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44)
신인인데 천만배우 44화
최고의 죽음
이택경은 촬영 내내 세트장과 현장 분위기를 체크했다. 실로 오랜만에 돌아온 곳인지라, 눈과 손으로 모든 감각을 되살려야 했거든.
‘무뎌졌네.’
하지만 문제는 연출의 의도를 캐치하는 센스. 지식으로 습득했던 것들은 머릿속에 남아 있었으나, 진경문 감독이 요구한 조명 기술들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마 오래 떠나 있던 자신의 문제일 것이다.
“왜 그래요?”
“아니요. 감독님. 이 부분은 스쿠프(Scoop-빛을 넓게 반사하는 조명기) 이용하는 게 맞아요? 몹(Mob-군중)씬이라 굳이 안 해도 되지 않나요?”
“거기. 근데 시점이 재니가 공장 옥상에서 보는 거라 렌즈 비침이 있었으면 좋겠거든요. 왜 우리 [호르몬 기생> 했을 때 장수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앉아 있을 때처럼.”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경문과의 대화가 아예 막히지 않는다는 것. 이택경은 수북한 수염을 매만지며 버겁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그걸 본 진경문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 겁니다. 감독님. 전 걱정 하나도 안 돼요! 우리 합 좋았잖아요.”
“예. 그렇죠.”
“오늘 현장 둘러보시고, 끝나면 소주나 한잔합시다. 원래 콘티 읽을 때는 술이 있어야 해. 그래야 술술 넘어가지. 지금 너무 해가 쨍쨍해서 그런 거예요. 하하.”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과장하며 웃는 진경문. 조감독이 간이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감독님. 촬영 준비 끝났습니다.”
“아? 그래? 오케이! 가보자고!”
“감독님. 그럼 전 일단 혼자서…….”
“예예. 그러세요. 촬영 마무리되면 정식으로 인사합시다. 아까 효정이는 봤죠?”
이택경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진경문은 편하게,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고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사무실. 이미 집에서 몇 번이나 봤던 콘티지만, 이택경은 다시 한번 앞부분을 펼쳤다.
차락-
5년 만에 돌아온 곳. 하루가 멀다고 빠르게 변하는 이곳에서,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까. 돈 때문에 떠난 곳인데 다시 돈 때문에 돌아오다니.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 많고 많은 조명 감독 중, 진경문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필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생각났다’라는 답변만 들었으니.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이나, 이택경은 앉은 자리에서 콘티를 머리에 박아넣었다. 그런데-
‘69번 씬…….’
이상하게 한 장면이 손에 걸렸다. 재니의 유일한 조력자이자 친구인 루이가 맞아 죽는 씬이었다. 바로 진의 무리에 의해.
“흐음.”
모르는 신인 배우던데, 과연 누구일까.
진경문이 준 콘티에는 페이드 아웃으로 점점 어둡게 처리한다는 편집 지시만 적혀 있었다. 조명 지시는 특별한 게 없다.
대엥- 땡!
“아니, 지금 안 아프게 생겼냐고?”
“아이참. 좀 참아봐요. 삼촌!”
그때, 밖에서 들리는 소란.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연기톤이 아닌 생목소리가 현장을 찔러대는 것 같았다.
끼익.
이택경은 호기심에 사무실을 나섰다. 스태프들 모두 난색에 세트장에서는 어린애와 성인이 이를 드러내고 있는 중.
“무슨 일이에요?”
“합이 좀 안 맞나 봐요.”
오호. 쟤가 유유나고 이히준이구나. 둘 다 실물이 훨씬 낫네. 익숙한 둘을 거쳐 그 옆의 남자를 보는 순간.
쿵.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상상했던 그 루이와 아주 흡사한 외모. 히준과 유나를 보며 살짝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대본 속 루이였다.
“감독님?”
“저기, 루이 역 배우 이름이 뭐라고 했죠?”
“무영이요? 하무영이에요.”
이번 캐스팅 대박이네. 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이택경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상상 속 인물이 현실로 나타나자, 머릿속에선 감히 떠올리지 못했던 영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잠깐! 자꾸 그러지 말고, 합대로만 갑시다. 합대로.”
