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188)
신인인데 천만배우 188화
회의
“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골 아파.”
보라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만 먹는다는 게 새벽 동틀 때 돼서야 자리가 파했다.
축제의 흥에 취한 것도 있지만, 마음 맞는 사람끼리 작품 얘기를 하다 보니 동트는 것을 기어코 보고야 만 것이다.
“이것 좀 마셔. 오늘 점심 행사만 하고 올라갈 거니까, 조금만 참고.”
고경민이 보라에게 숙취해소제를 주며 토닥였다.
“그래서, 재밌었어?”
“아. 오빠 나 차기작 정해질 것 같아.”
“말이 잘 맞았나 보네.”
“응응. 자세한 건 회사 가서-”
“저도요오…….”
그때 비적비적 다가온 무영. 호텔 로비 소파에 풀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고경민이 다른 손에 든 숙취해소제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너도? 너도 어제 술 마셨어?”
“네. 그리고 저도 차기작 정했어요.”
“뭐어어-!?”
“으아. 골 아파…….”
맥주 한 잔으로 시작한 것이 두 잔이 되고, 석 잔이 되면서 결국 소주까지 섞어 마셨다. 차라리 처음부터 소주만 마실걸.
“뭐, 뭔데? 뭐 하기로 했는데? 페이는?”
보통 배우가 출연을 결정할 때는 작품과 페이를 전반적으로 조율한 다음 ‘하겠노라’ 도장 찍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무영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일단 하겠다고 질러 놓고서 그 뒤로 협상하는 거지.
“그건 회사에서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서울 올라가자마자 미팅 잡았으면 좋겠어요.”
“오, 오케이…….”
전혀 오케이가 아니지만 일단 그렇게라도 말해본다.
무영이의 대본 보는 눈이 굉장히 좋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다. 진짜 이상한 작품에 꽂히면 큰일이니까.
“어디 건데?”
“저기, 제작사는 굴레고 [면죄부>라는 작품이요.”
“면죄부? 아아아.”
고경민은 뭔가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대본 건네주던 사람이 무영이를 보고 썼노라 했던 작품 아닌가?
그리고 분명히…….
“그거 살인자 얘기 아니야?”
무영의 트라우마를 알고 있는 고경민이었다. 의아하게 되묻자 무영은 그저 웃기만 했다.
* * *
부산에서 소식이 날아들자마자 회사는 떠들썩했다.
보라의 차기작 뿐만 아니라 무영의 작품까지 함께 검토해야 했으니까.
일에 중요도는 없지만, 아무래도 칼날궤로 공전의 히트를 친 무영의 행보에 좀더 귀추가 주목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유사하 대표님 들어오십니다.”
회의실에서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던 무영이 직원의 말에 멈췄다. 외투 없이 셔츠에 넥타이만 맨 유사하가 직원들과 함께 우르르 들이닥쳤다.
“무영 씨.”
“대표님!”
유사하 대표가 가볍게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무영이를 비롯한 고경민과 다른 직원들이 일어서며 그를 반겼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칼날궤 보느라 일을 제대로 못 했잖아요.”
농담 같아 보이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무영의 네임밸류가 하늘로 치솟으며 덩달아 빅윈 역시 할 일이 많아졌다.
그가 벌어온 돈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배우와 들어가는 작품에 재 투자를 이어갔다.
회사의 수장인 유사하는 이태껏 겪어보지 못한 바쁜 나날을 이어가고 있었다.
“굴레 쪽 분들은 언제 오신다고요?”
“곧 오실 것 같아요.”
유사하가 시계를 보며 확인했다.
직원들은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으며 서류를 나눠 가졌다.
“대본은 보셨어요?”
무영이 종이를 대충 정리하며 유사하에게 물었다.
그의 말에 유사하는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던데요.”
캐릭터와 스토리를 차치하고서, 장면이 보여줄 미장센이 특히나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청소년관람불가지만 이런 느낌의 영화라면 보통 해외에서 더 먹히는 법이지. 유사하의 긍정에 무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행이다.”
회사의 반대가 없다는 걸 뜻했으니까.
사실 무영이 하겠다고 못 박으면 회사에서도 어쩔 수 없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모두가 한뜻으로 작품에 몰두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연기 스펙트럼 넓히기에는 제격일 것 같더군요. 인물이 강렬하니 작품 전체에 힘이 있어요.”
