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286)
신인인데 천만배우 286화
리딩
며칠 후, 원룸촌 근처의 작은 카페.
“여기 도장 찍으면 됩니다.”
“앗. 네에.”
솔예인은 자신의 도장을 만지작거리며 마지막으로 계약서를 검토했다.
인생 두 번째 소속사, SJ.
솔직히 그녀의 입장으로는 딱히 갈 곳이 없는지라 다른 선택지가 없거늘, SJ가 제시한 계약 조건은 생각지도 못하게 괜찮았다.
직원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 있으십니까?”
“아니요. 문제없어요. 다만, 조건이 생각보다 좋아서 조금 놀랐어요. 소송 대신 진행해 주시는 조건으로 계약금만 퉁 칠 줄은 몰랐거든요.”
“그것만 해도 저희는 충분하죠. 계약 한번 할 때마다 수억씩 들어가는데.”
거기에 승소하거나 정산을 재확인하여 생기는 이득에 관해서는 계약 비율대로 다시 나눠 갖기로 했다.
혹여 하늘이 두 쪽 나고 땅이 갈라져서 패소한다 한들, 선납 형식으로 SJ에서 내주기로 했기 때문에 솔예인은 더 이상 캐스터 측과 접촉할 일이 없었다.
“다시 검토하시겠습니까? 시간을 더 드릴까요?”
“아니요. 찍을게요. 어제 충분히 읽었습니다.”
“네. 솔예인 씨. 이쪽에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솔예인이 날인과 간인을 찍어댔다.
계약이 완료되자, 직원은 서류를 케이스에 챙기며 솔예인에게 꾸벅 인사했다.
“SJ 식구가 된 걸 환영합니다. 대표님께서 바쁘신 터라 제가 인사 올리게 된 걸 양해해 주십시오.”
“자,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도요. 우선 담당 매니저 배정은 이번 주 안으로 받을 거고요, 혹시 원하시는 조건이 있을까요? 성별이라든지, 아니면 뭐,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니요. 없습니다. 다 좋아요…….”
난생처음 받아보는 호의와 권리에 솔예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직원은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바깥을 보며 물었다.
“지금 거주하시는 빌라가 이곳인가요?”
“네. 본가로 들어가면 너무 걱정하실 것 같아서 일단 친구 집에 있어요.”
“아마 사택 지원이 될 겁니다. 이건 제가 오늘 중으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직원은 차를 타고 좁다란 골목을 겨우 빠져나갔고, 솔예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약서를 만지작거렸다.
아직 인주도 채 마르지 않은 종이였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지이잉- 지이잉-
“네. 여보세요.”
-예인 씨, 나예요. 김순영.
[그 대로, 고양이>의 김순영 작가였다.캐스팅 단계에서만 몇 번 봤었지, 이렇게 통화하는 건 처음이라 어쩔 줄 모르겠다.
솔예인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자 카페 사장님이 의아하게 웃으며 쳐다봤다.
“네네. 작가님. 어쩐 일이세요?”
혹시, 계약상 문제가 있으니 하차해 달라고 연락한 것일까?
SJ에서 출연에는 차질이 없을 거라고 했으나, 제작진 입장에서 잡음 있는 배우를 쓰는 게 부담되는 일임은 알고 있었다.
-음. 내가 진작에 전화를 해야 했었는데, 나도 일이 있고 가정이 있어서 바로 하지를 못했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영 씨한테 들었어요. 솔예인 씨, 주인공 수나 역에 왜 캐스팅됐는지 모르는 것 같다고.
“네?”
매니저를 비롯해 회사의 수많은 직원이 입 모아 말했었다.
회사에서 힘 좀 썼노라고, 그러니 지금 주어진 기회에 감사해야 한다고.
김순영 작가가 낮게 웃자, 솔예인은 힘이 풀린 듯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따뜻한 웃음이 솔예인의 꽁꽁 언 몸을 녹이는 것 같다.
