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298)
신인인데 천만배우 298화
오타쿠 가드
서울의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옥상.
수나는 목욕 의자에 쪼그려 앉아 맥주를 홀짝거렸다.
더럽고 구질구질한 동네지만, 이런 풍경만큼은 정말이지 훌륭한 안주였다.
수나는 찬바람에 복잡한 마음이 비워지기만을 바랐다.
보름달이 밝다 못해 밤하늘 가득했다.
스윽.
“수나야. 여기서 뭐 해?”
옥상으로 올라온 고양이가 그녀를 불렀다.
수나의 얼굴이 붉었다. 술기운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추워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고양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는 것뿐.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수나는 대답이 없었다.
기분이 착잡했다. 교내장학금으로 프랑스 교환학생으로 선발된 날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성실히 준비했던 것인데, 막상 합격했음에도 생각만큼 기쁘지 않았다.
아마, 저 망할 놈의 고양이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나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게 있어.”
“응. 뭔데?”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는 거. 신입생 때 학교에서 매년 졸업예정자 대상으로 선발한다는 정보 듣고, 지금까지 준비해 왔어. 학비랑 기숙사비가 나오니까 나는 생활비만 준비하면 됐거든.”
“와. 진짜? 근데 프랑스가 어딘데?”
“있어. 저어기 멀리 비행기 타고 오래 가야 해.”
“근데 왜? 무슨 문제 있어?”
“문제? 있지.”
바로 너.
막상 이곳을 정리하고 갈 생각하니까 꼭 고양이를 버리고 가는 기분이었다.
나만 따르고, 나를 가족으로 여겨주는 고양이를 내버려 둔 채 세상 밖으로 나가는 기분이라고.
차라리 진짜 고양이면 데리고 가는 방법이라도 찾지, 이 멀대같이 잘생긴 놈은 저 좋다는 말밖에 못 하고, 프랑스가 어디 붙어 있는지나 묻고 있었다.
수나가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물었다.
“같이 갈래?”
“같이?”
신원 미상자. 그것이 바로 지금, 인간의 몸을 얻은 고양이의 현실이었다.
고양이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안 될 것 같은데.”
“나도 안 될 것 같아. 나는, 나는 꼭 갈거야.”
너를 향한 애틋함이 미래를 막을 순 없다며, 수나는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이제 여기서 그만하자는 말만 남았다.
연애인지 아닌지 뭔지 모를 애매모호한 관계는 여기까지다.
고양이는 팔짱을 낀 채 열심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얼마나 걸려? 오래 걸려?”
“모르겠어. 자리 잡으면 그곳에서 살려고.”
“음…….”
새삼 충격 받았나 보다.
하지만 고양이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화사하게 웃으며 수나의 손을 맞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따뜻해서, 수나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알겠어. 잘 다녀와.”
“다시 안 올 것 같아. 온다 해도 우리 다시 못 만나.”
“왜? 난 너 찾을 수 있는데. 우리는 앞으로 천년만년 같이 지낼 거야. 그중 지금이 첫 번째니까, 첫 번째 꿈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아주 기뻐. 물론! 굉장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좋아.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쪽.
고양이는 수나의 손바닥을 가져와 입 맞췄다.
이 망할 남정네. 죽어도 같이 가겠다는 말은 안 하네.
한다고 해도 난감했겠지만, 수나가 생각하기에 이별은 곧 그들 사이의 종점을 의미했다.
“천년만년 웃겨.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나 아직 여덟 번 남았거든. 대신에 약속 하나만 해줘. 다음에는 꼭 나와 계속 있어주겠다고. 다음에 만나면 어디 가지 말고 나만 좋아해 줄 거라고.”
“뭔 소리야…….”
“이번은 나도 첫 번째 인생이라 준비한 게 없어. 다음에는 이름이랑 나이랑 주소도 가져올게. 돈도 많이 모아놓을게. 그리고 수나가 어디 간다고 하면 어디든 따라갈 수 있게 할게.”
손바닥이 간질간질했다.
수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자, 고양이는 입술로 눈물을 찍었다.
눈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것이 수나의 입까지 닿았다.
쪽쪽.
