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178)
신인인데 천만배우 178화
혼쭐
누군가 숨 들이쉬는 소리까지 적나라하게 들렸다.
그만큼 주위가 조용해졌으며,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했다. 차은성의 거친 말에 기현호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아 그러니까, 그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
아까보다 훨씬 벌게진 얼굴.
수십 명의 스태프 앞에서 욕설을 들었다는 수치심 때문일까.
아니면 예상 밖을 벗어난 상황에서 오는 당황스러움일까. 가식 떨며 입가를 손으로 가렸을 때보다 더욱 불그죽죽했다.
그럴수록 차은성은 차가운 살기를 쏟아냈다.
“내가 지금 그 오해 풀어준다잖아. 말 돌리지 말고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 하무영이 대본 고치라고 그랬냐고. 두말하게 만들면 진짜 엎어버린다.”
엎어버린다- 라는 말이 스태프들에게 얼마나 두려운 선전포고인지, 기현호는 잘 모르는 듯했다. 제삼자로서 구경하던 스태프들의 분위기가 일순 바뀌었다.
“현호 씨.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맞아. 차, 차은성 씨가 물어보잖아요.”
“이런 일이 또 있으면 안 되니까. 오해든 실수든 풀고 가야지. 무영이가 진짜 대본 수정하라고 그랬어요? 어디를 어떻게?”
“아니. 그냥 둘이 무슨 대화 했는지를 말해봐요.”
“그래. 그거네. 진짜 괜찮으니까 편하게. 응?”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채근했다.
차은성 성질 부리기 전에 빨리 뭐든 대답하라고.
준비했던 대본에는 없는 상황인지, 기현호는 마땅한 대답 대신 눈만 굴려 제 매니저를 찾았다. 그제야 벙 쩌서 당황해하던 매니저가 두 손을 들며 기현호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 현호가 이렇게 대작인 작품은 처음 해봐서 긴장했나 봐요.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좋게 잘 얘기할 테니-”
“나 안 해.”
차은성은 말을 딱 자르며 핀을 빼서 던져버렸다.
그리고 휑하니 나가버리려는 걸, 스태프들이 아연실색하며 붙잡았다. 이전 같으면 붙잡지도 못했겠지만, 지금은 무영이 덕분에 중화된 차은성임을 알고 있으니까.
“은성 씨! 왜 그래애?”
“X발 말이 안 통하잖아. 대답 내놓으라니까 되지도 않는 변명이나 늘어놓고. 기분 X 같아서 촬영 못 해.”
“아이고! 은성아!”
“형!”
그가 옷까지 팽개치려고 할 때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무영이 그를 부르자, 차은성이 멈추며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왜 부르냐는 듯.
무영은 방긋 웃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핀을 주웠다.
“그렇다고 촬영을 안 한다 하면 어떡해요.”
“답답해서 못해먹겠다.”
그리고 그의 손에 다시 쥐어주며 말했다.
“제가 설명할게요. 기현호 씨가 마지막 대사 너무 길다고 혹시 수정하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셨어요. 쪽대본이니까 현장에서 종종 있는 일 아니냐면서. 맞죠?”
무영의 말에 기현호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그래서, 하무영 씨가 하라고 하셔서.”
“앞에 감독님께 말하라는 뜻이 생략되어 있었죠.”
“그, 그 말이 없었으니까-”
“애도 아니고 그걸 꼭 말해야 아나요?”
무영이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내용과 인지 부조화가 올 정도로 청량한 목소리였다. 차은성은 핀을 다시 머리에 야무지게 꽂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게. 빡대가리 새끼도 아니고.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들어서 작품 어떻게 찍어? 응? 대본은 읽을 줄 아냐?”
그 말에 무영이 차은성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형. 그건 너무 원색적인 비난이에요.”
하지만 대꾸하는 차은성의 목소리는 촬영장을 쩌렁
쩌렁하게 울렸다.
“알 게 뭐야, X발! 지가 개떡같이 알아들었으면서 어디서 하무영이 바꾸라 했다고 어거지를 부려? X나 당당하게 미친 새끼네, 저거! 야, 너 사과 안해?”
당당하게 미친 새끼라. 그건 차은성 당신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무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기현호를 살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눈 주위가 붉었다.
“굴러 들어왔으면 얌전히 짜져. 나대지 말고 새끼야. 간사하게 이간질을 하려 하네. 내가 너 같은 놈 한두 번 본 줄 알아?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뒤로 사람 차별하지, 줏대 없지, 연기 X같지.”
