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215)
신인인데 천만배우 215화
공포영화
“자! 새로운 마음으로!”
고경민은 한껏 들떠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계약 성사가 불투명하다 보니까 만료 시점 이후로는 스케줄을 못 잡고 있었으니까.
무영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자마자, 신나서는 온갖 스케줄을 물어왔다.
“한번 보고 확인해 줘!”
“네엥.”
반면 무영은 담담하게, 원래 하던 일이었으니 별 반응이 없다. 그는 스케줄 표를 천천히 넘겼다.
서너 달간, 그러니까 여름에 [면죄부>가 개봉하기 전까지 스케줄이 다채로웠다.
“반 공백인데 생각보다 뭐가 많네요?”
촬영을 제외하고서 뭐 그리 할 일이 있나 싶었는데, 이거 꽤 촘촘했다.
주에 두세 번, 화보나 인터뷰 혹은 행사가 아주 줄기찼다.
“봄은 짧잖아. 늦봄부터 [면죄부> 홍보 활동 잡혀 있으니 그 전으로 조율해서 넣었어. 이쪽이랑, 이쪽은 취소 가능하니까 컨디션 보고서 진행하면 될 듯.”
“아아. 괜찮아요. 주에 두세 번 일하는데 그게 힘들다고 하면 곤란하죠. 이대로 할게요!”
“오케오케.”
무영의 말에 고경민이 신나서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그걸 가만히 보던 무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름까지 시간이 어중간하게 빈다면…….
“왜 그래?”
“고민이 좀 들어서요. 복학을 할지, 아니면 차기작을 들어갈지.”
동기 남자애들은 대부분 군대로 빠졌으나, 무영이는 아직 먼일이다. 자리를 더 굳건하게 잡아놓고 가는 게 좋을 터. 자퇴하는 것 아닌 이상 수업을 듣긴 들어야 했다.
“진경문 감독님한테 연락 안 왔어?”
“안부 인사만 조금요. 대상 축하한다고. 시나리오 쓰고 계신다고 하셔서 기대 중이라 답장 드렸어요. 근데 그거 리메이크라면서요? 예전에 쓰던 걸 좀 고치는 거라 하시던데.”
“아아. 그거 원 대본 있을걸?”
“볼 수 있을까요?”
차기작. 그것이 문제로다.
정식으로, 그것도 주연에 가까운 조연으로 캐스팅해 주셨던 감독님이었다.
[역병>이 주는 의미가 남달랐기에, 어지간하면 감독님의 러브콜에 화답하고 싶었다.“여기 진경문 감독님 전 시나리오는요?”
“옆 캐비닛에 모아뒀어요.”
고경민은 직원의 말에 캐비닛을 뒤적거려 시나리오를 가져왔다. 누렇게 뜬 표지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목은…….
“이거 맞아요?”
“응. 가제지만 일단은 맞아.”
감독님은 두 글자 제목을 좋아하는 듯싶다. 표지에 적힌 [태풍>이라는 타이포가 정갈했다. 하지만 딱 그뿐이다. 한 장 넘겨 간단한 줄거리를 확인한 무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음…….”
먼지인지 스모그인지 모르겠다. 톡톡, 표지를 두드릴 때마다 희미한 뭔가가 떠오르기는 하는데…….
“한국형 재난 블록버스터.”
“좀 너무 식상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건 이유가 있어.”
“……그건 그렇겠지만.”
모든 클리셰의 집합소 아닌가?
바다를 건너올 초대형 태풍. 정부는 한반도를 지나갈 것을 예상했지만, 몇몇 전문가들이 대첵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 묵살. 태풍 한반도 상륙.
허리케인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모든 게 휩쓸리고, 주인공과 일행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구르는…….
“세상에. 마지막 엔딩은 헬기 구조로 지평선 일출이요? 어린이 역도 있네. 유나한테도 연락이 갔는지 모르겠어요.”
이 정도면 예고편만 봐도 줄거리 유추가 가능할 정도였다. 그 거장, 진경문 감독님의 선택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무영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고경민이 덧붙였다.
“예전에 이거 쓸 당시에는 이런 스토리가 잘 먹혔잖아. 근데 감독님이 다른 거 찍느라고 진행을 못 했대. 처음으로 직접 쓰신 거라 꼭 영상화해야겠다고 마음만 먹었다가 이제 기회가 닿아서 리메이크 들어가는 거라 하시네.”
