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n if the world's ended, I still want to eat rice RAW novel - Chapter 251
251화
정소윤.
그녀는 이제 막 앳된 티를 벗어낸 스물네 살이었다.
소윤은 작년에 취직에 성공했다.
사기업은 아니고, 외교무역부(구 외교부)의 무역통상 부서에 자리를 얻었다.
지금의 공공기관엔 연공서열과 성과제를 혼합하여 도입했기 때문에, 소윤은 약 1년 만에 이른 진급을 할 수 있었다.
나름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배워 온 외국어나 세계 문화 이해가 도움이 됐다.
“에휴우…… 힘들어.”
현재 시각은 오후 10시.
오늘 그녀는 늦게까지 남아 남은 업무를 처리했다.
갑작스럽게 미국에 이상기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농수산물은 기후에 상당히 민감했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오늘부터 서울 집에서 지낸다고 했나…….’
주차장에 세워 둔 자동차에 올라 탄 소윤이 운전석에 몸을 뉘었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서울의 한 주택으로 설정하자, 귓속에서 약간의 잡음이 들려왔다.
‘……언니네?’
그녀의 언니, 하윤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어, 언니.”
[소윤아, 아직도 일 해?]“나 이제 퇴근.”
[집에 좀 일찍일찍 들어오라니까, 밖이 얼마나 위험…….]“아아, 또 잔소리.”
소윤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면서도 그 걱정이 싫지 않아 피식 웃고 말았다.
[에휴, 얼마나 걸리는데?]“이제 차 탔어. 여의도로 가면 되지?”
[응, 빨리 와. 아직 우리 밥 안 먹고 기다리고 있어.]“밥을 여태 왜 안 먹었어?”
[너 곧 생일이잖아. 근데 그때 오빠가 미국으로 출장 간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지.]“아…… 맞다.”
[너희 형부 배고파 죽겠단다, 아주.]“아저씨가 또 배고픈 건 못 참지. 알겠어, 금방 갈게.”
차가 주차장을 빠져 나가자, 바깥은 어두운 길목과 밝은 번화가가 확연히 구분되었다.
인구가 워낙 적어 모든 길거리가 북적거릴 수는 없었다.
보통 회사가 몰려 있는 곳이나 주택가 등지가 번화가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가는 길에 술이라도 한 병 사갈까.’
괴물 사태가 공식적으로 종료된 지 약 10년.
이제는 나름 경제 체제도 자리를 잡았다.
무려 돈이라는 개념이 다시 부활한 것이다.
약 10년 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쳐, 과거의 경제 체제를 수정한 지금의 경제 체제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적응했다.
노동의 신성함이 빛을 바래지 않았고, 극빈층이 쉬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걸 보면 아저씨가 진짜 대단하긴 해.’
소윤은 자동차가 자율 주행을 하는 동안 잠시 눈을 붙여 피로를 풀었다.
그리고 여의도의 집에 들어가기 전, 무인 편의점에서 술 몇 병을 사 집으로 들어갔다.
“언니, 나야.”
띵동 초인종이 울리고, 굳게 닫혔던 대문이 열렸다.
마당 가장자리엔 커다란 화분과 텃밭이 자리했다.
가만히 냄새를 맡자니 허브가 분명했다.
이는 분명 성찬의 취향이 강력하게 반영된 것이리라.
“왔어?”
“응, 너무 피곤하다.”
마당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가자, 포근한 방향제 냄새가 소윤의 콧등을 간지럽혔다.
“우엑……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게 뭐야?”
“뭘, 이사한 기념이지.”
거실 정면엔 소윤의 언니와 성찬의 결혼사진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아무리 제 언니가 주변에서 예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유일한 피붙이인 소윤으로선 영 어색해서 가만 볼 수가 없었다.
“와…… 집 좋다.”
하윤과 성찬의 집은 대리석과 목재가 꽤나 잘 조화되어 세련되면서도 고풍스러움이 공존했다.
인테리어에 상당히 신경을 쓴 느낌이었다.
천장의 높이도 높아 답답하지 않았고 인테리어의 색깔 통일감이 안정적이었다.
“소윤이, 왔어?”
소윤이 커다란 창문 밖으로 한강이 보이는 거실을 쭉 둘러보고 있자, 한창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성찬이 걸어 나왔다.
“아저씨…… 집이 뭐 이렇게 예뻐요? 누구 감각이야, 이게?”
“당연히 나지.”
“그치? 우리 언니가 이런 미적 감각을 가질…….”
“빨리 손부터 씻어, 얼른.”
“으응.”
하윤의 저지에 대충 손과 발을 씻고 나온 소윤이 주위를 다시 두리번거렸다.
“애들은?”
“너 기다린다고 울고불고하다가 지쳐서 자.”
“어이구, 우리 귀염둥이들이나 보러 갈까…….”
“겨우 재웠는데 또 깨우게?”
“에헤헤, 알겠어.”
오늘의 저녁은 미역국과 소고기, 양고기 구이였다.
소윤의 생일이라고 성찬이 특히 신경을 썼다.