“형. 그만, 아이고. 그만.”
“차은성 씨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기현호의 매니저가 듣다못해 대꾸했다. 하지만 그는 어리석었다. 무영이가 그만하라며 불씨를 꺼트리는 와중 기름을 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좀 심한 건 그쪽들이지. 시청률에 숟가락 얹으러 들어왔으면 대가리 박는 게 예의 아닌가? 어딜 자꾸 주연 배우를 긁어대려고 해? X발 다른 방송국에서 보낸 스파이세요?”
“감독님. 촬영 잠시 끊고 가죠.”
“어? 어어. 그러자. 다들 그만해요오, 제발.”
“조연출님. 기현호 씨 데리고 나가주세요.”
보다 못한 무영이 상황을 중재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듣고만 있던 스태프들이 그제야 움직였다. 씩씩대는 매니저와 울기 일보 직전인 기현호.
둘은 스태프들이 이끄는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어우. 시원하다.”
그러든가 말든가. 차은성은 할 말 다 했다는 듯 말끔한 얼굴로 물을 들이켰다. 그 앞에 앉은 무영이 병뚜껑을 든 채 물었다.
“그렇게 답답했어요?”
“뒤지는 줄 알았다. 음험한 새끼. 난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수작질 부릴 거면 좀 안 보이게 하든가. 저게 뭐니, 저게? 쯧.”
그러자 스태프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차은성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대꾸인지, 아니면 평소에 진짜 그렇게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다.
“나도 좀 이상하긴 했어. 자꾸 뭘 퍼주는데 무영이만 계속 쏙 빼먹잖아. 고의든 아니든.”
“위화감 조성 같은 게 있었지?”
“그러니까. 근데 진짜 깜찍하네. 어떻게 카메라 앞에서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대? 무영이가 대본 수정하라 했다고? 와아. 대박.”
“저런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피곤해.”
“편 가르지, 못된 짓만 하지. 어후.”
“은성 씨. 잘하셨어요. 좀 거칠긴 했지만…….”
“[아라연꽃>말이에요. 거기 여주가 서이재였는데 저희 샵 다니거든요. 촬영장에 피곤한 사람 있다더만 그게 기현호 씨 말하는 거였나?”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요. 사실 그때 대기실 전달 진짜 문제없었거든요. 문까지 열어서 확인해줬는데, 나중에 보니까 하무영 씨 대기실에 짐 풀었더라고요.”
말하다 보니, 스태프들도 하나둘씩 기현호의 기행을 은연 중으로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만 정신없이 바쁘고 무영이가 별다른 타격이 없는 것 같아서 넘어갔을 뿐.
“고생 많았죠? 무영 씨.”
하지만 무영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는 것 같아서가 아니라 진짜 타격이 없었으니까.
“괜찮아요. 현장 정리 좀 부탁드려요. 저 오후에 스케줄 있어서 늦으면 곤란하거든요.”
“어머. 근데 오늘 못 찍을 것 같은데…….”
대놓고 린치를 당했는데, 연기를 할 수 있겠는가.
무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력해 봐야죠.”
“야! 어디 가?”
차은성이 자리 뜨려는 무영을 붙잡았다.
그러자 무영은 고갯짓으로 대기실 복도를 가리켰다.
“사과받으러요.”
* * *
“와. 진짜 미친놈이네. 쌩양아치 같다는 말은 들었는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현호야. 괜찮아?”
“……형 같으면 괜찮겠어요?”
기현호는 흐느끼며 눈가를 닦아냈다.
살면서 이런 모멸감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스태프들이 다 있는 곳에서 자신에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최소한의 사람 취급도 안 해주는 것 같았다. 그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탄했다.
“제가 그렇게 잘못했어요? 소통이 좀 안 됐던 거로…….”
“네가 뭘 잘못했어? 아니야! 차은성 그게 미친놈이지! 울지 마.”
“형. 나 일 못 하겠어요…….”
아주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중이었다.
매니저가 계속해서 제 배우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똑똑.
그때,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하무영이 문틈 사이로 눈을 빼꼼 내밀며 물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
기현호와 매니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먼저 적막을 깬 것은 무영이었다.
“괜찮으세요?”
“괜찮게 생겼어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투가 왜 그러세요? 저는 피해자인데.”
