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886)
괴담 호텔 탈출기 886화(885/886)
886화 – 304호, 저주의 방 – ‘파우스트’ (1)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33일 차
현재 위치 : 304호, 저주의 방 – ‘파우스트’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304호의 제목이 ‘파우스트’임을 동료들에게 알린 후, 잠시 침묵을 지켰다.
“…”
‘파우스트’가 대체 뭐지?
아예 뜻을 알 수 없는 단어가 튀어나왔네.
앞서의 방 제목을 생각해 보자.
종의 기원, 멋진 신세계, 타임머신 – 최소한 한국어 내지는 영어 단어다.
반면, ‘파우스트’는 한국어는 물론 영어 단어도 아닌 것 같았다.
다행히 단어 뜻을 아는 동료들이 있었다.
“파우스트, 독일어로 주먹이라는 뜻일 거야. 아마도.”
“은솔 양 말이 맞습니다.”
은솔 누나와 상현 형은 독일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주먹이라는 뜻을 알아도 문제였다.
“그러니까, 방 제목이 ‘주먹’인 건가요? 의미를 잘 모르겠는데.”
상현 형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군요. 파우스트라는 단어 뜻은 주먹이 맞습니다.”
곧 304호가 시작할 텐데, 방 제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황.
여러 사람의 표정이 슬쩍 굳으려는 차, 아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오래전에 유명했던 책일 거야. 아마도.”
“오래전에 유명했던 책?”
“정확히는 모르겠어. 과학 이론 등과 달리, 창작물은 관리국이 매번 보존하진 않아서.”
종말과 재시작을 반복하는 세상.
관리국은 인류가 쌓아 올린 위업을 다음 세상에 전달하는 역할 또한 담당한다.
허나, 관리국이 보존할 수 있는 지식의 양에는 한계가 있는 법.
과학 이론 등이 최우선 보존 대상이라고 들었다.
문명을 재건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
반면, 단순 예술 작품이나 창작물의 우선순위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여기까지 이해한 은솔 누나가 입을 열었다.
“오래전의 루프에서 엄청나게 유명한 창작물이었다는 말이지?”
단순 창작물인데도 지금까지 아리가 제목을 어렴풋이 기억한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창작물인데도 몇 번 정도는 보존 대상에 들어갔다는 소리다.
즉, 파우스트는 당대에 엄청나게 유명했던 작품이다.
“아마도.”
“내용 기억나?”
“미안. 전혀 모르겠네.”
“알아낼 방법이 있으려나…”
“지하에 도서관이 있지 않아? 상현이가 쉴 때마다 거기서 시간을 보내던데.”
“상현 씨, 도서관에서 파우스트라는 책 본 적 있어요?”
“본 적은 없습니다만, 뒤지면 있을 것 같군요. 책을 검색하기 위한 컴퓨터도 있으니.”
도서관에 ‘파우스트’가 있을 것 같다는 의견.
그럴듯하지만, 당장은 의미 없는 이야기다.
이미 304호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탈출 전엔 도서관에 갈 방법이 없다.
이쯤에서 진철 형이 손을 들었다.
“3층 공략, 어느 정도는 틀이 짜였습니다. 첫 시도는 나랑 엘레나 두 사람만 들어가지요?”
“그렇지.”
“그러면 누님, 내용 알아내는 건 저랑 엘레나가 들어간 후에 하시죠.”
아리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엘레나는 책 내용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맞아.”
“일리 있네. 그러면, 두 사람은 바로 들어가자.”
3층 해결의 핵심은 ‘최초의 소원’을 자각하는 것.
과도한 지식과 경험은 소원의 지식을 방해할 수 있으니,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
현실적으로 당장 책 내용을 알아낼 방법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여기까지 듣고 있던 엘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었다.
“시작하겠습니다.”
곧, 신비로운 빛무리가 진철 형과 엘레나의 몸을 감쌌다.
…
관측소에 도착한 후, 아리가 기억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슨, 악마가 나왔던 것 같은데.”
악마?
*
— 엘레나
.
..
…
— 파아앗!
내 아버지, 미하일 이바노프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굉장히 잘하셨다고 한다.
이바노보주 전체에서 순위를 매겨도 한 자릿수일 때가 비일비재했으니, 어려서부터 집안의 자랑 소리를 들으셨다.
어머니, 마리벨카는 섬세하면서도 상냥한 분이셨는데, 소싯적엔 미인으로 그렇게 유명하셨단다.
10대 시절에는 ‘모두의 첫사랑’ 소리도 들었다는데, 그 ‘모두’에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도 있었다는 게 또 재미있는 부분이겠지.
어른들이 자랑스레 늘어놓는 무용담은 절반도 믿기 힘들다지만, 내 부모님의 과거사는 나름대로 증거가 있는 편이다.
예컨대, 아버님은 한때 MFA(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the Russian Federation)의 고위직까지 오르셨다.
학업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이런 직책에 오를 수는 없는 법이겠지.
어머님의 미모에 대한 증거는 더욱 찾기 쉬웠다.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거울에 비춘 나와 언니의 모습 자체가 증거였기 때문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 아닐까?
어려서부터 수재 소리를 듣던 청년과 모두의 첫사랑 소리를 듣던 아가씨.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건 실로 운명적인 만남이었으리라.
…
행복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후의 이야기는 글쎄,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아.
이 정도만 이야기하면 될 것 같다.
사람의 인생이란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 때의 충격이 큰 법이라고.
한때 지적이면서도 강직하셨다는 아버님은, 신경 쇠약증에 걸린 분으로 변하셨다.
한때 모두의 첫사랑이셨다는 어머님은, 핏기 하나 없이 깡마른 몸에 히스테리컬한 분으로 변하셨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면서도 약간은 미워했던 것 같다.