회사 사람들 중 무영의 트라우마를 아는 건 고경민뿐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고경민만 무영을 걱정스레 지켜봤고, 나머지 직원들은 연신 긍정적이었다.
유사하가 뭔가를 고민하다가 물었다.
“혹시 무영 씨. 이번에도 영화 투자할 건가요?”
[거리의 햇빛> 때는 투자사가 적어서 무영이 자금을 내놓았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흥행성이 어느 정도 보장된 무영이니 여기저기에서 돈을 보태고 싶어 난리일 테니까.
“음. 딱히 생각은 안 해봤는데요.”
돈이야 많으면 좋지. 근데 일정 선을 넘어서자, 무영에게는 딱히 의미가 없었다.
자신은 먹어 봤자 하루에 세 끼 먹고, 입어 봤자 옷 한 두벌이었으니까.
“왜 그러세요?”
“이번에 SJ에서 최대한 투자를 밀어줄 생각이거든요.”
유사하가 방긋 웃었다.
“물론 그중 상당수는 무영 씨의 출연료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돈 놓고 돈 먹기였다.
SJ에서 제작사에 돈을 미친 듯이 퍼부으면 무영의 출연료는 다시 SJ 산하의 빅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돈이 돌고 도는 과정에서 무영의 몸값은 자연스레 오를 것이고, ‘역대급 투자비’ 따위의 언플용 헤드라인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 그렇군요.”
무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자, 유사하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웃었다.
“무영 씨의 가치가 곧 우리 회사의 가치니까요.”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하네요.”
무영은 눈치챘다. 사하가, 아니, 회사가 이렇게 나오는 게 곧 있을 자신의 재계약 때문이라는 것을.
하필이면 시즌 앞두고 연달아 히트를 낸 상태였다. 다른 소속사에서 눈독 들이는 건 당연했다. 아직 어떤 접촉도 없지만…….
‘무영 씨 몸값은 우리가 한 번 더 올려줄게요. 그러니 다른 곳 갈 생각 마세요.’
-라는 무언의 제안이 듬뿍 묻어나고 있었다.
“무영 씨 안목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작품 보니까 이게 관객으로서 내가 욕심나더라고요.”
유사하가 방긋 웃으며 대본을 내려놓았다.
카톨릭 특유의 성스럽고 화려한 분위기. 거기에 주인공은 준재벌에 가까운 천재 예술가였다.
필시 장면이 주는 눈요기가 작품의 매력점이 될 것이다.
“진짜 미장센이 뭔지 보여줄게요.”
굉장히 자신 있는 말이었다. 자본을 때려 박아서 작품의 퀄을 한층 높이겠다는. 무영은 박수를 짝짝 치며 웃었다.
“감독님이 들으시면 기뻐서 우시겠어요.”
“아마 우리 식구 쪽에서 배우가 더 투입될 것 같긴 해요. 캐스팅 논의를 좀 해봐야겠지만.”
투자사의 입김은 절대적이었다. 캐스팅에 영향을 끼치는 건 물론이고, 간혹가다 작품 내용 수정까지 손을 뻗치곤 했다.
“대표님. 저는 감독님이 쓰신 대본이 좋아서 하기로 결정한 거예요. 아시죠?”
절대 월권 행사를 하지 마시라, 무영이 넌지시 권하고 있었다.
유사하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영 씨. 나 몰라요?”
“알아요. 근데 혹시나 해서.”
“그런 말 섭섭합니다.”
자신은 자율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유사하는 점잖게 꿍얼댔다.
그때, 굴레 제작사 사람들이 도착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달깍-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굴레 제작사 사장 김동황입니다.”
“이쪽이 대본 쓰신 김산 감독님이시고요.”
“앉으세요.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대표 유사하입니다.”
매니지먼트 겸 투자사와 제작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술자리에서 보고 처음 보는 거라, 김산은 어색하게 무영을 향해 웃었다.
“대본 잘 봤습니다. 무영 씨를 염두에 두고 쓰셨다고요?”
유사하가 먼저 인사치레 겸 말을 떼었다.