-듣자 하니, 좀 오해가 있었나 본데, 저는 글 쓸 때부터 솔예인 씨를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전에 언제였더라? 어디서 인터뷰한 걸 봤었거든요. 아이돌 연습하기 위해, 그 어린 나이부터 아르바이트 두 개씩 뛰어가며 고시원 살았다 했죠? 이상하게 예인 씨 말을 듣는데 작품 이미지가 딱 떠오르더라고요.
솔예인은 퐁퐁 솟아오르는 눈물을 훔치며 침묵했다.
상대의 반응이 없었으나, 김순영 작가는 계속해서 그녀를 위로했다.
-캐릭터 설정을 짜면서 수정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솔예인 씨 덕분에 캐릭터가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 당연히 예인 씨에게 먼저 캐스팅 순위를 드린 거죠. 물론, 이전에 보여줬던 연기의 결이나 예인 씨가 품고 있는 기본적인 분위기가 맞아떨어지는 것도 있었지만요.
솔직히 솔예인도 의아했다.
그 많고 많은 배우 중에 어떻게 자신이 발탁된 것일까, 역시 회사의 힘이 대단하구나,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회사의 간사한 수작질에 넘어간 걸지도 모른다.
솔예인이 훌쩍거리자 카페 사장님이 은근슬쩍 냅킨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니까! 주위에서 뭐라고 해도 중심 잃지 마세요. 솔예인 씨는 주인공이에요. 주인공이 넘어지면 작품이 넘어집니다. 우리는 예인 씨를 선택한 거지, 그쪽 회사를 선택한 게 아니거든요.
“네. 감사합니다.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흑.”
-그래요. 소송이니 뭐니 힘들 거 압니다. 힘내시고, 이겨내세요. 응원할게요. 우리 다음에 리딩 있는 거 알죠?
“네. 당연히 알죠. 머릿속에 꼭꼭 새겨뒀어요.”
-좋습니다. 그럼 그때 볼게요. 너무 속 앓지 마요. 나는 수나가 힘든 걸 보면 마음 아파요.
수나는 [그 대로, 고양이>의 여주인공 이름이었다. 끝까지 솔예인을 드라마 주인공으로 여기겠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지금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위로였다.
“네.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럼, 쉬세요.
뚝.
솔예인이 눈물을 찍어 누르자, 카페 사장이 테이블에 쿠키를 올려놓았다.
놀라서 올려다보는 눈이 물기로 반짝거렸다.
“팬이에요. 예인 씨. 파이팅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이고, 울지 말라고 주는 건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솔예인은 쿠키를 소중히 껴안고서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 순간, 차은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팬들을 위해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말.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자신을 하찮게 여기면, 그건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똑똑.
솔예인이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하무영과 차은성이 흰 강아지 한 마리를 품에 안은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선배 안녕하세요. 놀러 나가는 길에 잠시 들렸어요. 마침 막 계약 끝나셨다면서요. 아, 얘는 삼순이.”
앙!
무영이의 말에 차은성이 삼순이의 팔을 잡고 천천히 흔들었다.
* * *
[그 대로, 고양이> 리딩이 예정되어 있는 건물.출입 허가증을 받지 못한 기자들이 카메라를 든 채 진을 치고 있었다.
하반기 기대작의 리딩장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인파가 너무 많았다.
“사람 더럽게 많네.”
“당연하지. 하무영이랑 솔예인이 같이 온다는데.”
“하무영 영화 봤냐? [후회와 상실>?”
“난 귀신 나온 거 안 봐. 그런데 주위에서는 알음알음 다 보더라. 호러 장르치고는 생각보다 흥행이 괜찮아. 입소문이 좋지.”
“손익 분기점이 어딘데?”
“……200만이라 했던가?”
“지금은 150만 돌파지? 근데 아시아 뭐시기 상 받았으니까 그거로 뽕 뽑았다 봐도 돼.”
“됐고, 솔예인이랑 하무영 정문으로 오는 거 맞아? 난리가 난리인데 모습 보여줄 거래?”
“음. 회사에서는 그렇다고 말이 내려왔는데…… 어?! 저거다! 검은색 밴!”