매니저가 와다다 쏘아붙이려고 하자, 무영이 불쾌하다는 듯 웃으며 끊었다.
그랬다.
따지고 보면 차은성이 지랄했지, 하무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말리며 상황을 중재해 준 사람 아닌가.
“기현호 씨.”
무영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떼었다.
“저한테 무슨 감정이 있으신지는 알겠어요. 근데 솔직히 별 관심 없었거든요.”
그가 은근히 무영을 따돌리듯 빼먹거나, 차은성에게 잘 보이려 알랑방귀를 뀌거나, 혹은 대본 연습을 방해하거나. 상관없었다.
“기현호 씨를 신경 쓰기에는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실 거로 생각해요. 근데 아까 현장에서는 선을 좀 넘으신 것 같아요. 말이 어 다르고 아 다른데, 어떻게 스태프들 앞에서 저를 그렇게 표현하실 수 있어요?”
이건 드라마에 지장을 주는 문제였다.
각자의 역할이 중요한 현장에서, 배우가 월권을 행사했다는 것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았다.
“저랑 현장 식구들한테 사과하세요.”
무영은 단호히 요구했다.
“그러면 용서해 드릴게요.”
아직 방영은 안 됐지만, 조금 찍어 놓은 분량이 있었다. 어쨌거나 작업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어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다른 스태프를 위해서라도.
“우리 현호도 사과 들을 입장인데요.”
“매니저님. 그건 은성이 형한테 하실 얘기고요. 지금 저는 기현호 씨와 저 사이의 일을 말하는 거예요. 저는 드라마를 책임지는 입장이고, 사과받을 권리가 있어요.”
지금이라도 그가 잘못을 인정한다면, 무영은 그를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기현호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삼켰다.
“저는 정말로 하무영 씨가 대본 고치라는 줄 알았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무영은 말똥말똥 기현호의 얼굴을 쳐다봤다.
뚫어지라 닿던 시선이, 미련 없이 거둬졌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럼.”
“저기! 근데 혹시 제가 불쾌하게 했다면 사과드릴게요.”
마지막 기회가 날아가는 것을 느낀 걸까?
기현호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지만, 무영은 웃기만 했다. 이미 늦었다는 표정이었다. 열린 문으로 차은성의 쭉 찢어진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봐봐. 저런 새끼는 구제불능이라니까.”
아쉽네. 기현호가 사과만 제대로 했어도 차은성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 시청률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드라마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짐 싸고 꺼져.”
“형. 그만하고 가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혀엉. 어서.”
무영은 그의 등을 밀며 기현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콰앙! 깔끔하게 문을 닫으며 나가버렸다.
차은성과 하무영이 대기실에서 나오자, 피디가 후다닥 뛰어가 물었다.
“어, 어떻게 됐어?”
화해했니? 라는 질문.
차은성이 콧방귀로 답을 대신했다.
자신이나 기현호 둘 중 하나는 버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새 배우 알아봐야겄수.”
“와아. 돌겠네.”
그리고 버려야 한다면 당연히 기현호 쪽이지.
“돌게 뭐 있어요. 재촬영 들어가는 비용 저쪽 회사에 청구하세요. 배우가 삽질하는 바람에 현장 분위기 개판 났다고. 방영되기 전이니까 얼마나 다행이에요? 안 그래요?”
추가 편성 이후로 나오는 역할이라 아직 대중들은 그의 출연을 알지 못했다. 진짜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기현호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요? 응?”
“안 돼. 안 바꿔줘. 돌아가.”
차은성이 딱 잘라 거절하며 피디를 지나쳐갔다. 그가 무영에게 애원하는 눈을 반짝였지만, 무영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싫어용.”
“아아아-! 당장 배우를 어디서 구하냐고오-!”
피디가 벽을 붙잡으며 절규했다.
그런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웃는 무영.
“어딘가에 있겠죠. 좋은 배우가.”
“누구?!”
“그건 피디님이 알아보셔야…….”
아. 순간 무영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중종과의 투샷이 대부분이라 자신과 호흡이 좋아야 했다. 그리고 비슷한 나이대.
“같은 기 씨 친구가 있긴 한데. 헉. 혹시 사촌인가?”
“기현호는 가명이에요…….”
“아 그래요? 그 배우는 진짜 기씨예요. 오디션 한번 보실래요? 피디님?”
무영의 말에 피디가 반쯤 울먹이는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누구 말하는 건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