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102)
신인인데 천만배우 102화
후보
제일 먼저 입을 뗀 것은 보라.
“오늘은 셋뿐이네요.”
며칠 밤샌 것처럼 축 처진 목소리.
그녀는 퀭한 눈을 살짝 돌리며 기억을 끄집어냈다. 서늘하면서도 축축한 말투가 일품이었다.
딱 한 마디뿐이었는데도, 적막한 밤의 풍경이 펼쳐지는 그런 음성.
“어쩔 수 없죠. 저번에 그렇게 사달 난 채로 마무리됐으니.”
그리고 이어 치는 태석의 대사.
오호라. 상당히 매끄러웠다. 사투리가 드문드문 묻어 있었지만, 확실히 감독의 말처럼 캐릭터가 더 사는 느낌.
보라가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두 남자를 훑었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넘어가면 그대로 끝이에요.”
“하지만 그렇잖아요? 그 사람들 이름 말고 아는 게 뭐 있어요? 주소? 전화번호?”
“모르긴 왜 몰라!”
보라가 앙칼지게 맞받아쳤다.
짜증이 듬뿍 담긴 목소리에서는 신경쇠약까지 느껴질 정도다.
언제 저렇게 성장했을까. 무영은 살짝 감탄하며 그녀의 연기를 지켜봤다.
“수영 언니 남편은 과일 싫어하는 주제에 과일 팔다 사고로 죽었잖아요. 주소랑 전화번호처럼 남들 다 아는 거 말고, 우리만 아는 수영 언니가 있는데. 왜 모른 척해요?”
“옹석 할배는?”
“옹석이는 X발 개변태 새끼고!”
“하, 하하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왜 그렇게 웃어요?”
“내가 저번에 봤거든. 둘이.”
둘 사이에서 언쟁인 듯 언쟁 아닌 대화가 오고 갔다. 점점 과열되는 분위기에 맞춰 높아지는 목소리. 말로 치고받는 게 뭔지 알 것 같다.
대사로 찌르고, 할퀴고, 쥐어짜는 싸움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집중한 태석과 보라의 기운에 눌려 감독이 슬그머니 어깨를 움츠렸다.
“그만하라고오오-!”
꼿꼿하게 서 있는 허리로 어떻게 저런 절규를 지르는지, 대단하다. 제작사 사장은 다시금 보라의 프로필을 뒤적거렸다.
‘그냥 반반한 배우인 줄 알았는데, 실수했네.’
아주 어릴 때 짤막한 드라마 단막극 경험이 있고, 긴 공백기 끝에 [카페에 오세요> 출연. 그것도 여러 외부적인 사정으로 논란 끝에 조기 종영이었지?
그저 그런 수많은 배우 중 하나일 거라, 그렇게 속단했었다. 오만하게도.
“너는! 너는 왜 그렇게 보고만 있어?”
콰앙!
보라가 책상을 가볍게 내려치며 무영을 쳐다봤다.
동시에 태석과 감독, 매니저, 사장의 시선 역시 더해져 그에게 쏟아진다.
둘의 언쟁을 묵묵히 보던 무영이 눈을 깜빡였다. 아주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듯.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지금 이러고 있잖아!”
“······미안하네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톤이다.
무미건조하게 바짝 말라서 갈라지는 목소리.
세상만사 수백 년 동안 밤을 새워온 초월자의 피로가 듬뿍 묻어 있었다.
아아- 하고 감독이 절로 탄성을 내질렀다.
‘저거거든!’
자신이 보고 싶어 했던 하무영의 뱀파이어.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그 모습이 현실에 완벽히 나타났다. 그렸던 그 모습 그대로, 아주 알맞게 딱 떨어지니. 이보다 더 좋은 적임자가 있겠는가.
“너-”
무영은 보라의 말을 자연스럽게 끊으며 끼어들었다.
“근데 저번에 그런 말 했었잖아요. 정말 피곤한데 막상 자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고. 그거, 다 자기방어인 거 알고 있어요?”
“무슨, 무슨 말을······.”
“그날 하루가 너무 만족스럽지 못해서, 이대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심리와 막상 다가올 내일에 기대가 없는 상태인 거죠. 그래서 그 순간을 유지하려는 자기방어라는 걸 어디서 들은 적 있어요.”
차갑게 내려꽂히는 압정 같다.
조곤조곤, 단조로운 말로 사람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찔러대는 뱀파이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요. 서로만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하지만, 당신은 그것마저 거짓이잖아요.”
치부를 찌르는 말에 보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는 세 사람.
낚싯줄처럼 투명하고 얇은 실이 그들 사이를 천천히 옭아매는 것 같았다. 살을 파고들어 심장까지 베어버릴 듯이.
“오케이!”
턱, 하고 눌러진 분위기 속.
제작사 사장이 박수 치며 컷을 내렸다.