김산 감독은 당황하지 않고 무영에게 했던 그 말을 그대로 전했다. 서로에게 한계를 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유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난리가 날 겁니다. 무영 씨 연기력이야 두말할 것 없고 가히 파격 변신이라 할 수 있겠네요.”
“피부도 희고 훤칠하셔서 잘 어울리실 거예요.”
“그럼 작품 얘기를 본격적으로 해볼까요?”
“아. 네.”
“김산 감독님 찍으셨던 게 [청춘열기>, 독립영화제에서 수상하셨고 이어서 [돗, 단배>가 대표작이시네요. 이전 작들과 분위기가 좀 다른데요.”
유사하는 투자자로서 질문하는 거였다.
김산 감독은 무리 없이 대답하며 자연스레 작품의 방향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해서, 종교의 이면성과 인간의 추악함 더 나아가 본질적인 악과 죄에 관해 얘기하려 해요. 자본주의와 종교주의가 나타내는 본질 따위가 도경이라는 인물의 원동력이죠.”
죄란 과연 무엇인가.
사회의 약속으로 죄가 정의된다면, 도경이 행하는 살인들은 과연 죄가 아니게 되는 걸까? 면죄부라는 사회적 제도가 그를 용서해 줬으니 말이다.
“캐스팅은 생각해 두신 배우가 있을까요?”
“일단 무영 씨가 제일 우선입니다.”
하무영과 관계가 불편하거나 호흡이 맞지 않은 배우는 배제하겠다는 의미였다.
유사하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 씨 제외하고 제일 중요한 배역이 김 비서 역이네요?”
김 비서. 도경의 전속 비서이자 그의 살인을 도와주는 조력자였다.
“네. 몇몇 순위에 올려둔 배우가 있긴 있습니다만 아직 내부 캐스팅 단계라서요.”
도경은 미(美)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피해자들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그림으로 남기길 좋아했으며, 몇몇은 죽고 나서도 도경의 모델이 되곤 했다.
그러다 김 비서는 우연히 스케치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충실한 사냥개라 생각했는데, 주인은 그를 ‘대상’으로 봐왔던 거다. 미(美)의 대상으로.
“무영 씨와 견줄 만큼 피지컬이랑 연기력이 괜찮은 배우가 드물어서요.”
“아아. 그건 인정합니다. 우리 무영 씨 화면에서 이기려면 쉽지 않죠.”
감독의 말에 유사하가 바로 맞장구를 쳐댔다.
가만히 듣고 있던 무영만 뻘쭘하게 웃을 뿐. 회의실 그 누구도 그 말을 농담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내부적으로 조율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김 비서는 결국 도경의 기행이 세상에 폭로되는 기폭제 역할이었다.
그의 저택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동안, 경찰은 눈이 멀었고 기자는 펜대를 놀릴 수 없었다.
충격적인 사실에 대중은 분노했고, 종교계는 이를 회피하고자 도경을 마귀로 선포한다.
“아 그리고 혹시 장면 중에 무영 씨 곤란한 게 있을까요?”
김산은 조심스레 무영에게 물었다.
청소년관람불가인 데다 워낙 자극적인 장면이 많았다.
원하는 부분이 있다면 가능한 조율을 해주고 싶었다. 이런 결의 작품은 처음일 테니까.
하지만 무영은 단박에 거절했다.
“아니요. 다 괜찮아요. 할 수 있으니까 저 생각하지 말고 감독님이 하고 싶은 얘기 다 해주세요.”
무영의 말에서 다짐 같은 게 느껴졌다.
어떤 장면이라도, 어떤 역할이라도 주어진 그대로를 해내겠노라. 무영의 말에 김산이 희미하게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아. 네네.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사장님과 감독님은 따로 또 날을 잡죠.”
형식적인 미팅이 끝났으니, 이제 출연료와 일정 조율 따위의 실질적인 미팅이 남아 있었다.
무영을 선두로 꽂은 배우에 대한 얘기도 그때 이뤄질 것이다.
“그럼 저는…….”
무영은 머리카락을 대충 매만지며 웃었다. 상대역 캐스팅 배역이 정해지면 카메라 테스트가 있을 것이다.
빠른 진행을 위해 그가 할 일은 딱 하나였다.
“머리 색부터 빼고 있을게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