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184)
신인인데 천만배우 184화
진짜 실력
다음 날 방과 후.
유나는 조용히 구석에서 대본을 읽고 있었다.
문화제 전날인지라 왁자지껄 소란스러웠지만, 유나의 주위만큼은 공기가 차가웠다. 의상팀이던 친구 몇몇이 머뭇거리다가 유나에게 다가왔다.
“저기, 유나야. 옷 마지막으로 입어볼래?”
싸구려 드레스.
보급형 옷을 사서 아이들끼리 천과 비즈를 덧댄 디자인이었다. 자율성을 추구한다는 학교의 교육이념에 맞게, 연극 연출을 제외하고 대본, 의상, 소품 모두 학생들의 손에서 준비되었다.
“그래.”
“위에 입어봐도 될 것 같아.”
유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상팀 친구들이 유나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며 머리까지 정돈해 줬다. 현장에서 받는 코디와는 천지 차이지만, 어린이 연극에서 이 정도면 꽤 정성이 있는 손길이다.
“와. 잘 어울린다.”
“내 말이 맞지? 빨간색으로 달기 잘 했어.”
“유나야. 뒤 돌아봐.”
“공주님 같아.”
의상팀 애들이 속닥속닥거리며 즐거워했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화려한 유나였다. 저급이지만 그것 또한 아이답게 잘 소화해 냈다.
그들을 지켜보던 한 아이가 빽 소리쳤다.
반장이자 조연출인 이새임이었다.
“아! 진짜 너무 안 어울린다.”
“어?”
“유유나는 얼굴이 밋밋해서 저런 색 하면 안 된다니까? 비즈 색깔 바꾸자.”
“왜? 잘 어울리는데…….”
“마지막 리허설할 거니까, 그 전에 바꿔. 유유나. 그리고 저번에 말했던 부분 똑바로 해. 배우라는 애가 그게 뭐니? 편집 같은 거 없고 바로 관객한테 보여주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마치 네 연기력은 편집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새임은 돌려 말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도도하게 무시했을 유나였다. 하지만 아이는 의상팀 친구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니. 난 빨간색이 잘 어울려. 그러니까 바꿀 필요 없어. 벌써 이게 두 번째 바꾸는 거잖아. 할 일 많은데 굳이?”
“야! 조연출은 나야!”
“그래서 어쩌라고?”
헉. 오늘따라 유나의 맞받아침이 예사롭지 않았다.
주위가 삽시간에 얼어붙고, 이새임과 유나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이새임은 팔짱을 끼며 아이에게 다가왔다.
“너 진짜 대박이다.”
“…….”
“영화 찍을 때도 이런 식으로 해? 애들끼리 하는 거라고 무시하는 거야? 네 체면 생각해서 주인공 시켜줬으면 적어도 협조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이새임은 모두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참으로 영악한 아이였다. 저와 유유나 간의 싸움이 아니라, 반 전체를 제 편으로 끌고 온 것이다. 반장과 조연출이라는 이름 아래, 이새임은 마음껏 성질을 부려댔다.
“하!”
하지만 상대는 누구신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연예계에서 보낸 유유나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그 유유나.
삼촌뻘 되는 이히준의 머리를 까버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선배 배우들에게 맞서는 그런 아이.
솔직히 이만큼 참은 것도 용할 지경이었다.
그저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쏟아지는 온갖 모멸을 담담히 무시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무영이가 알려줬으니까.
참을 필요 없다고, 바보는 말해줘야 알아듣는다고.
“이새임. 말 똑바로 해. 체면은 내가 너희들 세워주고 있는 거야.”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시원하게 뻗었다.
“한 학기 내내 준비한 연극에 부모님들 다 오실 건데, 주인공이 발연기면 얼마나 창피하니? 내가 올라가는 걸 고맙게 여겨. 난 연기 돈 받고 하는 사람이거든.”
실로 당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흠 잡을 것 없이 완벽한 주장이기도 했다.
뭐라 꼬투리를 잡을까, 고민하는 이새임을 두고 유나는 계속 쏘아붙였다.
“시켜주긴 누가 시켜줘? 담임쌤도 나한테 부탁했어. 근데 네가 뭔데 자꾸 날 그렇게 말해?”
“……지금 싸우자는 거야?”
“어!”
유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단박에 대답했다.
발톱을 숨겼던 고양이가 사정없이 냥냥 펀치를 날리는 것 같다. 답답하다는 듯 옷을 벗어 던진 유나가 소리쳤다.
“말 깐 김에 다 해보자. 너 주인공 하고 싶었는데 내가 해서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게 배역 따고 싶었으면 오디션이라도 보지 그랬어? 자신은 없는데, 욕심만 그득그득해서.”
“마, 말 다했어?”
“아직 멀었다! 가방에 쓰레기 넣어두고 실내화 숨기고 이거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긴장 좀 해야 할 거야! 나 그거 사진 다 찍어 놨거든. 자꾸 건드리면 어른들한테 말해 버리려니까. 유유나가 학교폭력 당했다고 뉴스도 크게 나겠네!”
