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158)
신인인데 천만배우 158화
차은성
화양연화, 이름 참 예쁘네.
무영은 표지에 적힌 제작사명을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옆에 앉은 고경민 역시 살짝 긴장한 자세였다.
“잠시만요. 본부장님이랑 팀장님들 곧 올라오신다 하거든요.”
“네. 감사합니다.”
대본을 받고서 하고싶다 의견을 보낸 지 일주일.
무영은 제작 관계자들과 미팅을 빙자한 오디션을 보기 위해 나온 참이었다.
고경민은 앞에 놓인 물을 꿀떡꿀떡 마시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차은성도 오려나?”
“픽스에요?”
“듣기로는.”
“아하. 그렇구나.”
주연이 두 명인 드라마였다. 중종과 조광조의 역할 비중이 자로 잰 듯 딱 떨어질 만큼, 조금의 기울기도 없이 주인공은 두 명이었다.
“사실 이 역할 다니엘이랑 박한람한테도 갔다는 소문이 있어.”
“잘 어울리셨겠네요. 두 분 다, 이미지가.”
“근데 차은성 한다고 해서 까였대. 성격상 절대 안 맞는다면서.”
오오. 그 정도로?
하기사 이미지로 보면 다니엘은 열혈남아 느낌이고 박한람도 반듯하니 예의를 중시하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이미지만 따진다면 말이다.
“그럼 저야 땡큐죠.”
“……이거 안 된다고 해도 너무 상심하지 마. 우리한테는 좋은 대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무영이가 하고 싶다 하니 우선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혹여나, 아주 혹여나 재수 없이 미끄러진다 해도 개의치 말라는 위로였다.
“네. 괜찮아요.”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대본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벌써 꽃가루를 보게 된 지 햇수로 2년이 넘어갔다. 이제 얼추 이것들이 침묵으로 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다.
‘작품은 대박인데, 같이하는 동료가 구리다는 뜻이겠지?’
스모그까지 끼어 있으니, 단순히 ‘구리다’라는 말로 충족이 될지도 모르겠다. 무영의 머릿속으로 온갖 최악의 사태가 스쳐 지나갔다.
병크 터져서 중간 하차? 아니지, 하차면 다행이게. 대중 이미지 나빠져서 불매 나오려나? 음음. 그것도 아니면…….
끼익.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회의가 길어져서.”
“어머. 처음 뵙겠습니다. 하무영 씨.”
그때, 문이 열리며 드라마 제작 관계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피디와 작가 역시 끼어 있었다. 무영은 잡생각을 재빨리 한쪽으로 밀어 넣으며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무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매니저 고경민입니다.”
“네네. 편하게 앉으세요. 커피 하실래요?”
“저는 직원분이 주셔서 한 잔 마셨어요.”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니 좋다.
무영과 그들은 간단한 일상 얘기를 나누며 본격적인 일 얘기의 물꼬를 텄다.
“대본은 어때요?”
피디가 먼저, 작가와 눈웃음을 나누며 던졌다.
“너무 좋아요. 역할 제안 주셔서 영광일정도예요. 찾아보니까 조광조를 메인으로 한 드라마는 20여 년 전에 딱 한 편이던데요.”
“맞아요. 무영 씨 완전 애기 때겠다.”
“찾아보고 싶었는데 자료가 없더라고요.”
“조광조가 참 매력적인 인물인데,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은 많이 없었어요. 주로 조연이였지. 중종도 주군치고는 업적도 별로 없는 데다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없어서.”
역시 조연으로 많이 나왔을 뿐이다. 인지도가 없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매력적으로 느꼈어요.”
“어떤 점이?”
작가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도 모르고, 무영은 가만히 대본만 내려다봤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전 기본적으로 사람마다 살아온 인생이 모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역사적인 평가는 아쉬울 순 있어도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요. 특히 매력을 끌어올린 건, 작가님의 해석이었어요.”
“제 해석이요?”
