배했던 악마가 승엽 군의 접근을 정말 몰랐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하에서의 마지막 일이 이상하다 싶어 고민하는 시점.
“어?”
가방을 뒤적이던 승엽 군이 이상한 목소리를 내었다.
“왜 그럽니까?”
“바, 방금 가방에 뭐가 생겼다가 사라졌어요.”
“예? 뭐가 말이죠?”
“어… 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