“좋아해 수나야. 난 네가 너무 좋아.”
“……시끄러워.”
“우리 다시 만나면, 나 불러줄 이름을 지어줘. 고양이, 고양이 말고 다른 이름.”
“남자 이름?”
“응.”
어차피 못 만날 건데.
수나는 고양이의 볼을 양손으로 잡은 다음 중얼거렸다.
“우진. 이우진.”
싸구려 맥주 맛.
그것이 수나가 기억하는 자신의 첫 연애였다. 이상하고 이상한 남자와 보름달.
수나는 얼마 안 가 프랑스로 향했고, 말했듯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달동네를 지키던 고양이는 재개발을 버티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호박색 눈에 인간을 사랑했던 고양이는…….
애오옹-
“깜짝이야.”
시간이 아주, 아주 많이 흘렀다.
평범한 집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여자의 이름은 하연.
퇴근하던 하연은 집 앞에 서 있는 인영을 보고 멈칫거렸다. 낯선 남자였다.
“누, 누구세요?”
생긴 것도, 차려입은 것도 멀끔하니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왜 여기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하연의 부름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에 기쁨과 환희가 그대로 물들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우호적인 반응에, 하연이 괜히 민망해졌다.
“……수나다.”
“수나요? 집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아니요. 잘 찾아왔습니다. 저는…….”
남자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주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린 순간인가.
“이우진이라고 합니다.”
“아. 네.”
하연은 저도 모르게 명함을 두 손으로 받으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고양이와 수나의 두 번째 연애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오케이. 컷!”
“네. 좋습니다!”
“와. 너무 좋았어요. 두 사람 다 고생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체크 한 번만 할게요. 기다려 주세요.”
무영이와 솔예인은 담요를 함께 뒤집어쓰고서 마주 봤다.
솔예인은 애틋한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지, 계속해서 눈물을 훌쩍였다.
“선배님. 고생 많으셨어요.”
“네. 무영 씨도요. 진짜 감사했습니다.”
“저희 아직 끝 아닌데용? 하하. 중간에 추가 촬영 많이 남았어요!”
대본이 이미 다 나와 있는 상태라, 현장 상황에 쉽게 대응할 수 있게끔 촬영 순서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렇게 울고 불며 헤어지는 장면을 찍어도, 내일이면 알콩달콩 깨 볶는 장면에 들어갈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을 찍긴 했잖아요. 개인적으로 수나의 첫 번째 인생에도 고양이가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고양이 탓이죠, 뭐. 누가 그렇게 준비성 없이 구애하래!”
“하하.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이제 두 번째 인생부터는 얄짤없어요. 수나 어디 못 가고 천년만년 고양이랑 살아야 해요.”
무영이의 위로에 솔예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화면을 확인한 감독의 최종 사인 역시 떨어졌다.
“오케이! 이걸로 갈게요. 고생들 했어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정리하면 되겠네. 감독님! 여기 세트장 다음 타임이 어디라고요?”
“[CSP특별활동대>”
“아아. 알겠습니다.”
확실히 스타일리스트가 했던 말이 오버는 아니었다.
찍으면 찍는 대로, 원하던 연출이 척척 나오니 현장의 분위기와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촬영이 끝날 때 이렇게 에너지가 도는 것도 처음본다.
무영이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며 분장실로 돌아왔고, 고경민이 옷을 받아주었다.
“수고했다. 무영아.”
“아니요. 형도 수고하셨어요.”
“근데 내가 아까 임민성이랑 감독님 얘기 들으러 갔었잖아.”
무영은 일상복으로 갈아입으며 고경민의 말을 경청했다.
화장도 대충 슥슥.
“네. 무슨 일이래요?”
“자세히 들은 건 아닌데, 임민성이가 차기작 얘기를 꺼내더라고?”
“[그 대로, 고양이> 방영하지도 않았는데요?”
“소속사에서는 중국 가자고 하는데, 걔는 죽어도 가기 싫은가 봐. 그러니까 회사에는 본인이 직접 일감 물어오면 국내 활동하게 해주겠다 하는데…….”
이미지 그렇게 똥칠해놓고 어떻게 수습을 하겠는가?