수면 아래 잠겨 있던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처럼, 천천히. 하지만 아주 확실하게. 이택경은 대본으로 봤던 모든 장면에 무영을 대입함으로써 생생한 콘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아우. 정말, 둘이 왜 저래?”
진 빠지는 진경문의 목소리.
잠시 쉬는 시간을 선언하고 도망치듯 사무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가 이택경을 발견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저기, 감독님.”
그리고 특히나 또렷하게 상상되는 한 장면.
“69번 씬이요. 건의할 게 있어요.”
“69번? 아아. 네. 아마 루이 죽는 씬이었나?”
진경문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저렇게 눈이 반짝이는 것인가. 아까까지만 해도 풀이 팍 죽어서 시름시름 앓던 사람이?
“네. 말씀하세요.”
“그 장면, 아이 라이트 쏘면 안 되나요?”
* * *
“아이 라이트요?”
무영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볼펜 모양의 작은 조명, 아이 라이트. 말 그대로 피사체의 눈을 빛나게 강조하는 조명이었다.
“근데 맞아 죽는 장면이라 조명 쏠 틈이 없을 텐데요?”
무영은 의아하게 대답하며 다시 대본을 확인했다.
진의 무리에게 밟히는 것이 앵글에 잡히고, 널브러진 그를 뒤로 무리가 사라지는 게 본 디렉팅이었다.
“앵글을 반대로 잡기로 했어요. 루이 포커싱으로.”
“어라? 왜요?”
물론 본인을 중심으로 잡아주면 좋다. 좋은데, 이건 드라마나 예능이 아니라 영화잖아.
한 씬마다 완벽하게 계산된 합의가 있어야 했다. 갑자기 앵글을 바꾸면 바꾸는 대로 이유가 있어야 할 터.
“재니에게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인데 아웃 포커싱보단 확실하게 잡고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고, 특히 죽어갈 때 루이의 안타까움을 표현하려면 눈을, 얼굴을 중점으로 잡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하. 그렇군요.”
“자세한 콘티는 진경문 감독님이 다시 짜서 알려줄 겁니다. 무영 씨는 연기만 잘하면 돼요.”
무덤덤하게 말하는 듯싶었지만, 이택경은 살짝 흥분해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영감(靈感).
척하면 척인지라, 진경문 역시 찰떡처럼 알아듣고선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었더라.
-그거 괜찮네요. 연출팀이랑 상의해 보고 수정하죠. 아 근데 그거 괜찮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해 주던 게, 느낌이 좋다. 무영은 볼펜으로 대본에 코멘트를 적으며 말했다.
“그런데 감독님. 말 편하게 하세요.”
“……아무튼, 잘 부탁해요.”
“네! 저도요!”
“유나도 잘 부탁합니다아-”
배우들과 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이택경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군. 무영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볼펜을 잘근거렸다.
‘저 감독님이 몰고 온 건가?’
생각해 보면 모든 게 척척 맞아떨어졌다.
조명 사건으로 감독님이 대체되면서, 새로 온 분이 반짝이를 또 달고 있으니. 마치 저 사람을 위해 모든 게 진행된 것 같았다.
“오빠. 왜 그래?”
“응? 아니. 바뀐 부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어.”
“자. 그럼 다시 돌아와서, 스케줄 확인 먼저 할게요.”
조감독은 대본으로 제 손바닥을 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공장 세트가 완공된다니, 이제 진짜 제대로 빡센 촬영 시작이다. 유나는 그렇다 쳐도 성인들은 밤샘이 기본이겠지.
“어? 저는 두 달 뒤에 드라마 로케 잡혀 있는데요.”
“매니저분이 아직 확정 아니라 해서 잡았는데.”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까 빼주셔야죠.”
“유나는 개학하면 출석 일수 맞춰야 하거든요.”
다들 매니저와 함께 일정을 조율했다. 바쁜 사람들인지라 한 번 짰던 것도 다시 잡음을 일으켰다. 오직 무영과 고경민만 멀뚱멀뚱, 지켜볼 뿐.
“오빠는 괜찮아? 왜 가만히 있어?”