유나가 있는 힘껏 소리쳤지만, 아무도 막지 못했다.
왜 저러냐면서 키득대던 아이들까지 굳어서 뒷걸음질만 슬금슬금 쳐댔다.
“왜! 아니면 그냥 지금 바로 말해 버릴까? 그래서 내일 연극 엎어지면 참- 좋으시겠어요? 조연출님? 연출도 쌤이 다 해주는데 어디서 잘난 척을…….”
난생처음 들어보는 유유나의 거친 말이었다.
사실상 유나에게는 일상이었으나, 일부러 소란 만들기 싫어서 참고 또 참았던 거다.
“서, 선생님 모셔올까?”
“야아. 그만 싸워. 둘 다 그만해.”
“맞아. 조금만 더 하고 빨리 집 가자.”
“마지막 리허설만 하면 끝인데 왜 그래.”
“다들 좀만 참자? 응?”
학우들이 이새임과 유유나를 떼어냈다.
이새임은 못 이기는 척 발을 굴리며 뒤로 물러섰고, 유나는 씩씩대는 콧김을 숨기지 않았다.
싸우다 보니 속이 시원한 게, 엔돌핀이 도는 것 같다.
이렇게 별거 아닌 거였는데 그간 괜히 참고 살았구나. 유나는 조금 억울해하며 상기된 볼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딱 20분 후에 바로 리허설하자.”
“준비해. 준비.”
드르륵-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마무리를 하려는 아이들. 그때, 문이 열리며 검은 봉지 두 개가 쏙 들어왔다.
“어?”
“하무영이다!”
무영이 방긋 웃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함께 솔솔 풍기는 떡볶이 냄새. 다시금 간식 셔틀을 자처한 그가 유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얘들아.”
“무슨 일이에요? 이거 먹어도 돼요?”
“응. 먹으라고 사 왔는걸? 선생님 말씀 못 들었니?”
“네? 어떤 거요?”
무영은 그들 앞에 간식거리를 풀며 말했다.
“최종 리허설에 참관해달라고 하셔서.”
“아. 진짜요?”
“응. 못 들었구나?”
사실 무영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현직 종사자니까 공연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조언해 주면 어떻겠냐고.
당일 스케줄이 불확실하다는 거짓말을 살짝 섞어 부탁했더니, 담임은 흔쾌히 허락했다.
“20분 뒤에 담임 선생님 오실 거야. 그때까지 이거 먹으면서 마무리 잘하자.”
“감사합니다!”
유나는 심통이 난 얼굴로 무영을 쳐다봤다.
뭘 어떻게 도와줄 거냐는 말에 비밀이라고 해놓고서, 고작 한다는 게 간식 공세냐고요. 쟤들 입에 뭐 들어가는 거 싫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뭐야.”
“뭐야.”
유나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무영. 이내 감탄하듯 박수쳤다.
“뭔데 이렇게 예뻐? 완전 여왕님이네!”
“우엑.”
“에엥. 진짠데. 보자. 이게 대본이구나?”
무영은 자연스레 유나의 앞에 앉아 대본집을 가져왔다. 그리고 한 번 쓱 훑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자는 백설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백설공주, 신데렐라가 사실 한 명이었다? 오호. 재밌겠네. 이것도 친구들이 쓴 거야?”
“응. 작가가 따로 있어.”
가이드라인은 담임이 잡아줬지만, 한 자, 한 자 타이핑하며 친 것은 아이들이었다.
20분짜리 짧은 연극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 담겨있었다.
“요즘 애들 대단하구나. 그럼 유나는 주인공이라 했으니 당연히 백설렐라겠고?”
유나는 무영의 뒤쪽에 시선을 고정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새임 무리가 대놓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명인을 뒤에 세워놓고 인기몰이하려는 수작이라 생각하는 듯싶다.
“백설렐라 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옵니까?”
그때 훅 들어온 무영의 질문.
정확히는 궁중 하인의 대사였다. 연극의 첫 시작을 알리는 말이기도 했다. 유나는 반사적으로 연기를 받아쳤다.
“그냥, 오늘 있을 무도회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걱정되시옵니까? 각 나라의 왕족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니, 하인들이 차질 없이 준비 중이옵니다.”
그러고 보니, 무영과 호흡을 맞췄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더라. 유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역병> 촬영 후에 한 적이 없으니, 실로 오랜만이었다.
“걱정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랍니다. 분명 멋진 왕자님과 공주님들이 오시겠죠? 기대돼서 밤잠을 설쳤을 정도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드레스는 정하셨습니까?”
유나가 무영의 눈을 빤히 올려다봤다.
갑자기 [역병>의 리딩이 생각나면서, 그와 함께했던 추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무영 역시 즐거운지 어서 대사 하라는 식으로 눈썹을 까딱거렸다.