시간이라도 오래 지났으면 몰라, 아직 임민성 하면 문란한 사생활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감독님 차기작도 좋고, 아니면 친한 PD들 많으니까 부탁하려는 것 같았어. 감독님은 난감하게 알았다, 알았다만 반복.”
“전화로 하지 뭐 하러 여기까지 오셨대.”
“직접 얼굴 보고 부탁해도 저런데, 전화로 씨알이나 먹히겠어? 아무튼, 딱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걱정은 무슨. 그저 스모그가 신경 쓰일 뿐이었다.
무영이 옷을 다 갈아입을 때쯤이었다.
조연출이 들어와 다음 촬영 일정을 안내했다.
똑똑.
“무영 씨. 가시기 전에 이것 좀 확인이요.”
“넵넵. 주세요. 첫 방영이 열흘 후죠?”
“네. 지금 4화까지 편집 완료했고, 순차적으로 진행될 것 같아요. 특별한 펑크 없으면 6화 전에 촬영 최종 마무리입니다.”
“으으. 무서워요. 특별한 펑크라니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스케줄 확인되셨나요?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네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무영이는 고경민과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고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솔예인은 감독과 회의할 것이 있는지, 아직 옷도 못 갈아입은 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다음에 봐요. 잘 가요.”
“무영이 잘 가~”
와. 오늘도 알찼다.
역시 현장에서 구르고 굴러야 일하는 맛이 났다.
무영이 고경민과 함께 웃고 떠들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순간이었다.
터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손이 쑥 들어왔다.
“헉. 괜찮으세요?”
“하무영.”
무영이 놀라서 ‘열림’ 버튼을 연달아 누르며 걱정했다.
하지만 남자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손만 툭툭 털며 무영이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임민성이었다. 그와 함께 스모그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잔뜩 올라왔다.
“같이 좀 내려가지?”
“네? 아. 그럼요. 타세요.”
스윽.
임민성의 날선 말투에 고경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무영이는 그저 투명인간이가 보다, 하고 멀뚱멀뚱 앞만 보고 있었다.
먼저 말을 건 건 임민성이었다.
“좋나 봐? 얼굴이 뺀질뺀질하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화장이 덜 지워졌나 봐요.”
“남 밀어내고 배역 먹으니까 배불러서 그러지.”
“음…….”
밀어낸 게 아니라 자기가 고꾸라진거면서.
무영이는 대답하는 척하면서 그냥 무시해 버렸다. 곧 있으면 지하 주차장에 도착이다.
“야. 무시하냐?”
“아. 대답 고르고 있었어요.”
“네가 유사하 대표 꼬드겨서 그 지랄 쳐놓은 거잖아. X발 내가 언제까지고 모를 줄 알았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기, 임민성 씨. 혹시 술 드신 건 아니죠? 말씀이 거치십니다.”
“매니저 X밥은 꺼져. X발.”
띵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하지만 아무도 내릴 생각하지 않았다.
무영이는 불쾌한 시선으로 임민성을 쳐다봤고, 그 역시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매니저 형한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과하세요.”
“무영아. 됐다. 그냥 가자.”
“사과는! 네가 해야지! 중간에서 작업 치는 바람에 사람 호구로 만들었잖아!”
콰앙!
임민성이 주먹으로 벽을 내려쳤다.
무영이는 담담하게 한숨을 쉬며 엘리베이터 천장을 힐끔거렸다.
CCTV가 떡하니 달려 있는데…….
“선배 이러다 진짜 큰일 나요.”
“지금 내가 지옥에 있는데 X신아, 큰일 나봤자지.”
“아니요. 진짜 지옥에 떨어지면 그런 말도 못 꺼내요. 너무 힘드니까.”
무영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피어오르는 스모그를 손으로 내저었다.
하지만 그걸 모욕으로 오인한 임민성이 무영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이게-!”
“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임민성의 얼굴로 날아드는 카메라 두 대.
깡!
“으앗! 무영아!”
“지금 어디서!”
“뭐 하시는 겁니까?”
매니저는 무영이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고, 한달아는 씩씩거리며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들었다.
임하늘은 무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져 부서진 카메라를 주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