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827)
괴담 호텔 탈출기 827화(826/836)
827화 – 303호, 저주의 방 – ‘타임머신’ (16)
— 김아리
하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상은 끝없이 펼쳐진 끔찍한 황무지였다.
태초의 지구.
생명이 없고 오직 불과 재만이 존재하는 원시의 혼돈.
멀찍이 수평선 너머에는 수십 개의 화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끊임없이 불길을 뿜어내며, 하늘로 붉은 연기 기둥을 솟구치는 거대한 화산지대 말이다.
산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붉은 용암이 지면을 지옥처럼 불살랐다.
용암이 흐르는 대지는 끊임없이 끓어오르며 증기를 내뿜었는데,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끔찍한 열기와 함께 타는 유황의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운 지 오래.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 깊숙이까지 그 뜨거운 냄새가 파고드는 걸 느꼈다.
피할 곳은 없다.
명왕누대(冥王累代).
이 시대의 지구는 문자 그대로 명왕이 지배하는 지옥 그 자체였으니까.
— 딱!
“쉽지 않네.”
페로 가인이 이 말을 꺼내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부리를 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폐를 찔렀을 테니까.
“곧 이 구간도 끝날 거야.”
체감상 한 걸음 뗄 때마다 몇십만 년씩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네.
물론, 열반 열차에서 시간대를 측정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은 없겠지만.
— 딱!
“이쯤에서 확신을 얻었어.”
가인이가 부리를 열 때마다 딱 소리가 난다.
발음도 어딘가 이상했는데, 아무래도 열기에 부리가 상한 것 같았다.
“과거의 너와 알레프가 이 구간을 넘었다는 게 말이 안 돼.”
“…”
“부등변다면체도 없고, 윙 부츠도 없고. 불가능. 둘 중 하나야.”
“뭔데?”
“넘지 못했거나, 다른 루트가 있거나.”
“뜨거우니까 다음 회차 이야기는 나가서 하는 게 좋겠 -”
그 순간.
— 스아앗!
빛이 사라지고, 주변이 어두워졌다.
용암이 뿜어내던 열기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지구와 태양이라는 게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
정말 지구도 태양도 없는 시기까지 거슬러 온 걸까?
천문학에 따르면, 태양 이전에 1세대 항성이 있다고도 하던데…
모르겠어.
이쯤 되면 내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느낌이야.
그저, 공허한 어둠을 앵무새 한 마리와 함께 말없이 걸어갈 뿐.
— 딱!
“이 와중에도 철로는 있구나.”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걷고 또 걸었다.
한 없이 차갑고 어두운 공허.
의지할 수 있는 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철로뿐.
그리고…
전방에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나타났다.
“뭐야? 가인아, 저거 보여?”
— 딱!
“무슨 장막처럼 보이는데?”
하얗게 빛나는 장막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으읏!”
— 푸드득!
나와 페로 가인이 동시에 굳었다.
깨달았다.
깨달았다.
깨달았다.
장막은 루프와 루프 사이를 가로막는 벽.
우주에서 가장 드높은 벽이니, 육신을 가진 자가 접근할 수 없다.
넘을 수 없다.
넘어선 안 된다.
아찔한 두통, 격한 현기증, 토할듯한 혼란스러움.
거부감, 역겨움, 죄책감, 절망감, 두려움, 슬픔 –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총체가 끓어오른다.
또한, 장막에 한 발짝이라도 더 접근하는 건 천지에서 가장 끔찍한 대죄처럼 여겨졌다.
“흐으…!”
— 딱!
“여기까지인 건가? 도저히 더 다가갈 수가 없어.”
“가인아, 하지만 탈출 판정이 -”
탈출 판정이 뜨질 않는데 어떻게 해? 라고 말하려는 시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잘 아는, 하지만 여기서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목소리가!
“아리 선배! 그쪽 상황은 괜찮습니까?”
그 순간, 팽팽한 끈이 끊어졌다.
“어? 묵성아?”
“이런! 대답하지 마!”
“뭐야? 어떻게 그런 곳에…”
“으윽! 아, 아리 선배님. 이쪽 상황이 완전 위기입니다!”
“대답하지 말라니까! 저게 할아버지일 리가!”
“조금만 기다려. 도와줄게.”
장막으로 다가갔다.
눈앞이 어지러웠고, 주변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울리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한 없이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다가오는 손길.
곧, 생각이 마치 검은 안개 속으로 가라앉듯 흐릿해졌다.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게 1회차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한가인
이렇게까지 갑작스러운 공격이라니?
설마, 목소리 흉내 한 번으로 아리를 무너트릴 줄이야!
상상도 못 한 타이밍에 들려온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리의 긴장감을 일순간 흔들기도 했겠지만…
이런 걸 떠나서 순수하게 상대의 출력이 너무 강하다.
나는 버텼는데 아리는 당했다?
그런 개념이 아니라 단순하게 상대가 아리부터 노렸을 뿐.
— 푸드득!
정신없이 날개를 퍼덕여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고작해야 앵무새의 비행 속도로 저런 괴물을 떨쳐낼 수 있을까?
— 스아아…!
뒤편에서 느껴지는 흉측한 악의.
장막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부정한 존재감.
당장이라도 역천의 벽을 넘어올 것 같은 새하얀 손의 환영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열차 끝까지 가서 303호의 대적을 만나야겠다는 판단이 틀렸던 걸까?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정원사 무리를 다 죽였는데도 탈출 판정이 뜨지 않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 푸드득!