“응. 난 이미 다 잘 빼주셨어.”
기말고사 기간만 제외해달라는 부탁이니. 뭐 신경 쓸 것도 없지. 그 이후에는 방학이라 더더욱 여유 있었다.
효정은 뭔가 자꾸 거슬리는지, 손끝으로 볼을 살살 긁어댔다.
“오늘따라 얼굴이 왜 이렇게 간지러워.”
“나 봐봐. 먼지는 안 묻었는데.”
매니저가 그녀의 얼굴을 봐줬지만, 별다른 건 없나 보다. 효정은 됐다는 듯 몸을 돌리며 조감독에게 요구했다.
“아무튼, 그 기간 빼주세요. 로케랑 겹치면 그때 가서 진짜 곤란하니까.”
“음. 네. 알겠습니다. 확인 후 다시 보낼게요.”
“오늘 추가 촬영은요?”
“효정 씨만 있어요.”
“……제일 먼저 와서 제일 늦게 가게 생겼네.”
간단한 회의가 끝나고, 효정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퇴근할 준비를 했다.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무영에게 손을 흔드는 유나.
“오빠. 그럼 우리 다음에 봐.”
“그래. 날씨 더워지니까 조심하고.”
“히준 삼촌은 내일 봅시다? 뿅!”
“……뿅 같은 소리.”
질색하며 혀를 끌끌 차는 이히준. 꾸벅 인사하는 무영과 달리 눈짓만 주고 나가 버렸다. 무영은 생글생글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형. 우리는 가서 밥이나 먹을까요?”
“그래. 가서 인사 싹 하고 와. 차 빼놓고 있을게.”
“네. 알겠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스태프들은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들어주었고, 효정은 간이 의자에 앉아 생긋 웃기만 했다.
하나, 이상하게 계속 간지러운 얼굴. 화장하고 자서 그런가, 뾰루지가 올라오는 것 같다.
“오빠! 거울 좀 줘봐.”
그러는 사이, 무영은 인사차 촬영장 한 바퀴 싹 돌고 칼퇴근을 했더라.
* * *
무영과 매니저가 빅윈 엔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어둑해진 상태였다.
감자탕으로 배를 빵빵하게 채운 무영이 행복한 표정으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
“저 왔어요!”
“오. 무영이. 오늘도 파이팅 했어?”
“네. 당연하죠. 사장님은 오늘도 집 안 가세요?”
“……일이 바빠서 말이야. 크흠.”
진짜? 무영은 상당히 조용한 사무실을 빙 둘러보며 웃기만 했다.
“근데 넌 왜 기숙사 안 가고?”
“책을 두고 가서요. 밑에 매니저 형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나가야 해요.”
“아. 그르냐? 아차차! 잠깐!”
나금동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무영을 붙잡았다. 그리고 잡다하게 쌓인 상자들 틈을 헤집으며 뭔가를 찾아댔다.
“왜요?”
“선물이 왔어요. 선물이…… 여기 있다!”
그가 꺼낸 것은 닥터 마텔에서 보내온 패키지였다. 스킨과 로션부터 시작해서 새로 개시한 핸드크림까지. 빈 곳 없이 꽉꽉, 알찬 구성품들이다.
“어? 이거?”
“그때 회신 넣었잖아. 근데 그쪽에선 자신 있나 봐? 얼마든지 솔직하게 써도 된다면서 꼭 좀 부탁하더라고. 대신에 단가는 조금 낮춰서.”
“오호! 대박이다.”
“한 달 안에만 해서 보내주면 되니까, 천천히 써보고 고실장이나 나한테 알려줘. 한번 점검하고 같이 피드 올리게. 오케이?”
첫 협찬인 것도 좋은데, 공짜 스킨과 로션이라니! 무영은 박스를 소중하게 껴안고 알겠노라 답했다.
“당장 오늘부터 써봐야겠네요.”
“으이. 하고 남으면 나도 좀 줘봐. 천연 성분 뭐시기라서 그렇게 좋단다.”
“네. 사장님. 저 그럼 가볼게요!”
“오냐. 오늘도 수고했다!”
무영은 눈을 찡긋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