“야야야! 하무영 왔다! 하무영!”
타닥타닥!
모여서 담배를 피우던 기자들이 일제히 내달려 앞으로 다가갔다.
경호원들이 안전 라인을 만들며 차 문을 열었다.
가벼운 차림새의 하무영이 꾸벅 인사하며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하무영 씨. 안녕하세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무영이.
대본까지 보여주며 리딩장에 들어가는 것을 동네방네 자랑해 댔다.
그리고 안쪽에서 나오는 여자의 손을 잡으며 부축해 줬다.
“솔예인이다! 솔예인 씨! 지금 계약 소송 걸렸는데요, 현재 심정 좀 말해주세요! 캐스터 측 직원들이 정신적 학대를 했다 주장한 게 맞습니까?”
“동영상은 예인 씨 자택이죠? 동영상을 촬영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고소장 접수됐다고 기사가 났는데, 억울하다 주장하는 분들이 꽤 있거든요. 이에 한 말씀! 한 말씀!”
“비켜주세요. 감사합니다.”
“거기 비켜요! 밀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비키세요!”
기자들의 러쉬가 계속되었지만, 경호원들이 온몸으로 받아내며 자리를 지켰다.
솔예인은 이전처럼 움츠러들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가볍게 매만지더니 활짝 웃으며 움직였다.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당당하고 밝은 자세와 미소, 웃음.
이전 회사와 분쟁에 휘말렸지만, 자신은 피해자였고 그게 부끄러운 것도 아니었다. 몸을 사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야만 대중들에게 좋은 인식을 보여줄 수 있었다.
찰칵- 찰칵!
“이쪽이요!”
경호원들의 안내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 무영이와 솔예인.
둘은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고경민이 휴대폰으로 문자를 확인하더니 솔예인에게 속삭였다.
“저기, 예인 씨. 혹시 연습생 들어올 때 회사에 돈 넣었던 거 있어요?”
“어떤 거요?”
“연습생 투자비 명목.”
“아아. 네. 오백만 원 정도…….”
“리딩 끝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요. 법무팀에서 증언 얻을 게 있다 하네. 투자금 관련해서 사기 친 부분도 있는 것 같아. 그 캐스터 사장이.”
고경민의 말에 솔예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내 리딩장으로 들어서며 우렁차게 인사했다.
이전의 솔예인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솔예인입니다!”
“하무영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어서 와요. 어우, 아래에 기자님들 많더라.”
“이쪽으로 앉으세요.”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작가와 피디 맞은편에 자리 잡은 두 사람.
다른 조연들 역시 반갑게 일어서서 인사했다.
후에 중견 배우들까지 다 도착하자, 피디가 마이크를 잡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 대로, 고양이> 피디를 맡은 이대환입니다. 우선, 이렇게 여러분들 뵙게 되어 정말 반갑고 영광입니다. 돌아가면서 간단히 자기소개 할까요?”
“안녕하세요. 작가 김순영입니다.”
쭉쭉 돌아가던 중, 마이크가 솔예인에게 도착했다.
그녀는 허리를 꾸벅 숙인 다음, 우선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안녕하세요. 수나 역을 맡은 솔예인입니다. 저 때문에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 노력하여 드라마에 누 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짝짝짝-!
그래도 동료 배우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특히 중견 배우들은 엔터테인먼트의 더럽고 치열한 면모를 오래전에 보고 겪었던 선배들인지라 솔예인의 기분을 십분 이해하는 듯 보였다.
“잘해봅시다.”
“그래요. 앞으로가 더 중요하니까.”
“감사합니다.”
솔예인이 마이크를 무영이에게 넘긴 순간이었다.
고경민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에 화들짝 놀라며 무음으로 전환했다. 회사에서 들어온 소식이다.
‘어?’
띠링!
[솔예인 씨랑 법무팀 안 와도 될 것 같아요. 캐스터 이놈들 영업 잠정 중단 걸었거든요. 완전 난리 난리 끝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