그러자 세 사람은 몰입을 풀고 배시시 웃었다. 고개까지 갸웃. 대본이 좋은 탓인지 잘 모르겠으나 정말, 정-말 재미있었다.
“이야. 보라 씨 연기 상당히 잘한다.”
“감사합니다. 잘 받아주셔서 편했어요.”
“우왕. 우리 셋이 티키타카가 좀 되는데요?”
“시너지 좋다야. 좋아.”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 캐미.
빈틈없이 서로에게 녹아드는 합이 아주 좋았다.
태석과 보라와 이미 합을 맞춰본 적 있는 무영은 그렇다 쳐도, 태석과 보라는 정말 뜻밖이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연습같이 해볼걸.”
“앞으로 하면 되죠. 약간 태석이 형이 뭉툭한 느낌이라면 보라가 날카로운 편이거든요. 상쇄하면서 어울림이 좋았어요.”
“그 중간에서 미안하다고 하는 부분-”
“아. 거기 치니까 확 살죠? 저도 하면서 신기하더라고요.”
셋이서 조잘조잘. 연기에 대해 정신없이 떠들어댔다. 영혼의 단짝을 만난 것처럼 주위가 눈에 안 들어오는 모양이다.
“크흠. 저기, 얘들아?”
“앗. 죄송합니다.”
매니저의 주의로 간신히 정신 차리는 세 사람.
제작사 사장은 방긋 웃고 있는데, 배철민 감독은 거의 울 지경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나? 싶을 때.
“······빠, 빨리 작품 찍고 싶네요.”
그가 감탄 어린 소감을 중얼거렸다.
제작사 사장 역시 마찬가지.
“그러게요. 진짜 좋네요. 수준급입니다. 역시 경험이 중요하긴 해요. 그렇죠? 감독님?”
“네네. 다들 화면으로 본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있네요. 제가 잘 담아내야 하는데······.”
“에구. 감독님! 왤케 자신감이 없어요? 봐봐요. 아자아자 파이팅!”
무영이 두 손을 꼭 들어 보이며 그를 응원했다. 배시시 웃던 배철민. 이내 제작사 사장을 돌아봤다.
캐스팅 논의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 온 것이다.
“그럼 하무영 씨는 오늘 계약서 쓰시고, 태석 씨도 빅윈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저희 사정 대강 들으셨겠네요. 그쪽 통해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보라 씨도 같은 곳이었나요?”
“저는 개인이에요.”
“그러세요? 연락처 하나만······.”
연기력도 합격이겠다, 주인공인 무영과 캐미도 좋겠다, 이미지도 딱 들어맞으니. 제작사 입장에서는 고려하고 말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이 아니라면 무명 배우들을 대상으로 오디션 공고라도 내야 할 판이니까.
“무영 씨는 이쪽으로.”
“형. 보라야. 잠시만.”
회의실 안쪽의 또 다른 공간. 무영은 바로 앞에 놓인 계약서를 뒤적거렸다. 계약금은 100만 원. [역병>보다 훨씬 낮은 금액. 이건 거의 명목상으로 기재한 것과 다름없었다.
“말씀 들어보니 계약금보다는 러닝개런티 쪽을 원하신다 들어서요.”
“거마비로 백만 원이면 딱이죠.”
“대신 러닝개런티는 순익의 2.5%로 책정했습니다.”
매출이 아닌 순익.
하지만 보통 1~2%의 비율인 러닝개런티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퍼센트는 정말이지, 무서운 계산법 아닌가. 이런 저예산 영화에서는 제작비 자체도 많이 안 들어갈 테니. 순익이 크게 남을 것이다.
“좋아요. 대신 태석이 형이랑 보라도 잘 챙겨주세요.”
둘 다 역시 돈 보고 하는 게 아니라 시나리오 보고하는 건지라, 계약금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을 거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어느 정도 선에서만 적당히 하겠지.
“여기에 하면 되죠?”
무영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도장을 꺼내 인주를 찍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거리의 햇빛>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박았다.
파앗-!
그 순간 다시 한번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꽃가루들. 여기가 바로 진짜 행운의 길이라며, 쐐기를 박는 것처럼 흩날렸다. 무영은 미소를 지으며 꾸욱- 도장을 찍었다.
“잘 부탁드려요!”
“우리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고맙습니다. 무영 씨. 정말 고마워요.”
“에이. 감독님. 그러지 말고 말 편히 하세요.”
“······믿어준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니, 할게요!”
“하하하. 그것도 존댓말이잖아요!”
성공적으로 계약을 매듭지은 무영. 감독과 제작사 사장, 직원들과 악수하며 좋은 작품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 * *
그리고 얼마 안 가, 벚꽃이 멋들어지게 피는 4월의 어느 날. 태석과 보라 역시 캐스팅되어 계약서를 썼다는 말이 들려왔고-
“4월 안으로 총 캐스팅이랑 리딩 마무리한 다음 촬영 들어가는 게 목표래. 그래서 올해 안에 개봉한다는 생각으로 들어간다는데.”