“왕좌를 위해서라면 뭐든, 그게 마음을 다 주었던 사람일지라도 한 번에 잘라낼 수 있는 성격.”
권력의 견제를 위해 끌어올렸던 조광조를 제 손으로 단박에 없애 버리는 잔인함.
“신하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연약한 왕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는 의지.”
그 고고한 핏줄이, 바닥 친 왕권 무게에 짓눌려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비극.
“작가님이 중종과 조광조를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아서 좋았어요. 모두 저마다의 이상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니 사실상 그게 맞죠.”
알맞은 단어를 찾자면, 이중인격이 맞으려나?
갈대 같이 흔들리고, 연약한가 싶어도 견제와 균형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이 끝장을 내버리는 잔악함.
작가는 이 부분에 집중해 캐릭터를 살려냈다.
“약간 찌질하면서도 못된 게, 이런 역할 해보고 싶었어요.”
무영의 말이 끝나자, 작가가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렸다. 실로 만족스럽다는 얼굴이다.
“피디님. 제가 말했죠? 우리, 무영 씨랑 아주 잘 맞을 거라고……. 하아. 정확히 읽어내 줘서 너무 좋다. 진짜. 캐릭터 분석 완벽해요. 딱 그거거든요.”
“그리고 대중적인 인물 매력이 떨어질 순 있어도, 격동의 시기인 만큼 사건과 갈등은 확실하죠. 배경에서 오는 작품의 매력 또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니까.”
피가 낭자한 시대였다.
작품 역시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부터 시작해서 기묘사화, 조광조의 죽음으로 끝나니. 그야말로 피로 시작해 피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맞아요. 처음에 중종이랑 조광조로 얘기 쓴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좀 우려가 있었어요. 좋은 왕, 좋은 시대 놔두고 왜 하필 그거냐고. 근데 사화 중에서 기묘사화야말로 리얼 찐 피바람이거든요.”
작가님 역덕이셨구나?
역사 얘기가 나오니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서 좋은 왕, 좋은 시대라 하면 흥행이 보증되고 대중 인식이 좋은 영조, 정조 혹은 세종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영 씨 말이 통하니까 너무 좋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가 봐.”
“어머. 작가님. 하무영 씨 서연대잖아요. 거기 들어가려면 한국사 점수도 잘 나와야 한대요.”
“아 진짜? 서연대를 나와봤어야 알지.”
자연스럽게 대본 이야기에서 무영의 학력으로 주제가 옮겨졌다.
사실 인터넷 찾아보고 온 건데…….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중종이 19살 때 왕위에 올랐거든요. 그리고 기묘사화가 중종 14년에 일어났으니 좀 젊은 배우가 필요했어요. 근데 보니까 너무 애기긴 하다. 무영 씨.”
즉위 시작부터 드라마가 시작되니 그에 맞는 나잇대 배우가 필요한 것이었다. 서른 초반 정도야, 커버 가능하지. 게다가 이건 ‘퓨전사극’ 아닌가.
“연출과 비주얼에 맞게 조금씩 각색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아무튼, 나는 무영 씨 연기도 너무 좋아하고-”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잘 맞을 것 같거든. 어떻게, 스케줄 괜찮아요?”
그들의 말에 무영이 매니저를 힐끔거렸다. 고경민이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한번 조정을 해봐야겠는데요.”
“물론이죠. 물론!”
페이, 출연료 책정을 해봐야 알겠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었다. 이미 서로에게 긍정적인 상태인지라, 어지간하면 조율이 잘 될 것 같았다.
영화 [거리의 햇빛> 초대박으로 몸값이 껑충 뛴 무영이니, 값이 좀 나가겠지만.
“확실히 이번에 제작비가 많이 들겠네.”
피디가 별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한류 열풍이 거세지고 있는 정세에 맞춰 극 중 한복이나 세트 따위에 힘을 빡세게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거물급과 준거물급 배우 페이까지.
“아. 조광조 역은…….”
무영이 말을 흐리며 묻자, 제작진들이 당황했다.
