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36)
신인인데 천만배우 36화
무명에서 무영으로
씨익-
유나와 무영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주었고, 아이의 눈에선 연신 꿀이 뚝뚝 떨어졌다.
“오빠. 안녕.”
“잘 지냈어? 키가 좀 큰 것 같네?”
“거-짓말!”
둘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무영은 주변에 시끄러울까 봐, 유나는 그저 무영을 따라 한 것이었지만 외부인이 보기에 참 친밀해 보였다.
“자. 그럼 다 모였으니 시작해 볼까요? 참. 시나리오 작가님은 개인 사정으로 불참입니다.”
개인적인 사정이라 쓰고 낯가림이라 읽어야 하겠지. 진경문 감독이 몽네뜨 직원들을 향해 눈짓했다. 조용하면서도 어수선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역병>의 감독을 맡은 진경문입니다. 만나게 되어 영광이고, 우리 한번 좋은 작품 만들어 봅시다. 고맙습니다!”
짝짝짝-
수장을 선두로 시작된 자기소개. 무영은 있는 힘껏 손뼉을 쳐댔다. 어디로 도나, 고민하기 무색하게 바로 오른쪽의 연출이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조감독 장민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맞은 편의 이히준.
“진 역을 맡은 이히준입니다.”
어라? 다들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도 인사 순서를 아는 듯했다. 감독과 연출팀을 제외한 배우들은 가까운 순서 오른쪽부터 시작해서 맞은편까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역시! 선배님들!’
리딩이라고 해봤자 웹드라마 한 번뿐이었던 무영은 별것 아닌 것에도 감탄했다. 저런 걸 바로 짬이라 하는구나! 오호라.
“성혜준이고, 진의 직장 상사인 애리를 맡았습니다. 잘 부탁해요-”
“효정입니다. 소라를 맡았습니다.”
찰칵- 찰칵-
직원들이 배우들의 인사를 카메라로 담았다. 비하인드씬이나 홍보영상물, 메이킹필름, 보도자료 제작 등에 쓸 자료일 것이다. 이어서 유유나의 차례.
“유유나입니다. ‘주인공’인 재니를 맡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인공에 유독 힘을 주는 유나. 아이는 방긋방긋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불을 내고 있었다. 입장 때 직원이 신경을 갉은 것도 모자라, 이 자리 배치!
“아이고. 귀여워라.”
“유나 나이가 몇 살이랬더라?”
“아홉 살이에요.”
아무리 어린다 한들 주인공이었다. 보통은 감독과 연출팀 바로 다음 자리 혹은 원로 배우의 다음이 정석적이었다.
‘어쭈? 어린 게 깜찍하네?’
‘표정 봐라. 크게 되겠다.’
근데 어려도 너무 어린 나이. 주인공에 벌써 4년 차였지만 유나는 다른 배우들에게 앞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대각선에 앉은 혜준과 소라가 서로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쪼꼬만 게 야무져.’
유나의 만만찮음을 알아챈 것이다. 아무리 연기 천재에 영악하다 한들, 아이는 아이. 산전수전 별별 일을 다 겪은 배우들이 보기에는 뻔했다. 귀여우면서도 웃기고, 혀를 차게 만드는 거지.
‘그래도 저런 깡이 필요해. 앞으로 계속해 가려면.’
연예계 생활을 오래 해본 바로, 저렇게 성깔이라도 있어야 하더라. 운, 실력 모든 게 따라줘도 본인 스스로가 버텨내지 못하면 말짱 꽝이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유나가 꾸벅 인사하자, 다른 사람들이 흐뭇한 웃음과 함께 환호했다. 이어서 무영의 차례. 그가 일어서자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되었다.
“누구?”
“신인인가 봐.”
“근데 루이 역이네?”
인지도가 있던 사람들과 달리 무영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오디션 때 봤던 이히준과 유나, 감독을 제외하면 첫만남이나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루이 역을 맡은 하무영입니다. 기라성 같은 선배님, 감독님들과 함께하게 되어 굉장히 영광입니다. 잘하겠습니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열정이 뿜뿜. 적극적인 자세가 딱 신인의 것이었다. 혜준이 우아하게 박수 치며 그를 훑었다. 얼굴 좋고, 자세 좋고, 목소리 좋아. 귀엽네.
“언니.”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효정이 넌지시 주의시켰다. 화려한 남성 편력은 이미 알 사람 다 아는 사실. 혜준이 눈만 찡긋거리며 알았다는 듯 웃었다.
“지도 편달은 무슨. 실력 좋으시잖아요.”
