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29)
신인인데 천만배우 29화
비공식
“안다기보다…….”
봉군은 잠시 고민하며 적당한 표현을 생각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
“굉장히 특이한데요.”
“그 사람만큼 특이한 사람도 없을 거다. 서울연합연극동아리라고, 말 그대로 수도권 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합회가 있어.”
말은 거창하지만 사실 대단한 건 아니었다. 친목 도모와 작품 공유 혹은 품앗이처럼 서로의 연극을 관람하는 거지. 봉군의 경우 극작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작가들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활동했었다.
“거기서 본 사람인데, 대학생은 아니었어. 소속이…… 아오. 기억 안 난다. 아무튼, 웃긴 게 본명을 안 알려주는 거.”
“왜요?”
“나도 모르지. 맨날 모자 푹 눌러쓰고 다니고. 죄지었나 싶을 정도로 본인 오픈을 안 하더라. 근데-”
봉군은 잠시 멈칫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대본. 잠깐 훑어봤지만, 역시는 역시 역시다.
“글을 졸라리 잘 썼지.”
뇌리에 박힐 정도로. 처음 봤을 때 그 신선한 충격. 그리고 질투심.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할 만큼 개성과 밀도를 다 갖춘 작품이었다.
“너무 잘 써서 짜증이 날 정도였거든.”
“우와. 대박이다.”
“다들 겉으론 티 안 냈지만 속으로 똑같이 생각했을 거야. 그렇게 몇 번 피드백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잠적.”
“연락이 끊어진 거예요?”
“응. 글이 안 올라왔어. 근데 사실 동아리 연합회 인원이 워낙 많아서, 나왔다 안 나왔다 하는 경우가 왕왕 있거든. 자연스럽게 다음 주에는 오려나, 마려나 하다가 완전 쫑. 그게 아마…… 작년…….”
좀 된 일인지, 봉군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머리를 털어내며 말문을 돌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완성하긴 했구나. 그 사람 설정을 엄청 세세하게 짜서 유일한 단점이 집필 속도였거든. 좋은 자세긴 한데, 솔직히 인물이 밥 먹을 때 습관이나 뭐 그런 것까지 짜는 작가는 없잖아?”
“보통은 그렇겠죠?”
작가가 아니라 모르겠다는 말 대신, 무영은 적당히 대꾸했다.
“그게 비결인가 싶어서 따라도 해봤는데, 어우. 난 안 맞더라. 어느 정도만 잡아야지 원.”
그가 혀를 내두르며 감회에 젖어 들었다. 끝을 못 맺을 것 같았던 수작이 어느새 완성되어 제 손에 들려있지 않은가.
“무영아. 나 이거 읽어봐도 되냐?”
“괜찮기는 한데, 저 오디션 연습해야 해서요.”
“제본 뜨는 건 안 될 거고…… 아!”
봉군은 뭔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겨댔다. 그리고 후다닥 제 자리로 달려가 노트북을 켰다. 무영은 그의 뒤에서 화면을 지켜봤다.
“뭔데요?”
“카페에 아옥 작가가 예전에 올렸던 글이 있어. 보자보자…… 삭제만 안 했으면…….”
딸깍!
“있다!”
[[역병> 3차 시놉시스. HWP] [[역병> 인물 설정집. HWP] [78씬까지 썼습니다. HWP]게시글에 첨부된 세 가지 파일. 봉군이 그걸 내려받아서 무영의 SNS로 보내주었다.
“나 읽는 속도 빠르거든. 이거 보면서 좀만 기다려 줄래? 부탁할게. 아마 앞부분은 거의 안 바뀌었을 거야. 쓰는 속도가 느린 대신 한 번 썼다 하면 그대로 가는 스타일이라.”
그는 두 손을 모아가며 간절히 부탁했다. 솔직히 아옥 작가를 만나기 전엔, 봉군 스스로가 꽤 괜찮은 글쟁이라 생각했었다.
‘자만도 그런 자만이 없었지.’
천재를 만나기 전까진 본인이 얼마나 아둔한 존재인지 모르는 법.
“한번 보고 싶어. 그 사람이 어떻게 글을 썼고, 이 작품의 마무리를 지었는가.”
무영은 SNS로 온 파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룸메이트 형이 저렇게까지 원하는데 별수 있나? 게다가 그가 준 선물은 생각보다 훨씬 유용할 것 같으니.
“편히 보세요.”
“앗싸! 고맙다! 진짜!”
그는 대본을 받아들고 게임 중인 두 친구의 뒤통수를 힐끔거렸다. 게임에 열중하느라 온갖 잡소리가 시끄럽다.
“와. 대체 여기 주위에만 몇 명인 거야?”
“튀튀. 뺐다가 다시 들어가!”
“나 잠시 로비에.”