유일하게 걸리는 그것. 바로 동료 배우.
“호, 혹시 차은성 배우 알죠?”
사람 자체 말고, 성격 말이야.
무영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직접 뵌 적은 없어요.”
“그렇구나. 그, 조광조 역은 차은성 씨가 하기로 했거든요. 차은성 씨가 비주얼도 훌륭하고, 연기도 정말 잘하시잖아. 브랜드파워도 있고, 요즘에는 동남아시아랑 일본에서 난리에요.”
찍었다 하면 대박, 나왔다 하면 히트.
흥행보증수표라 불릴 만큼 인지도가 엄청난 탑스타였다. 그만큼 그의 콧대가 기고만장하다는 걸 뜻하기도 했고.
“작가님. 중국은 왜 빼요?”
그때,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좋은 중저음. 무영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자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그가 서 있었다.
“으, 은성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다들 반사적으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무영 역시 마찬가지.
그는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 캐리어를 들어 보였다.
“지나가는 길에, 마침 파트너 미팅이 있다 하길래.”
“어머. 그랬구나.”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제작진이 그에게서 커피를 받아왔다. 차은성은 팔짱을 낀 채로 무영을 내려다봤다. 키가 엄청 커서 그런가, 지금껏 만났던 어느 배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우라가 짙었다.
‘대박이네. 진짜.’
연예인 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다.
그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지자, 무영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하무영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짜, 진짜 팬이에요.”
“…….”
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노골적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며 마뜩찮은 표정만 지을 뿐. 묘하게 날선 침묵에 제작진들이 커피잔을 든 채로 굳었다.
“은성 씨?”
“얘가 중종 한다고?”
“아직 확정은 아닌데-”
“아이, 피디님. 너무하잖아.”
무쌍의 가는 눈이 웃음으로 휘어졌다. 미소만 본다면 더없이 멋지기만 한데…….
“이런 애랑 뭘 하라고요? 대사나 주고받겠어요? 허여멀건 해서 말싸움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중종과 조광조의 대립이 극의 꽃이었다.
멀뚱멀뚱 서 있는 무영을, 그가 대놓고 비웃었다.
“그리고 제발 사극은 경험 있던 사람으로 해달라 부탁했잖아요. 현대극이면 몰라도 사극 말투, 그거 쉽게 안 나와요. 경험치가 좀 쌓여야지. 아시면서?”
“그래도 무영 씨 젊어서 습득이 빠를걸? 연기 센스도 좋고. 여러모로 검증이 됐으니까.”
피디가 무영의 편을 들어주며 대꾸했다.
차은성은 맞은편 의자에 앉더니, 도도하게 발을 꼬았다. 그리고 까딱까닥. 발끝을 움직이며 다시 한번 무영을 훑었다.
“에이. 난 잘 모르겠다. 무영 씨라고 했나?”
“네. 선배님.”
“잘할 수 있겠어요?”
무영 역시 다시 제자리에 앉으며 웃었다. 어정쩡하니 서 있던 고경민도 마찬가지.
차은성 이 사람, 존댓말을 해도 반말처럼 느껴지게 하는 재주가 있네.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걸로는 안 되지. 어디 소꿉장난도 아니고.”
“아. 그럼 잘해내겠습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하는 무영.
제작진이 은근히 놀라며 차은성의 눈치를 봤다.
‘현실에서는 차은성이 선배고 어른이지만, 극 중에서는 반대라…….’
작가는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 간극의 재미를 알아챘다.
“……어우. 깜찍하네.”
말대답 비슷한 뉘앙스인지라, 차은성이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작진이 분위기를 전환시키려 애썼다.
“아하. 아하하하!”
“그렇죠? 우리 무영 씨가 좀 귀여워. 응.”
주위 소음 따위는 둘의 귀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은성의 날카로운 눈빛이 무영에게도 내다 꽂혔고, 무영은 방실방실 웃으면서도 죄다 받아냈다.
파지직-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는 지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