주방 탁자에 앉은 소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요……? 상다리 부러지겠다.”
“이렇게 좋은 고기 가져다 놓고 못 먹고 있다고 오빠가 얼마나 안달복달했는데.”
“됐다, 빨리 먹자. 소윤이는 천천히 먹고.”
“제가 옛날이랑 똑같은 줄 알아요?”
성찬의 고기 굽는 스킬은 약 10년이 지나도 변하지를 않았다.
밑반찬 몇 개와 미역국과 밥을 먹고 있다 보니, 어느새 테이블 정중앙 불판에서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구워졌다.
“이게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도축한 건데…….”
그렇게 한창 성찬이 소고기에 대한 칭찬을 좔좔 늘어놓던 도중, 별안간 짧은 알림이 들려왔다.
“왜 그래요?”
“뭐에요?”
“하아…… 밥 먹을 땐 연락하지 말라니까, 진짜.”
먹고 있으라며 짧게 손짓한 성찬이 거실로 나가 연락을 받았다.
“예, 예. 아니, 그건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할 테니까 서면으로 보내놓기만 하고……, 예.”
소윤은 입에서 오물오물 고기를 씹으며 하윤에게 눈치를 보냈지만, 하윤 역시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라고 그러세요, 예.”
짧게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성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국 쪽 사람한테 연락이 계속 오더래. 다음부터 밥 먹을 땐 그냥 없다고 해야지, 이거.”
“푸흐흐.”
“내가 얼굴 비추기만 하면 굽실거리는 게 얼마나 보기 싫은지 알아?”
몇 마디 불만을 더 늘어놓던 성찬은 에잇─ 하는 소리와 함께 술병 하나를 꺼냈다.
“우리 소윤이 생일인데 화만 낼 수는 없고. 이거 12년산 위스키거든? 올해 막 나온 거래, 미국에서.”
소윤이 어릴 때부터 위스키, 위스키 노래를 부르더니 드디어 그 꿈을 이뤄낸 듯싶었다.
“에이…… 난 소주 사왔는데.”
“그거도 마시지, 뭐. 언니 간수 잘 하고.”
“내가 물건이에요?”
“취하면, 좀…….”
“정소윤!”
자매인데도 불구하고, 하윤보단 소윤이 훨씬 술이 셌다.
덕분에 언니가 취했을 땐 소윤이 매번 챙겨줘야 했지만 말이다.
소윤은 한참을 웃고 떠들며 조금 이른 생일상을 즐겼다.
야근을 하며 받은 스트레스는 금방 날아가고 없었다.
역시 집이 편하긴 편했다.
“찬호 아저씨 어제 병원 간 거 알아?”
“찬호 아저씨가 병원에요? 병원엔 왜?”
“산에서 뱀이랑 3대1로 싸웠다는 거 아니야.”
“……?”
“내가 잘못……, 뭐, 뭐라구요?”
“진짜로. 결국 이기긴 했는데 한방 물려서 병원 가셨대.”
“아이고야…….”
하윤이 이마를 탁 짚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소윤은 찬호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꽤나 호쾌한 사람이라는 인상은 남아 있었다.
그 나이에 뱀과 전투를 벌일 정도였으니,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맞다, 오빠. 세희 언니 결혼한대.”
“결호온?”
“응, 미국인이랑.”
“허어…….”
“세희 언니가?”
“응, 되게 잘생겼던데.”
하윤이 핸드폰을 꺼내 세희와 한 남자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지금 세희 씨가 미국에 있나?”
“응, 그럴 걸요?”
“가서 한 번 봐야겠네. 세희 씨 데려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응?”
“뭐야, 그게. 아저씨가 세희 언니 아빠에요?”
“오빠…… 옛날에 세희 씨 좋아했지, 솔직히?”
“뭔 소리야, 얘는 또.”
“또 시작이네.”
소윤이 느끼기에 자신의 언니는 집착이 조금 심하다.
비단 소윤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럴 것이다.
“야, 소윤아, 너희 언니 좀 말려라.”
“아, 솔직히이~.”
“나도 이젠 지쳤어요…….”
어쩌다가 이야기 주제가 옛날 얘기로 흘러갔다.
소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리 공감이 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또, 또, 맨날 만나면 옛날 얘기.”
“야…… 정소윤, 너 그렇게 잊어버리기 있어? 내가 너 먹여주고, 재워주고…….”
“그만, 그만!”
좋아하는 사람은 있냐는 둥, 종종 부끄러운 주제가 나오긴 했지만 소윤은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어릴 적엔, 그러니까 한창 꼬박꼬박 일기를 쓰고 다닐 적엔, 항상 누군가의 보호 아래 숨어 다니는 게 일상이었으니 말이다.
불안할 것 하나 없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아아, 배부르다…….”
“너희 언니는 벌써 졸리신 것 같다.”
“언니, 들어가서 자라니까.”
“또 우는 거 아니야?”
“그러면 나도 울 거예요.”
“나도 울지, 뭐?”