“다녀오세요. 형. 저 그럼 노트북 빌려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사람이 오가지만, 로비가 여기보단 조용할 것이다. 무영은 봉군의 자리에 앉아 파일을 클릭했다.
딸깍.
무영의 시선을 제일 먼저 끈 것은 역시 ‘인물 설정집’.
[재니: 나이 아홉 살. 보살핌을 받지 못한 유년 생활로 검은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내려옴. 올망졸망한 얼굴. 손목에는 화상 자국이 나 있음(외부에서 보기엔 자살 흔적> 이것 때문에 괴한들의 표적이 됨) 콩을 싫어하며 좋아하는 것은 초콜릿-]아역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제일 먼저 뜬다. 인물 한 명당 A4 용지 대여섯 장에 달하는 상세한 내용.
두서없이 떠오르는 것을 죄다 적었는지 내용이 복잡했다. 무영은 스크롤을 쭉쭉 내리며 루이를 찾았다.
“오. 여기 있다.”
[루이: 나이 스물하나. 갈색 곱슬 파마머리. 애정 결핍. 할머니와 단둘이 FG 공장 인근의 구멍가게 운영. 수학적 천재성이 있지만, 불우한 환경으로 빛을 발하지 못함. 할머니가 질환으로 사망하자 우울증 및 자살 시도. 하지만 슈퍼 유일한 손님이었던 재니에게 발각, 실패로 돌아가고 그녀를 따르기로 함. 재니가 쓰다듬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즐김. 언제나 주머니에 초콜릿-]“초콜릿이 어디서 자꾸 나오나 했더니.”
루이가 주는 거였구나.
현재 대본과 조금씩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퍼즐의 빈 곳을 채워주는 뒷얘기가 상당했다. 무영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한 글자씩 꾹꾹 눌러가며 읽었다.
“루이. 루이…… 재니…….”
그리고 제일 중요한 두 인물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읽다 보니 점점 그들의 세상에 빠지는 기분. 맨 처음엔 꽃가루로 선택한 작품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꼭 해보고 싶어.’
매력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들이 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이 기묘한 사랑 관계의 두 사람, 루이와 재니.
스윽.
무영은 노트를 가져와 수십 장에 달하는 모든 인물의 설정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외워야 할 거, 이 방법이 좋을 것 같았으니.
“으아아-! 여기까지?”
“오케이. 많이 했다.”
그날 새벽이 되어서야 끝난 게임.
박문성과 최환은 기지개를 켜며 기숙사를 돌아봤다.
“……중간고사 끝났다며?”
“쟤는 왜 저기서 자냐?”
“헐. 봉군이 울어?”
“우는데? 휴대폰! 휴대폰!”
미친 듯이 뭔가를 써내려가는 무영과 그런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무영의 침대에서 자는 봉군. 그의 품에는 [역병> 대본이 안긴 채 눈가가 젖어 있었다.
찰칵-!
“무슨 꿈을 꾸기에 울어?”
질투와 수작을 만난 만족감이 섞인 눈물이었다. 봉군이 훌쩍이는 동안 무영은 아릿해지는 손목을 흔들며 웃었다.
‘좋았어.’
수십 명에 달하는 인물의 삶이 정리되면서, 덩달아 작품의 기승전결 역시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인물의 행동이 곧 이야기의 흐름이었으니까.
‘할 수 있겠다.’
그 누구보다 완벽한 루이가 되는 것. 평면 세상에 사는 그를 현실로 불러내는 것. 무영의 눈이 스탠드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 * *
“금은동이-! 이게 얼마 만이야?”
“나금동이라니까요. 참나.”
“앉아. 앉아. 이야, 오늘 힘이 빡 들어갔네?”
정장을 쫙 빼입은 나금동과 그 앞에 마련된 만찬. 몽네뜨 사장은 웃으며 외투를 벗었다.
“일은 바쁘시죠? 곧 작품 들어갈 거라.”
“그렇지. 이전과는 좀 다른 방식이라 정신이 없네.”
“그러면 소문이 맞네요? 내정 배우가 있다는 거?”
“거참. 귀 밝아.”
원래 제작사와 감독이 작품을 결정하면 그때야 배우를 뽑고 촬영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지.
배우가 정해져 있었기에 그쪽 조정을 먼저 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다들 된답니까?”
“음. 아무래도 진경문 감독님 작품이니까 다들 긍정적이긴 해.”
진경문 역시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캐스팅에 납득하는 반응이었다. 이미지가 놀라울 정도로 잘 맞는다며, 덕분에 투자사 쪽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지.
“그, 두세 명 말고는 거의 그대로 될 것 같아. 뭔가 잘 풀리려는지 일사천리네.”
