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kie but One-in-a-Million Actor RAW novel - Chapter (82)
신인인데 천만배우 82화
다큐멘터리
“안녕하세요.”
흰 벽을 배경으로 하고 앉은 무영.
그는 카메라를 향해 꾸벅 인사하며 웃었다.
“신인배우 하무영입니다.”
이렇게 자기소개 하는 건 한밤포차 지원 영상 찍을 때 말고는 처음인 것 같다.
무영은 머쓱하게 소매만 만지작거리며 제작진을 쳐다봤다.
이유진 피디를 비롯한 메인 피디, 작가, 카메라맨 등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으니.
“데뷔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작가가 앞에 쪼그려 앉아 질문을 던졌다. 영상에서는 모두 편집되어 자막으로 처리될 것이다.
무영은 그들이 알려준 대로 2초간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그 짧은 공백이 편집점이 될 것이다.
“영화는 개봉을 앞두고 있고, 드라마도 촬영 개시가 안 되어서요. 사실상 데뷔도 못 한 병아리죠. 연기한 지도 얼마 안 됐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인터뷰. 고경민은 문 앞에 서서 시계를 확인했다. 리딩과 맞물린 다큐멘터리. 여기서 영상을 조금 딴 다음 바로 옆 방으로 이동해서 리딩을 진행하게 된다.
‘타이트하구먼.’
그래도 같은 S사에, 피디가 겹치니 다행이지. 동선이나 스케줄 짜는 데 있어 융통성이 많으니까.
“-맨 처음 연기를 시작한 건 별다른 일이 아니었어요. 고3. 정말 힘든 시기잖아요. 이대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지더라고요.”
무영은 질문을 보고 미리 준비한 대답을 줄줄 읊어댔다. 이것도 하나의 ‘쇼’라고 생각하니까, 별로 어렵지는 않다.
“피디님. 시간이 다 됐는데요.”
“그래요? 이동합시다.”
“조명 그대로 들고 와요.”
다만 조금 부담스러운 건, 카메라가 꺼지지 않는다는 것. 무영은 화들짝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이대로 바로 이동하시나요?”
“바로 옆이니까요. 움직이시죠.”
“앗. 넵.”
어색어색. 무영은 엉거주춤 일어나 카메라 앞을 앞장섰다. 이미 대다수 배우는 미리 도착해 앉아 있는 상태. 공식 리딩 일정이었기에, 다큐멘터리 쪽뿐만 아니라 기자와 제작사 쪽 스틸팀도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역시 아이돌들. 아침부터 샤방샤방하니, 세팅이 완벽하다. 그들은 방긋 미소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이 안내해 준 자리에 앉자, 시선 집중. 무영의 목과 귀가 시뻘게졌다.
이거 너무 부끄럽고 민망하네. 촬영할 때는 카메라 온·오프가 확실해서 괜찮았는데, 이건 뭐 길 잃은 강아지처럼 쫄쫄쫄 따라붙으니.
“창사 기념 다큐 맞죠?”
옆자리에 앉은 송아가 무영을 향해 속닥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카메라를 향해 얼굴 각도를 고정하는 건 잊지 않는다.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붙어 있을 거래요.”
“와. 대박이다. 나 ‘연인부부’ 했었을 때랑 똑같네.”
가상연애 시뮬레이션 예능을 말하는 거다. 거기도 거의 24시간 밀착형으로 돌려댔는데. 무영은 턱을 괸 채 괜히 대본만 뒤적거렸다.
“자. 다들 오신 것 같으니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그 전에 앞서 오늘 다큐멘터리 촬영도 있는데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고요. 연출을 맡은 이유진 피디입니다.”
그녀의 인사로 시작된 리딩. 역시 조연출을 비롯해 주요 제작진들이 인사하고, 배우 중에서는 무영이 제일 먼저 포문을 떼었다.
“메릴켈린 리더 임도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역병>에서는 돌고 돌아 거의 마지막에 인사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런데 고작 몇 개월 만에 주연 자리를 꿰차고 있다니. 격세지감이라는 게 이런 느낌이구먼.“미란이 송아입니다.”
“인어왕자 로민입니다!”
주연을 비롯해 다른 조연들도 한 자리에서 이름을 나눴다. 감초 같은 조연 배우로 왕성히 활동하는 중견 배우들도 다수.
“자. 그럼 시작할까요?”
촬영 시작 전, 이미 인사 한번 싹 돌렸지만 그대로 민망한 건 민망한 거다. 다큐 찍겠다고 커다란 카메라 하나가 그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1. 대학가 놀이터 앞부터 시작하죠. 송아 씨?”