또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상대는 절대로 할아버지가 아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어떻게 알지?
아리를 제압하고 기억을 뒤져서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알아낸 게 아니야.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걸 이용해서 아리를 제압했다.
… 설마, 할아버지는 저놈을 만난 적이 있는 건가?
치, 침착하자.
이 부분은 나가서 할아버지랑 이야기해 보면 된다.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넘어갈지부터 고민해야 –
— 쩌어억!
도망갈 수 없다!
그렇다면, 아직 살아있을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맞서야 할 때.
— 펄럭!
극성에 달한 화신의 힘이 소용돌이처럼 주변으로 뻗었다.
태어나지 못한 자는 어떤 이치를 궁구했는가.
마도의 본질은 경계의 소멸에 있으니, 진실로 위대한 자에게 타자란 없다.
너와 내가 없다.
아와 비아가 없다.
육체와 정신, 혼의 구분조차 무용하다.
나는 ‘엘디스트’가 되었다.
엘디스트는 ‘한가인’이 되었다.
… 서로의 경계가 무너진 찰나의 순간.
‘완전함’을 느꼈다.
그 어떤 흠결도 없다.
몸과 마음, 영혼까지 통틀어 그 어떤 하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삶에 비유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육체에 비유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신에 비유하면, 불완전한 요소를 전부 도려낸 것처럼.
단 하나의 얼룩조차 없다.
— 서걱!
‘한가인’은 엘디스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벼락이 내리치며 합일이 무너졌다.
엘디스트는 다시 엘디스트가 되었고, 한가인은 다시 한가인이 되었다.
“너는 대체…”
아득함을 느끼며 삶에 대해 생각한다.
실패하고, 깨어지고, 꺾이고, 슬퍼하고, 한탄하는 순간은 모두에게 있다.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도 있다.
3층의 죄수였던 이스의 왕이나 여명의 아들에게도 실패가 있고, 한탄이 있었다.
엘디스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정상적이지 않다.
세상에 이런 존재가 있을 수는 없다!
이 순간, 내 마음을 가득 채운 감정은 괴이하게도 ‘감탄’ 내지는 ‘열등감’에 가까웠다.
완전하지 못한 자가 완전함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 말이다.
— 고오오…!
장막 너머의 혼돈에서 들려오는 아득한 소리.
환영인지, 실체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새하얀 손이 나를 덮쳐온다.
이 순간, 나는 패배를 직감했던 것 같다.
저렇게 완전한 존재라면 이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
..
…
아들아.
— 화르르…!
모든 것이 멈춰선 영원의 찰나.
저 스스로 나타난 신성한 태양의 따스한 온기가 주변을 감싼다.
몸을 잃고 축복이 사라지니, 판단력도 앵무새가 된 것이냐?
“이런 식으로 개입하지 않는 게 우리 사이의 계약 아니었습니까?”
계약을 지켜주랴?
“세상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도와주시죠.”
답이 네 손에 있는데도 무너지다니…
축복을 잃었다고는 하나, 올빼미를 섬기는 것치고는 지혜롭지 못하다.
답이 내 손에 있다고?
이 말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이윽고 들려온 이야기.
가장 오래된 목소리만 엘디스트를 막을 수 있다.
— 화르르…!
불꽃이 타오른다.
곧, 신성한 태양 속에 잠들어 있던 태고의 영혼이 희미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에밀리오?”
태고 문명의 후예, 달의 왕자.
호텔 바깥, 현실의 달을 무너트릴 때 흡수했던 에밀리오의 영혼.
공포에 질린 채 비명 지르던 에밀리오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두려워 말라.”
“아, 아, 아…!”
“이제 곧,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리라.”
지금의 에밀리오에겐 감정은커녕, 정상적인 지능도 느껴지지 않았다.
에밀리오의 망령이 혼몽한 눈으로 말했다.
“… 물러서라.”
목소리에는 아무 힘이 없다.
눈앞의 에밀리오는 마도서에 의해 빛을 잃고, 태양에 담긴 영혼 1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미 자아도, 기억도 흐릿해진 망령이나 다름없는 존재.
하지만, 에밀리오의 목소리에는 힘은 없되, 권리가 있었다.
최초의 문명에서 깨어난 왕족에게만 주어진 권리.
“명령한다. 물러서라. 너는 이 선을 넘을 수 없다.”
이 순간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정원사의 수장이 말한 ‘가장 오래된 목소리’가 무엇인지!
— 덜컹!
열차 소리를 들었다.
엘디스트의 악의가 장막 너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덜컹!
에밀리오의 영혼이 점차 희미해졌다.
조금 전의 목소리가 에밀리오의 영혼에 남은 마지막 힘이었던 걸까?
이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은 씁쓸함과 다행스러움이었다.
복수를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을 살해한 에밀리오였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대가를 치르고 안식을 얻는 게 아닐까.
이 방법은 더 이상 쓸 수 없느니라.
신성한 태양이 소모한 영혼은 저주의 방을 나가도 회복할 수 없다.
따라서 ‘저’ 에밀리오의 영혼을 사용해 탈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라.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다음 방을 가라.
“… 아버지.”
누군가의 웃음을 들었다.
하하! 도와줬는데 너무 심한 욕을 하는 것 아니냐?
— 쿠궁!
이것이 1회차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상대가 너를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었던 이유를 고민하라. 이미 있었던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