“다행입니다. 그러면 두세 자리 정도는 비어 있는 거네요? 작가가 똥고집이라던데 어찌 잘 넘어가셨습니다.”
“말도 마라. 우리 직원들이 고생했지. 차선책 배우 명단 받아왔고, 그것도 안 되면 본인 참가로 오디션 열기로 했다.”
처음엔 강경하더니만, 그래도 뭔가 진행되니 한발 물러섰더라. 글쟁이의 꿈 아닌가. 영상화로 대중 앞에 내보이는 것이.
“근데 왜 자꾸 그런 걸 물어?”
“이번에 신인배우가 들어왔거든요.”
“오호! 신인? 빅윈에? 이게 무슨 소리야?”
“하무영이라고, 얘가 작품 보는 눈이 있지 뭡니까. [역병> 대본 보고서는 꼭 좀 하고 싶다고 사정사정을. 아 참. [문샷> 골수팬이랍니다.”
“신인이라며? 나이가 몇인데 [문샷>을 알아?”
“이제 대학생 새내기죠. 그래서 그런데 혹시 자리 한번 마련해 주시면…….”
“흐음.”
몽네뜨 사장은 팔짱을 끼며 머리를 굴렸다. 공석으로 뚝 떨어진 두세 자리는 스토리상 꽤 중요한 역할이었다.
“스무 살, 스무 살짜리 신인이 할만한 배역은 지금 없는데.”
“루이 역도 정해졌습니까?”
“루이? 저기, 실링의 이히준. 그쪽은 거의 픽스야. 스케줄 조정이 제일 먼저 끝났거든. 진경문 감독님이랑 미팅이 남아 있긴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데 깨질 일이 있겠는가.
몽네뜨 사장은 젓가락을 집으며 아쉬운 투로 말했다.
“단역까지는 무리 없는데, 글쎄다. 배역이 영.”
“저기, 형님. 그러지 마시고 진경문 감독님이랑 그 작가님 이렇게 해서 미팅 한 번만 잡아주십시오.”
오랜만에 들어온 신인배우였다. 그것도 좋은 기회 다 걷어차고 빅윈을 선택한 것 아닌가. 전적으로 자신을 믿고서!
그가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라 하니, 기회라도 쥐여주고 싶은 소속사 사장의 마음이 간절했다.
“애가 연기 하나 기가 막히게 합니다.”
“참나. 스무 살이라며. 해봤자지.”
“아니요. 이거 보면 진짜 입이 떡 벌어지는데, 막막! 마스크도 굉장하고요.”
“하하! 자네 어찌 나이가 들수록 더 소녀 같아져? 그 말대로라면 아주 빅윈의 복덩이겠구먼? 응?”
“그렇죠. 복덩이죠!”
몽네뜨 사장은 회를 한 점 집어 먹더니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서로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런 밥 얻어먹으며 매몰차게 끊어내는 것도 좀 그렇지.
“미팅 자리라고는 차마 말 못 하겠고.”
쌀알같이 작은 기회, 한번 던져주는 것쯤이야. 비중 있는 건 무리지만, 말했듯이 단역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얼굴이나 한번 비춰봐. 조만간 아옥 작가랑 감독님이랑 배우들 모이거든. 장소랑 시간 보내주마.”
“감사합니다!”
“이제 일 얘기 그만하자. 제수씨는? 잘 지내?”
“그럼요. 잘 있다마다요.”
“5년 전인가? 마지막으로 본 게.”
그 작은 쌀알이 어디까지 불어날지는, 배우에게 달려있겠지. 몽네뜨 사장과 나금동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돌려댔다.
“나 잠시 화장실 좀.”
“예. 다녀오십시오.”
그리고 몽네뜨 사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금동은 술기운에 취해 어질거리는 정신을 붙잡으며 문자 보냈다.
[무ㅜ영이 약속 잡았따!@] [미팅이요?] [아니. 그냥 지나가다다 보래.] [아. 알겠습니다. 그게 어딥니까. 수고하셨어요. 사장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옼케!]나금동에게 연락을 받은 고경민. 역시 바로 무영에게 전화해서 소식을 전했다.
“응. 무영아. 바쁘니?”
-아니요. 말씀하세요.
목소리가 왜 이렇지?
평소와 달리 착 가라앉은 톤. 마치 우울감에 푹 절은 신문지 같다. 고경민은 혹시 전화를 잘못 걸었나 싶어 화면을 확인했다.
“……방금 사장님한테 연락 왔는데, [역병> 미팅이 곧 있나 봐. 배역들이 거의 정해진 터라 캐스팅 논의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일단 가서 얼굴도장이라도 찍는 게 중요하니까.”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준비해 둘 거 있으면 해두고.”
-음…….
무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머리하러 가야겠네요. 갈색으로 염색하고, 파마하려고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