“물론이죠.”
“그런데 오늘 연회에 마녀나라의 대왕마녀도 올까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연기하고 있으니, 바쁘게 움직이던 친구들이 멈춰서 그들을 구경했다.
이상하게, 평소의 유나가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던가?
“아아! 글쎄요. 저는 와줬으면 싶지만, 아무래도 서로의 관계를 생각하면 무리일 것 같네요.”
기계적으로 뱉어내던 대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무도회를 앞둔 공주님의 들뜸이 그대로 느껴졌다. 손짓과 눈짓 하나에도 사랑스러운 기품이 잔뜩 묻어있는 공주님이었다.
애들이 하나둘씩 모여 아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유나 오늘따라 연기 되게 잘한다.”
“진짜. 그 전이랑은 비교도 안 돼.”
그거야 당연하지.
독백 연기가 아닌 이상, 상대역이 굉장히 중요한데 유나가 느끼기에 학우들은 모두 발연기에 가까웠다. 게다가 따돌림에 괴롭힘까지 겹치니 연기할 맛이 나겠냐고.
“어서 무도회의 밤이 열렸으면!”
짜악!
막이 바뀌는 부분은 무영이 박수 한 번으로 끊어서 알려줬다. 그리고 이내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를 흉내 냈다.
“이리 오거라. 우리 백설렐라.”
여왕 역할이었다.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자연스러운 그의 연기에 유나도 덩달아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어마마마!”
“우리 예쁜 아가. 이웃 나라의 필립 왕자님이 드디어 항구에 도착했다 하는구나.”
한계가 없었다. 현장에서 쪽대본으로 단련된 스킬인지, 한 번 스윽 보고서도 유나의 연기가 끊어지지 않게 받쳐줬다.
“독이 든 사과를 먹어라! 백설렐라!”
“안 돼! 싫어! 누가 좀 도와줘요!”
자지러지는 유나의 연기에 친구들이 몸을 굳히며 숨소리를 참았다. 저들끼리 웃음을 참아가며 하던 연극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나는 프로였다.
같은 공간에서 같이 생활한다고 자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무영과 당당히 대사를 주고받는 유나는 제 또래에서 볼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 안타까운 공주님. 이렇게 잠이 들다니. 나 필립이 당신을 위해 아름다운 유리 구두까지 갖고 왔습니다.”
마지막 절정까지 쭉쭉 이어지는 두 사람의 만담에 다들 아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몰입해 정신 차리지 못했다.
드르륵-
“어머?”
마지막 장면을 앞두고서 열린 교실 앞문.
담임이 들어오려다가 멈칫거렸다.
다들 바쁘게 준비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왜들 한데 모여서 저러고 있지?
“준비는 다 끝났니? 리허설 보면 돼요?”
“아! 아아아! 맞다!”
“잠시만요. 쌤!”
그제야 후다닥 제 자리로 뛰어가며 준비하는 아이들. 담임은 무슨 일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무영은 대본을 덮으며 웃었다.
“역시 유나, 실력 녹슬지 않았어.”
그리고 엄지 척! 그의 행동에 다른 친구들이 깊게 공감했다.
“맞아. 유나야. 너 진짜 공주님 같더라.”
“모, 몰랐어. 이렇게 잘하는지.”
“사실 우리 이모가 너 나온 영화 되게 재밌게 봤대. 청소년불가라 난 못 봤지만…… 아무튼 이모가 너 연기 엄청 잘한다고 했던 말이 뭔지 알겠어.”
“대단하다. 대박!”
그나마 호의적인 아이들이 유나를 순수하게 칭찬했다. 유나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아니야…….”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았어도 자신은 연기자 아닌가. 상대가 못한다고, 애들이 따돌린다고 연극 연습을 대충 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래서 애들도 이렇게 놀라는 거잖아. 본 실력 보고서.
“난 배우인걸…….”
그래. 배우.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배우다.
유나는 정신 똑바로 차리려는 듯 볼을 가볍게 때렸다.
그런 아이의 곁으로 친구들이 몰려들어 한 마디씩 던졌다. 이새임 무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아까처럼 표독하게 굴지는 못했다.
어른들이 있고, 무엇보다 유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발톱이 없는 게 아니라 숨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무리는 수군덕거리며 구석으로 짜졌다.
“오빠. 내일 연극 보러 올 거지?”
“응. 당연히. 혹시 몰라서 캠코더도 샀다?”
“그러면 이제 가줘. 내일 봐. 내 공연.”
유나가 단호하게 무영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괜찮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이의 눈이 워낙 반짝이며 빛나서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파이팅입니다. 유유나 슨배님.”
“고마워. 오빠.”
유나는 무영의 허리춤에 이마를 비비고서 웃었다.
무영이 담임에게 스케줄이 당겨졌다고 둘러댄 후, 교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유나의 주위에는 학급 친구들이 잔뜩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