그때 이히준이 끼어들었다. 배역을 한 번에, 그날 따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만약 그가 진 역으로 딜을 보지 않았다면…….
‘개쪽당했을 수도 있겠네.’
헛웃음과 함께 별 의미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건만, 효정이 말을 덧붙였다.
“감독님 선택이니 기대가 됩니다. 개인의 매력이 참 중요하잖아요. 어떻게 루이를 잡았는지 궁금하네요.”
개인의 매력!
효정은 그 말을 하며 히준을 힐끔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녀는 안다.
실링액터스가 뒤에서 얼마나 조잡하게 일을 해댔는지. 투자사까지 끼어서 그를 진 역으로 돌리게 하지 않았던가.
‘뭘 봐?’
‘꼬우면 꺼져.’
덕분에 원래 내정되어 있던 김상연 배우는 나가리. 김상연과 효정은 비밀리에 사귀는 중이었다. 남자친구와 작업하게 될 줄 알고 오케이했건만, 갑자기 이히준?
파지지직!
불꽃 튀는 신경전 사이에서 무영은 멀뚱멀뚱. 그저 웃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도저히 모르겠거든.
“그럼 전 이만 앉아도 될까요?”
그의 요청에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신 땀을 닦아대는 탓에 손수건은 축축해진 지 오래다. 이거 원. 캐스팅이랑 투자가 순조롭다 했더니…….
‘엄청난 애들만 모였네.’
사전 조사에서 서로 불편한 사이는 없는 거로 확인했다. 아무리 작품 따라간다지만, 사람끼리 하는 일이다 보니 관계라는 것도 중요했거든.
‘개성들이 아주, 어휴. 허허.’
감독은 항상 이럴 때가 난감했다. 촬영만 들어가면 거기에 집중하고, 배우들끼리도 친밀감이 형성되는데…….
‘뭐든 처음이 어렵고 힘들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배우들의 인사를 지켜봤다. 테이블 없이 의자에만 앉아 있던 무명배우들 역시 빼놓지 않았다.
“자! 그럼 리딩 가볼까요?”
사람 수가 많으니 인사하는 데만 십여 분이 넘게 걸렸다. 감독의 말에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분주하게 들렸다.
“예상 시간은 여섯 시간 정도 걸릴 것 같고, 뒤쪽에 앉아 계신 분들은 중간에 가셔도 좋습니다. 한번 돌린 후에 카메라테스트 겸 주요 씬들 포인트 잡겠습니다.”
돌려 말한 것이었다. 뒤쪽 시간은 주조연들만 필요하다는 뜻. 감독은 먼저 작품의 의도와 자신이 살리고 싶은 방향성, 상징 따위로 운을 떼었다.
“-해서 시작하죠. 1씬 갑시다. 히준 씨. 준비됐죠? 혜준 씨 내레이션 넣어주세요.”
“네.”
이히준은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역병>의 첫 대사를 읊었다. FG 제약회사 직원으로서 공장관리직으로 좌천당한 첫날부터 시작하는 장면이다.
“음. 공기 한번 X나 구리군.”
“진. 이번엔 선을 넘었어.”
“거지 같은 냄새가 진동을 해.”
“너 같은 애들이 횡령하고 월급 미리 댕겨 썼다 할 놈이야. 알아? 당장은 커버는 못 쳐준다. 내려가서 자리 잡고 있어.”
무영은 내레이션을 치는 혜준과 혼자 독백하는 히준을 지켜봤다. 역시 현역은 다르다. 나금동과 고경민, 원장 선생님 등 연기하는 어른을 만나 봤지만, 이런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으이. X발. 알겠다. 알겠어. 내가 간다!”
후우, 담배를 비벼 끈다는 지문에 맞게 이히준이 숨을 길게 뱉었다. 이미지와 달리 연기는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진득했다.
진짜 배우들.
무영은 그 단어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흠이 없어.’
엔빈처럼 무영이 조언해 줄 만한 거리가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빨려 들어가듯 그들에게서 눈을 못 떼는 수준이다.
‘대-박!’
무영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제대로 된 프로들 사이에서 연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확 체감되는 순간.
‘오빠. 괜찮아?’
유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무영의 손등을 두드렸다.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웃어 보이는 무영. 그저 설렜을 뿐이다.
‘분명 좋은 자극이 될 거야.’
성장하기 위해선 더 높은 곳을 노려야 하는 법. 실전 중의 실전이니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실력이 늘어날 것이다. 무영은 집중하며 대본을 눈으로 좇았다.
“오케이. 좋습니다. 좋은데, 방금 마지막 대사는 좀 더 담담하게 해주세요. 과잉되지 않게끔.”