“네!”
공식적인 첫 연기. 송아는 긴장했는지 손을 살짝 떨었다. 물론,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던 무영만 간신히 알아챌 정도였지만.
“으. 추워.”
수험을 망치고 가출하듯 도망친 미란이.
젊음의 놀이터라 불리는 곳에서 멀뚱멀뚱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왜들 저렇게 웃고 있을까. 다들 근심 걱정 하나 없이 행복해 보여. 나 빼고.
“그냥 지구 망했으면.”
“그렇게는 안 되지.”
그렇게 도하와 첫 만남을 갖게 된다.
한 칸씩 밀려 쓴 줄 알았던 수능 답안지가 높은 정답률을 보이면서 기적적으로 H대에 합격! 선후배 사이로 만난 둘이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사랑과 우정을 키워나가는 얘기였다.
“좋습니다. 쭉쭉, 끊지 않고 갈게요.”
피디는 만족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다들 열심히 준비했는지,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럽다. 아니, 사실 조금씩 디렉팅할 부분이 있지만…….
‘카메라가 너무 많아서.’
나중에 따로 알려줘야지 싶은 심정인 거다. 기자는 물론 이거와 다큐 촬영 카메라까지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팬덤에서 난리 나면 골치 아파.’
요즘 애들 무섭다니까. 이유진 피디는 슬그머니 웃으며 대본에 집중했다. 그런 주위를 슥 둘러보던 무영. 종이 끄트머리에 뭔가를 적어 송아에게 건넸다.
‘머리 자꾸 넘기는 거 습관이에요?’
그 메모를 보고 송아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머리를 자꾸 넘겨?
‘앉아서 하는 거라 지금은 괜찮은데, 습관이라면 고치는 게 좋겠어요. 미란이 맨날 똥머리만 하고 다니잖아요. 캐릭터랑 안 맞는 습관인 것 같아서.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전혀 몰랐다. 아무래도 무대에선 매일 머리 풀고 춤추니까 생긴 습관 같은데…….
‘아뇨. 고마워요. 혹시 다른 건 없어요?’
‘ㄹ 발음이 좀 새는 것 같아요.’
둘은 이마를 맞대고 속닥속닥.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로민이 외, 이렇게 말해주는 건 처음인지라 조심스러울 뿐이다.
“하무영 씨?”
“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이유진 피디의 호출에 깜짝 놀라는 두 사람.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여기 이 부분 대사 없이 클로즈업 갈 건데, 배경음을 완전히 없애 버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음향이 있어야 연기가 살 것 같아서. 의견 있어요?”
단조로운 리딩 현장. 다큐멘터리 메인 피디와 작가가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았다. 일단 이유진 피디 추천으로 하무영을 찍고 있긴 한데…….
“솔직히 잘생긴 거 말고는 잘 모르겠죠?”
“낙하산이 한 둘이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
그들이 원한 건 지하 단칸방에서 쥐꼬리만 한 돈으로 겨우 먹고사는 이 시대의 굶주린 신인 예술가들이었다.
하무영 역시 어딘가에 얹혀살고 있다고 하지만, 겉으로만 봤을 땐 너무 탄탄대로 인생 아닌가.
“시작부터 진경문 감독 작품 찍어. 바로 공중파 드라마 주연 맡지. 저기까지 가려고 인생 내다 버린 사람들이 한둘도 아닌데 말이죠.”
“운도 실력이라면 실력일 거다.”
“실력 없는 운은 그냥 요행이고요.”
작가와 피디가 속삭이며 잡담을 하는 와중, 무영은 이유진의 요청을 받고 대본을 주의 깊게 뜯어봤다.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친 도하. 환희와 기쁨에 찬 얼굴로 관객을 둘러본다.]확실히 까다로운 지문이긴 했다.
어떤 대사 없이 얼굴의 표정만으로 공연장의 열기를 표현해야 할 테니까.
‘아티스트만 느낄 수 있는 무대 위의 열정. 열기. 팬들이 주는 에너지. 환희. 벅차오름. 엔도르핀이 나오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만족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행복.’
너무 추상적이다. 다만 무대에 섰던 아이돌들만큼은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았다.
알긴 안다만,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걸, 비 경험자가 어떻게 나타낼까?
“음향이라 하시면 어떤 건가요?”
“팬들의 함성이요.”
천천히 페이드 아웃(오디오가 차츰 약해져서 소멸하여 가는 것)으로 주인공의 감정만을 온전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무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한번 해볼게요. 보시고 판단해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저도 어느 게 나을지는 알 수 없어서.”