“캐스팅은 어디까지 됐는데요?”
“거의 80%.”
“오. 좋네요. 누군지 다들 궁금하다.”
“총 리딩 때 볼 수 있을 거야.”
전체적인 스케줄까지 전달되었다.
무영은 고경민의 차를 타고 가평의 한 펜션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MT 날짜와 함께 넵플렉스 오리지널 예능 촬영이 애매하게 겹친 것이다.
“술 많이 먹지 마.”
“에이. MT에서 어떻게 술을 안 먹어요?”
“제-발. 너 연예인인 거 자각하면서 놀아. 알았지?”
“네네. 알겠습니당!”
매니저의 태블릿 PC로 넵플렉스 메인 화면을 훑어보는 무영.
[역병>이 어느새 2차 유통으로 전 세계에 개봉되어 있었다. 현재 한국이 가장 많이 보는 영상 1위에 랭크되어 내려갈 기미가 없어 보인다.“해외 반응은 어떻대요?”
“러시아랑 몇몇 나라 빼고는 거의 1위 먹었을걸? 그러니까 넵플 쪽에서도 홍보 예능 빨리 찍자고 했지.”
“역시 진경문 감독님 대박이네요.”
“반응 보니까 몽네뜨에서는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하더라. 근데 뭐, 그건 제작사 입장이고. 우리로서는 대박 났다고 보면 된다.”
역시 해외에서 더 먹힐 거란 예상대로 그대로 들어맞았다. 해외 스트리밍 수가 압도적으로 높아, 신인이 얼굴 알리는 기회로는 더없이 좋았으니까.
“혹시 저 외국 나가면 사람들이 막 알아볼까요?”
무영이 두근두근, 멋진 일을 상상하며 중얼거렸다. 다른 언어로 생활하는 사람이 자신의 연기를 보고 팬이 된다니! 그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그럴 수도 있는데요. 일단 술부터 작작 드셔야 합니다. 저기 맞지? 네비로는 이쪽 펜션인데?”
“어? 맞아요. 형, 저 여기서 내려주세요.”
버스 대절해서 먼저 도착해 있는 학생들.
무영은 가방을 챙겨 들며 고경민에게 손을 흔들었다. 즐거워도 저렇게 즐거워 보일 수가 없다.
“얘- 들아!”
“어? 하무영이다!”
“무영아. 여기!”
“헐. 진짜네? 진짜 하무영······.”
“대박! 임도하가 우리 선배라니!”
신입생 애들도 왁자지껄. 무영의 등장에 소란을 떨어댔다.
[나는 별, 너는 별>를 제일 많이 시청한 연령대 애들 아닌가. 그 열광하던 임도하가 눈앞에 있으니 뒤집힐 것 같다.“뭐 하고 있었어?”
“우리 고기 구워 먹을 준비. 너도 밥 안 먹었지?”
별거 있는가.
먹고 놀고 마시고! 다시 노는 거지.
무영은 가방을 정리하고 나와 자연스레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주축인 2학년들의 도움으로 신입생들과 인사도 하고, 동기와 안부도 나누고!
“선배. 드라마 진짜 잘 봤어요. 저 지킴이에요.”
“헐. 진짜? 대박대박.”
“싸인해 주시면 안 돼요?”
“당연히 돼! 고기도 더 먹을래?”
그의 등장에 안 그래도 활기차던 MT 분위기가 폭발할 것 같다.
해가 느지막이 지자 하나둘씩 술병을 따고, 무영은 계속 웃어 젖히느라 광대가 마비될 것 같았다.
“어어! 또 걸렸다! 무영 선배!”
“으아. 나? 진짜?”
정신없이 돌고 도는 술잔.
그때. 바람을 쐬던 과대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뭔가를 발견하고 주위 사람들 불러 모았다.
“야. 이것 봐봐.”
“응? 뭔데? 백상 후보?”
5월에 열리는 백상예술대상 날짜와 후보들 정보가 뜬 것이다.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작년 영화와 드라마들 목록이 주르륵 뜨면서, 익숙한 이름이 걸렸다.
“영화랑 TV 드라마 신인상 부문 동시 노미네이트······ 하무영?”
함께 기사를 읽던 친구들이 펜션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 게임에 걸려 엉덩이로 이름을 쓰고 있는 하무영. 저 친구가 백상예술대상 신인상 동시 노미네이트라니.
[역대 신인상 동시 석권 사례가 없어······ 새로운 역사 쓰나?]“말도 안 돼!”
“야, 하무영! 이것 봐봐 임마!”
“엉덩이 좀 그만 놀리고!”
홍당무처럼 오른 얼굴로 활짝 웃는 무영. 무슨 일이냐며 손을 뻗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