한 번 썼던, 그것도 상상력과 열정이 제일 활기찰 때 썼던 것이라 쉬이 포기 못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시대는 이미 지났고, 아무리 리메이크를 한다고 한들…….
“저는 안 할래요.”
“그래?”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흥행을 떠나서 대본을 읽고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영의 단호한 말에 고경민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리메이크한다고는 하셨지만, 잘 모르겠어요.”
성공이라는 건 정말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사이즈가 보이지 않나? 무영은 오히려 이런 걸 아쉬워하는 고경민이 이해가 안 됐다.
“사실 이거 국내용보다는 국외용으로 제작하려는 분위기가 보여서. 중국에서는 아직 이런 게 잘 먹히거든. 감독님 네임드도 있고 해서 투자를 많이 받나 봐. 벌써부터 좀 뜨거워.”
인구수 차원이 다르니, 수백억을 들이붓더라도 감당 가능한 모양이었다.
세트장으로 도시 하나를 세울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다.
“감독님한테는 말씀 잘 드려야겠어요.”
“그래. 그러면 집으로 다른 시나리오들 보내줄게. 천천히 읽으면서 확인해 봐.”
“넵. 알겠습니다. 보고 괜찮은 거 없다 싶으면 복학하는 쪽으로 할게요.”
무영은 진경문 감독의 시나리오를 돌려주며 가방과 옷을 챙겼다. 회사 직원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고경민과 함께 밴으로 올라탔다.
“집으로 가면 돼?”
“아니요. 은성이 형네 집이요. 엔빈이도 와서 같이 놀기로 했어요.”
“맨날 붙어 있네. 그쪽은 일이 없대?”
“저랑 비슷하죠. 뭐. 그나마 셋 중에서는 빈이가 제일 바빠요.”
무영이 웃으며 대꾸했다. 한솥밥 못 먹은 이후로는 그냥 밥이라도 같이 먹어야겠다며 어찌나 붙어대던지. 톱스타가 아니었으면 백수로 오해할 정도였다.
차는 청담의 고급 빌라로 향했다. 당최 이것이 아파트가 아니면 뭔가 싶지만, ‘세실리온 빌라’라는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으니.
끼익!
“형. 저 가볼게요.”
“그래. 푹 쉬고, 연락할게.”
고경민은 창틈으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무영은 익숙하게 최상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이미 그들은 아래 현관에서부터 무영이 온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어?”
문을 열어준 것은 엔빈이었다. 무영이는 찬 손을 비비며 안으로 들어섰다.
“늦었어? 일찍 온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 안 타고 걸어오나 싶었다.”
“뭐 시켰는데? 피자?”
“하무! 빨리 좀 와라!”
거실에는 플스 게임과 맥주 그리고 피자가 놓여 있었다.
와다다 컨트롤러를 누르며 시선은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고개는 무영이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피자 식기 전에 먹어. 빈아! 빨리!”
“우아아아! 형! 그걸 깼어요?”
“캬캬. 이런 건 껌이지. 짜식아.”
아주 신이 났네. 공을 차고 놀아도 될 법한 거실에서 둘이 옹기종기 앉아 게임에 여념 없었다.
무영은 짐을 풀고서 차은성의 집을 간단히 둘러봤다. 더러운 성질머리와 달리 인테리어는 깔끔하기 그지없다.
“어?”
그런데, 복도 맨 끝방 문에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닫힌 문틈으로 조금씩 새어 나오는 그것. 꽃가루다.
무영은 게임하느라 정신없는 은성에게 물었다.
“형. 복도 끝방 뭐 하는 방이에요?”
“거기? 서재라고 쓰고 창고라 읽는 곳.”
“구경해도 돼요?”
“너 게임 안 하고?”
“저는 괜찮아요.”
컨트롤러를 넘겨주려는 듯 손을 까딱거렸으나, 무영은 별 취미 없었다. 허락 맡았으니 총총 뛰어가 문을 열었다.
진짜 창고라고 부를 만했다. 온갖 잡동사니가 어지러이 쌓여 있었는데, 거실이 깨끗한 만큼 이곳이 더러웠다.
“뭐지?”
무영은 꽃가루를 손으로 짚어가며 근원을 찾으려 했다. 바닥을 더듬거리자 이내 그것이 맨 아래에 깔린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아챘다.
‘여기서 나는 거 맞지?’
대충 구겨져 있는 거로 보아, 차은성이 보다 버린 것 같다. 무영은 표지에 적힌 [상실과 후회>라는 글자를 읽었다. 그리고 그 밑에 적힌 장르는…….