“눌러서요? 다시 해볼까요?”
“네. 글자를 누른다는 느낌으로. 뭔지 알죠?”
게다가 실시간으로 오고 가는 피드백. 무영은 자신의 배역이 아님에도 불구, 모든 것을 적어댔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피와 살이 될 거라는 생각에.
“-자, 다음은 16씬.”
그리고 드디어 유나와 무영, 히준이 함께 호흡을 맞추는 첫 장면이다. 폐쇄된 구역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뭐야?”
히준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두려움에 찬 재니가 반사적으로 무영의 손을 붙잡았다. 감독과 다른 배우들이 그걸 알아챘다.
“문이 닫혔어요. 아저씨.”
“혼자야?”
“나, 나가야 하는데…… 제가요. 여기 들어오려고 한 게 아니거든요. 실수였어요.”
목소리와 함께 고사리 같은 손이 달달 떨렸다. 그걸 보던 혜준이 소리 없는 감탄을 터뜨렸다. 애가, 진짜 수준급이잖아? 흔히 떠오르는 일관적인 아역의 연기가 아니었으니.
“혼자라 이 말이지?”
히준이 비열하게 웃으며 유나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재니의 손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시간에 혼자, 보호자 없이 돌아다니는 아이. 그것도 손목에 실금이 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리 와.”
사회에서 버려진 거다. 당장 사라져도 문제없을 그런 존재. 재니가 멈칫거렸다.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콰앙!
“이리 오라고!”
히준이 책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움찔, 몰입한 유나가 절로 몸을 움츠렸다. 눈망울에 맺히는 물기가 연기인 걸 알면서도, 무영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X발!”
“……!”
속된 소리를 들은 유나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부드럽게 치던 대사가 끊어지고, 고장 난 기계처럼 멈추었다. 연기와 감정 모두.
“보호자 모셔와요.”
“네. 감독님.”
그걸 지켜보던 감독이 직원에게 지시했다. 청소년관람 불가에 하드한 영화였다. 다소 걱정되는 면이 있어도 ‘유나’지 않은가. 전작도 비슷한 느낌의 작품인 데다 워낙 똘똘해서 잘해낼 것 같았는데.
‘그래도 아직 어리니까.’
달래가며 천천히 부드럽게 해야지. 유나에게 괜찮냐고, 모두 연기라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순간.
“……?”
“……!”
스윽.
무영이 주머니에서 작은 초콜릿을 꺼냈다. 그리고 유나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아이의 시선을 가져왔다.
“아-”
무영은, 아니, 루이는 작게 입을 벌렸다. 그걸 자신도 모르게 따라 하는 재니. 아이의 입으로 다디단 초콜릿이 쏙 들어갔다.
“재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아…….”
“재니를 아세요? 아는 아저씨야?”
무영은 자연스럽게 아이의 손을 맞잡고 다음 대사를 이어갔다. 정신이 쏙 빠져 있던 유나가 대답했다.
“아니.”
멈췄던 모든 게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고작 ‘아니’라는 대답으로 인해, 유나는 다시금 재니가 되었고 그의 옆에는 어느새 루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자. 저쪽에 사람들 모여서 얘기하고 있더라.”
그리고 가볍게 히준을 응시했다.
텅 비어버린 눈동자. 담담함 속에서 일렁이는 경고가 짙었다. 아이를 건드리지 말라는 무언의 방어. 루이로서 무영과 마주한 히준은 그저 눈만 깜빡였다.
“……히준 씨? 대사.”
“아. 네네. 죄송합니다. 크흠. 뭐야, 저건? 개새끼도 아니고.”
감독의 말에 그가 정신을 차리고 뒷마무리를 했다. 유나는 맑은 눈으로 무영을 쳐다봤다. 아니, 사실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방금 뭐지?’
‘상대 배역 쳐주는 건 어지간한 경력도 힘든데.’
‘하! 고놈 눈빛 미쳤네. 대사 없이 어떻게 눈으로만 그렇게 한담?’
‘알겠다. 왜 쟤가 루이인지.’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대본에 집중하는 무영.
배우들이 그의 옆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아주 짧았지만, 깊이를 보여준 것이다.
‘몰입이 깨진 상대도 다시 붙잡아 올 만큼의 집중력. 그리고 인물 그 자체의 눈빛.’
그저 무명의 배우에서 무영이라는 배우로 인식되는 순간.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유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맛있지?”
너를 위해 아주 많이 사 왔다며, 볼록한 주머니를 톡톡 두드린 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