아빠, 엄마 때문에 모두가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변명하자면, 조국의 타락을 외부에 알리려 했던 아버님의 신념을 어린 소녀가 이해하긴 어려웠다.
또, 항상 쇠약하고 히스테리컬한 모습만 보이는 부모님은 정서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아니기도 했고.
다행히도, 나에게는 또 다른 가족이 있었다.
나탈리아 이바노바 – 소중한 언니 말이다.
…
언제부터였을까?
어머니는 항상 나와 나탈리아에게 텔레비전을 멀리할 것을 당부했다.
어머니의 주장에 따르면, 텔레비전 내지는 스크린 너머의 사람들이 우리를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언니도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랜 망명 생활로 인해 친구 하나 없는 삭막한 삶.
즐거움이라곤 찾을 수 없으니, 영상매체 속의 꿈과 환상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또, 가족 중 어머니를 제외하면 스크린 너머의 등장인물이 우리를 감시하는 경험 따윈 해본 적 없었다.
나와 나탈리아는 물론이고, 아버지도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모종의 정신병에 걸린 것 같다고 하셨지.
…
창문 틈새로 살갗이 파일 듯한 냉기가 스며들던 겨울날의 일.
그날, 나는 어머니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알았다.
스크린 너머에는 사람이 있었다.
나를 보고, 나를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텔레비전을 끄려는 순간,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마음속 생각을 말해보겠니?”
기이하게도, 당시의 나는 넋 나간 것처럼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어쩌면, 상대의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에 홀렸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정의가 없음을 한탄했다.
아버님은 조국의 타락을 외부에 알리셨다고, 오직 양심에 따라 정의롭게 행동하셨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세상은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고통을 돌려주냐고.
불의한 자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한 손에 쥔 채 승리한다.
정의로운 자는 고통과 두려움의 업을 진 채 패배한다.
세상에는 정의가 없었다.
한탄이 끝날 무렵, 스크린 너머의 존재가 빙그레 웃었다.
그 혹은 그녀는 내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면 엘레나, 가엾은 아이야. 나와 내기할 생각 있니?”
*
— 차진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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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아앗!
어느 여름날의 기억.
어떻게 취직은 해야겠다 싶어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다가 깨달았다.
나이는 서른 살, 신입으로는 슬슬 늦은 나이.
학벌은 농담으로도 명문대라 말하긴 어렵다.
가장 심각한 건 스펙인데, 개나 소나 한 줄 적는다는 토익 점수나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조차 없었다.
스펙 저질 취준생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나처럼 순수하게 무스펙인 사람은 인터넷에도 드물지 않을까?
“…”
진짜 큰일인데?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내가 기업 인사 담당이면, 나 같은 사람을 뽑을까?
씨발, 당연히 안 뽑지!
뉴스만 켰다 하면 청년실업이 사회 문제라는 시대다.
그럴듯한 회사는 신입 뽑을 때마다 경쟁률 1:100이 기본인 시대라고!
대학 이름 들으면 캬 소리 나오는 사람들도 취직 못 해서 비명 지르는데, 순수 무스펙 서른 살이 뽑히겠냐?
“와… 씨발.”
그렇다고 내가 이 나이까지 놀았냐? 하면 그건 아니야.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한다.
진짜 열심히 운동하고 신체 단련했거든.
문제는, 사실상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는 점이다.
“…”
딱히 내 삶을 망치려는 사악한 악마의 저주나 누군가의 계략이 있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순수 노 재능 이슈였다고 봐야지.
어느 도장에 가도 몸은 좋다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을 뿐.
애초에, 어느 운동이든 프로의 영역쯤 가면 몸은 다 좋아.
이름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축구팀 2군 멤버도 몸만 보면 다 그럴듯하다니까?
그래봐야 골을 못 넣으니 후보다.
그래봐야 수 싸움을 못 하니 만년 스파링 멤버 신세다.
이런걸 누굴 탓하겠나.
태어날 때 유전자가 부족했던 걸 탓해야지.
— 위이잉!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그새 관장님이 문자 메시지를 보낸 상태였다.
주변에 이제 슬슬 일자리를 구해야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건너 건너 관장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메시지 내용은 예상대로였다.
— 진철이 이놈아!일이 필요하면 나한테 먼저 연락했어야지.
—
한남동 BH 센터 알지? 그쪽에서 트레이너 구하고 있다더라.
— 그쪽 사장이 내 동기거든. 자리 하나 구할 수 있을 테니, 걱정 말거라. 참, 어머님은 잘 계시지?
날 생각하는 마음은 정말 고마웠다.
어찌 보면, 그동안 운동하며 남은 게 이런 인맥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하지만, 싫었다. 끔찍했다.
차라리 아예 다른 일이면 좀 낫지, 어설프게 운동 판에 남아있는 상황 자체가 괴로웠다.
이 상황을 상상만 해도 주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정도였다.
‘진철이 저거, 요새는 대회 출전 안 하나?’
‘아이고, 쟤도 벌써 서른입니다. 무슨 대회를 더 나가겠어요?’
‘하긴 뭐, 이젠 접고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됐지. 아으… 몸이 아깝다.’
‘그래도 진철이가 사람은 착해요.’
‘맞아 맞아. 진철이가 사람은 좋아.’
씨발, 내가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했나?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어지네!
“후우…”
이렇듯, 한숨만 푹푹 쉬며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는 시점.
— 끼익!
방문을 열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엇! 자기소개서 지금 쓰고 있습니다. 곧 끝나요.”
어머니, 진짜 곧 끝납니다. 적을 게 없거든요.
마음속으로 어머니께 사죄드리려는 시점.
“아이야.”
어머니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나와 내기 하나 하지 않겠니?”
기이하게도, 어머니의 눈동자에는 보라색 빛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