“먼지 닦냐?”
차은성은 게임 라운드가 끝나자마자 따라왔는지, 벽에 기대어 있었다. 무영은 바닥에 앉은 채 대본을 들어 보였다.
“형. 이거 형한테 들어온 대본이에요?”
“그게 뭔데?”
워낙 많은 작품이 들어오다 보니, 하나하나 기억 못 하는 듯싶다. 차은성이 다가와 쪼그려 앉아 인상을 찌푸렸다.
“아아. 어. 왔는데, 난 안 해.”
“왜요?”
공포영화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일단 장르적으로 1차 탈락이어서, 뒤에는 읽지도 않았다. 차은성은 무영이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넌 [태풍> 러브콜 들어왔다며?”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긴. 소문 다 났어.”
몇몇 배우들이 진경문 배우에게 출연 의사를 보냈지만, 아직 캐스팅 논의 단계라 답변을 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하무영이 있다고.
“그거 우리 회사에서도 투자 들어가거든.”
“네에엥? 진짜요? 왜요?”
“몰라. 그거야 운영진이 알아서 판단한 거겠지. 진경문 감독님이라 그런가. 아무튼, 너 하면 나도 할 생각 있음.”
하무영이 [태풍>에 출연한다면, 차은성도 오디션을 볼 생각이었다. 워낙 업계에서 주목하는 작품이기도 했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너랑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오. 그거 감사한 말인데, 전 안 하려고요.”
“뭐? 왜?”
“형 리메이크 전 대본 안 봤어요?”
“봤는데, 대폭 수정한다고 하시니까.”
이건 좀 의외인데? 차은성은 턱을 매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회사에 오디션 보겠다고 언질한 상태. 어차피 투자 들어가는 거 차은성이 나가면 금상첨화라며 사장이 좋아 죽더만.
“그럼 당분간 쉬려고?”
“복학도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이거에 관심 생겨서요.”
무영이 든 것은 반쯤 구겨진 시나리오였다. 감독은 박차일 감독. 감성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남자였다. 영화의 특색 때문인지 그리 흥행과 인연 있는 자는 아니었다.
“공포영화 제목이 [후회와 상실>인데 관심이 가? 너도 참 너다.”
“내용에 따라 다르죠.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다 같은 건 아니에용. 그리고 박차일 감독님이면 분명 으악! 꺅! 하는 공포영화는 아닐 거고요.”
끄응. 차은성은 아예 그의 옆에 주저앉아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지간하면 같이 작업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공포라니.
“형 혹시 귀신 무서워요?”
“안 무섭거든? 짜증 나서 그렇 거든?”
무서워하는 거 맞네. 무영은 살포시 웃으며 앞장을 넘겼다. 두 사람은 마치 마법의 책을 펼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차락.
첫 장을 꿰는 단 한 문단.
[골수이식을 하기로 한 의대생 정한. 정한은 남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원했다. 독하게 공부했고, 의식적으로 봉사활동을 했으며, 강제적으로 도덕적인 틀에 자신을 재단했다. 그러다 우연히 봉사활동 단체에서 골수이식을 권유받게 되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정한은 하겠노라 답하고 만다. 하지만 막상 수술을 앞두고서 포기하고 마는데…….]“공포영화 맞아?”
“뒤에 더 읽어볼까요?”
무영의 말에 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지도 않고 박아두더니, 막상 읽으니 흥미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기증을 철회함으로 골수를 빼 버린 아이는 그대로 침상에서 죽어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어쩔 수 없기는 X발 대가리 박고 죽어야지.”
“형. 진정진정.”
시간이 지나, 정한은 의사가 되어 한 대학 병원에 부임한다.
그리고 우연히 동료 의사를 통해 그곳이 아이가 있던 병원임을 알게 되는데…….
이후로 그에게 기묘한 일이 생기며 일어나는 미스터리 공포 스릴러였다.
주요 배역은 정한과 원한령인 아이 그리고 그 아이의 오빠. 이렇게 셋이었다. 무영은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오빠가 의사 동료겠네요.”
“그렇지. 그렇게 가야 얘기가 맞지.”
둘은 계속 꼼꼼하게 대본을 확인했다. 기다리던 엔빈이 지쳐서 부를 때까지.
“피자랑 맥주 안 먹어요? 안 먹어? 내가 먹어?”
하지만 대답이 없다.
엔빈은 꿍얼대면서 복도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무덤덤한 표정인 무영과 달리, 차은성은 눈시울이 벌게져서는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