“이러다가 애들 다 깨겠다…… 영차.”
베시시 웃은 소윤이 하윤을 부축해 안방으로 들여보냈다.
주방에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벌써 뒷정리를 시작한 듯싶었다.
“어어, 아저씨, 내가 할게요! 준비까지 다 하게 해놓고 미안하게.”
“야근하고 온 사람한테 뒷정리까지 시키라고?”
“에이…… 아저씬 곧 출장 가잖아요.”
“같이 하자, 그러면.”
식탁에 묻은 기름기를 지우고, 열심히 접시를 닦는 성찬의 모습이 상당히 듬직해 보였다.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았는데, 결혼을 해서 그런가?’
이런 사람이 10년이 넘도록 집안에 틀어박혀 컴퓨터만 두들겼던 히키코모리였다니.
소윤으로선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저씨.”
“응? 소윤이 왜.”
“……아무 것도 아니에요.”
“싱겁긴.”
“그냥 고맙다구요.”
우물쭈물거리던 소윤이 부끄럽다는 듯 말을 내뱉자, 성찬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아…… 물 엄청 묻었네!”
“어차피 씻을 거면서.”
“그건 그러네요, 헤헤.”
***
다음날 아침.
소윤은 우당탕 거실에서 울리는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간은 오전 10시.
“큰일났…… 지 않네.”
지각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났는데, 생각해 보니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언니이…….”
“깼어? 와서 밥 먹어. 오빠가 북엇국 끓여놓고 나갔다.”
“진짜? 센스쟁이네……. 아저씨는?”
“새벽에 나갔어. 나는 배웅하고 들어와서 다시 잤지.”
소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요즘엔 미국 서부까진 2시간이면 갈 수 있다.
“태이랑 수민이는 아침부터 저렇게 팔팔해, 언니 닮았나 봐.”
“나도 이제 놀아주기가 지쳐.”
늦은 아침을 적당히 해결한 뒤, 하윤과 소윤은 아이들과 함께 산책에 나섰다.
위치는 조금 멀리 떨어진 강화도 북쪽, 과거의 북한 영토였다.
산책을 가기엔 먼 거리지만, 지금은 이동 수단이 워낙 발달해 거리는 상관없었다.
“오랜만이네, 여기.”
이곳엔 국가적인 사업으로 거대한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 공원이 특이한 점은, 가운데 자그마한 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묘지의 이름은 ‘제2현충원’.
괴물과 싸우며 전사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추모지였다.
현충원엔 전사자들의 이름이 적힌 묘비가 즐비했고, 그 가운데엔 퀸의 목숨을 앗아간 키네틱 스트라이크가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언니는 이거 보면 되게 뿌듯하겠다.”
“응?”
“언니가 죽였잖아, 퀸.”
“으, 으흠. 뭐…… 그렇지?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진 뒤, 소윤은 그 주위를 죽 둘러봤다.
아직 바람이 차가웠지만, 그래도 공기가 꽤나 상쾌했다.
소윤은 어렴풋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지키며 괴물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 앳된 시절의 언니의 모습이라든지.
열심히 모니터를 바라보며 사람들을 지휘하는 성찬이라든지.
아니라면 궂은 전장에도 마다 않고 괴물을 향해 달려들던 많은 사람들이라든지.
매번 소윤은 괴물이 나타났을 때마다 지하방이나 안방에 틀어박혀 있어,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자니 그렇게 나쁜 기억만도 아닌 것 같았다.
“……고생했네, 언니도.”
“갑자기 왜 그래? 오글거리게.”
“그냥, 여기 오니까 옛날 생각나서.”
“……고생은 네가 더 했지.”
현충원 밖, 하윤과 성찬의 아들딸들은 나비를 쫓아가며 마구 뛰어 놀고 있었다.
“귀염둥이들! 안 다치게 조심해서 놀아!”
소윤은 아이들에게 힘껏 소리친 뒤, 다시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즐겼다.
“언니.”
“으응?”
“언니는 아저씨가 왜 좋아?”
“갑자기 또 그런다.”
하윤이 아이처럼 꺄르르 웃으며 소윤의 팔을 툭툭 두들기던 그때.
성찬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어, 오빠.”
[야……하윤아, 대박. 나 내일 저녁엔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거든? 근데 내일 LA에 한 번 들르라는 거야, 거기서 수제 버거 레시피를 알려준다고…….]별 내용은 아니었다.
그냥 새로운 레시피를 알아 갈 수 있겠다면서, 매우 흥분한 채로 재료를 준비해 놓으라는 말이었다.
[소윤이 어디 나가지 말고 있으라고 해. 응? 진짜 맛있을 것 같아.]“어휴, 알겠네요. 다치지 말고 조심히나 오셔요.”
[응, 다시 연락할게!]성찬의 힘찬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진짜…….”
“똑같네, 사람이.”
하윤과 소윤은 서로를 바라보며 허탈하다는 듯 짧게 웃음을 내뱉었다.
“이래서 좋아, 이래서.”
방금 건넸던 소윤의 질문에, 하윤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