“아. 내가 묻는 건-”
음향을 안 넣어도 되겠냐는 거다. 효과음 없이 연기로만 가능하겠냐고. 하지만 그녀의 의도를 모르는 무영이 바로 감정을 잡았다.
“엔딩 곡이 뭐냐에 따라 좀 다를 것 같아요. 첫 번째 버전이요.”
무영은 활짝, 아주 활짝 미소를 지었다. 너무 행복해서 곧 죽을 것 같다는 듯. 살짝 글썽거리는 눈동자가 회의실 조명에도 아름답게 빛났다.
따악!
“그리고 두 번째.”
무영이 손가락을 튕기며 바로 다른 표정을 지었다. 마치 마술 같다. 비슷한 표정이지만, 소리 하나에 전혀 다른 감정이 담겼으니.
‘허탈함.’
가수들이 흔히 느끼는 감정이다. 무대에서 수백, 수천만 명의 팬들과 교감한 후, 홀로 돌아오는 집에서 맞는 감정. 혼자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외로움이 종종 그들을 덮친다.
따악!
“다음은 도하 캐릭터에만 온전히 맞춘 거요.”
더없이 자신만만하고 도도한 미소.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나야! 내가 이 끝내주는 무대를 해냈다!
자신감이 듬뿍 묻어 있는 웃음이다. 여타 부정적인 감정이 조금씩 섞여 있던 것과 달리, 순도 백 퍼센트 이상적인 상태.
“이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무영은 아주 빠르게 세 표정을 지으며 이유진 피디를 쳐다봤다.
고작 7초 정도 지났을까? 짧은 순간 후다닥 지나간 세 표정이 너무 강렬했다.
“혹시 가수 지망생이었는가?”
한 중견 배우 역시 궁금해하며 묻는다.
“앗. 아니요. 배우만 준비했습니다.”
“근데 포인트를 잘 잡네. 아. 물론 나도 완벽하게는 모르겠지만, 세 표정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확실히 달라. 아주 쏙쏙 들어와.”
“감사합니다.”
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그를 칭찬한 중견 배우는 40년 가깝게 이 판에서 버티신 분이다. 그런 그에게 연기로 칭찬받다니…….
‘대박.’
송아와 표라이가 시선을 주고받으며 어이없게 웃었다. 미쳤어. 정말. 진짜 잘한다.
“피디님?”
“아. 음. 음향 감독님은 어떠세요?”
“난 없어도 될 것 같네. 무영이 표정만 잡아도 괜찮을 것 같아.”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이유진 피디는 볼펜으로 대본상의 이팩트 효과를 찍찍 그어버렸다.
“자. 그럼 이어서 하죠. 어디까지 했더라?”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리딩장 분위기. 오직 구석에서 그들을 찍던 기자와 스틸팀만 발을 동동 굴렀다.
“아. 방금 표정 진짜 좋았는데. 찍었어요?”
“아뇨. 너무 빨리 지나가서.”
프로페셔널한 마술 쇼를 보는 것 같았다. 어쩜 그렇게 능숙하고 완벽하게 딱딱 짚어내는지! 손 튕기는 소리가 더해져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선배. 우리는 찍었어요?”
다큐멘터리 작가가 정신을 퍼뜩 차리고 카메라맨에게 물었다. 아주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피디와 작가는 머쓱한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거 꼭 내보내야겠죠?”
“응. 당연하지.”
“입사해서 수년간 입조심 하라 배웠는데, 아직 멀었나 봐요.”
낙하산이라고 떠들어대던 몇 분 전이 미치도록 부끄럽다. 저런 건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고.
“잘하면 우리가 진짜 엄청난 걸 찍고 있는 걸 수도 있겠어.”
훗날 대성한 배우의 과거를 기록하는 거지. 피디의 중얼거림에 작가는 여느 때와 같이 이죽거리지 못했다. 사실인 것 같아서. 그 말이 전혀 현실성 없는 말이 아닌 것 같아서.
“이다음은 하무영 집 가는 거죠?”
“응. 같이 이동해서 가.”
“어디 산다고 했더라?”
“마포 쪽 어디라는데. 얹혀사는데, 오피스텔이래. 꽤 좋다 하더라고. 놀라지 말래.”
피디의 장난스러운 말에 작가가 웃었다.
“놀라긴. 우리야 좋죠. 시청자들 그런 거 좋아하잖아요. 누가 어디에 살고 얼마를 벌었는지.”
원색적인 욕구야말로 시청률을 깨울 수 있는 도구다. 그녀는 시계를 확인하며 리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어디, 얼마나 좋은 집인지, 한번 영상으로 담아보자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