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195
195화. 오래된 모델
백새벽과 용여홍의 방으로 들어간 장목화는 곧바로 질문에 돌입하는 대신 성건우에게 문 앞을 지키도록 한 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들어온 거야?”
“이곳 도어락 푸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버즈는 흰색 카드 한 장을 꺼내 두어 번 흔들어 보였다.
“아, 그럼 일단 가면부터 벗어야 하지 않을까? 안 그럼 우리가 어떻게 당신이 버즈라는 걸 확신할 수 있겠어?”
장목화가 말했다.
“전에도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잖아⋯⋯.”
버즈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순순히 철 가면을 벗었다.
곧이어 약간 각진 얼굴과 린넨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깔끔히 면도한 얼굴엔 주근깨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딱 봐도 서른 살을 넘기진 않았을 것 같았다.
“말해봐,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장목화는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버즈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 나를 찾아왔을 때 헬빅이 죽었다는 말은 안 했잖아.”
장목화가 잠시 생각하다 대꾸했다.
“그건 중점이 아니니까.”
순간 버즈의 말투가 조급해졌다.
“그거야말로 중점, 핵심이지! 난 누가 헬빅을 죽였는지 짐작이 가. 그 사람은 나까지 죽이려고 한다고!”
“그게 누군데?”
장목화가 협조적으로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이내 버즈의 낯빛이 좀 어두워졌다.
“사실 그 무기들은 잃어버린 게 아니야. 그건 전부 자작극이었어.”
장목화를 비롯해 백새벽과 용여홍도 동시에 웃었지만, 버즈는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보지 못했다.
그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무기들은 원래 산 요괴들한테 팔 거였어. 자작극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다른 팀원의 적개심을 샀겠지.
앙헤바스와 협력한 헬빅은 자신의 사람들을 강도로 위장시킨 뒤 무기를 도둑맞은 척했어. 그리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그 무기들을 산으로 보냈지.
뒤이어 단서를 조작하고 마을로 돌아와 임무를 의뢰하면서, 모든 죄를 애쉬랜더나 지하 방주 쪽에 뒤집어씌우려 했어. 그렇게 해서 모두의 불만을 축적 시키려고 한 거야. 그런데, 헬빅이 갑자기 죽어버렸어!”
장목화가 적기에 끼어들었다.
“앙헤바스가 누군데?”
“마을 내에서 상당히 지위가 높은 레드리버인이야. 주로 에너지를 밀수해. 헬빅의 사업 파트너이기도 하고. 석탄광 여러 개를 장악하고 있는 산 요괴가 앙헤바스랑 여러 차례 거래했었어.
앙헤바스가 그런 게 틀림없어! 그자가 헬빅을 죽이고 그 무기를 꿀꺽하려 한 거라고! 난 오늘 아침 습격을 받았어. 땅굴을 여러 개 파두지 않았더라면 벌써 죽었을 거야! 내가 죽었더라도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버즈는 몹시 흥분해 분통을 터뜨렸다.
이내 장목화가 고개를 돌려 문 앞의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그도 장목화가 보낸 눈빛의 의미를 단박에 파악했다.
성건우는 곧 원숭이 가면을 벗고 천천히 버즈 앞으로 다가가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버즈가 경계심을 잔뜩 곤두세우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뭐, 뭘 하려는 거야?”
* * *
1분 후, 06호 안.
어깨동무하고 앉아있는 성건우와 버즈는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만난 형제만큼이나 친해 보였다.
거리를 두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라고 했던가. 그 경계 교파의 교리와는 완전히 어긋난 모습이었다.
“우리한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성건우가 물었다.
버즈는 그의 질문에 굉장히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럴 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아침에 거의 죽을 뻔했을 때 그 녀석들은 내 땅굴로 쳐들어오기까지 했어. 하지만 다행히 나는 땅굴을 세 개 이상 파뒀었지.”
순간 용여홍은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놓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성건우의 질문이 이어졌다.
“널 찾아온 자들이 앙헤바스의 수하들이라는 건 확신해?”
“그래! 그들을 이끈 건 앙헤바스의 가장 유능한 경호원이야. 연합 공업에서 온 녀석인데, 키도 크고 덩치도 좋지. 그 사람을 잘못 알아봤을 리 없어.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다가는 바로 붙잡힐 위기라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못했지만.”
버즈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키가 얼마나 큰데?”
성건우는 언제나 그렇듯 영 이상한 곳에 집착했다.
“너보다 더 커. 우리 레드스톤 마켓에서 키가 그 정도나 되는 건 그 사람뿐이야. 그 녀석 이름은 로페즈야. 전에는 연합 공업의 어느 보안 회사 직원이었는데,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쪽으로 도망쳐왔대.”
버즈가 설명했다.
그때, 곁에서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장목화가 불쑥 물었다.
“왜 곧장 교회당으로 가서 레나토 주교를 찾지 않았어? 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레드스톤 마켓에 들어가 한명호를 찾아도 되고.”
버즈는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좌우를 살펴보았다.
“한명호는 아무런 힘도 못 써! 그래, 그 사람은 공정하고 의리 있기로 유명하지. 근데 그나마 우리 레드리버인과 애쉬랜더를 조직해 함께 그 추악한 녀석들과 버러지 떠돌이 강도들을 막아낸 전적이 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그 사람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걸?
일상적인 질서나 작은 일에 있어서는 그래도 모두가 한명호의 체면을 세워주겠답시고 어느 정도 처벌을 받아들여. 하지만 이렇게 큰일이 벌어진 상황에서 과연 앙헤바스가 한명호를 두려워할까? 앙헤바스가 두려워하는 건 강력한 집단이랑 그들의 대표뿐이야.”
장목화가 곧장 대꾸했다.
“지하 방주나 그곳의 대표 카를 집사, 아니면 경계 교파와 그곳의 대표 레나토 주교처럼?”
그 말에 버즈가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 교회로 가는 도중에 또 습격을 당할까 걱정이 됐어. 그들이 교회 주위에 매복해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 순간에 너희들 생각이 나더라고. 나를 교회당에 좀 들여보내 줬으면 해서 찾아온 거야.”
그러다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됐어, 됐어. 너희들까지 이 일에 휘말리게 할 수는 없지. 겨우 네 명밖에 안 되는 너희가 어떻게 앙헤바스와 그 수하들이랑 대적할 수 있겠어? 일단 숨을 방법을 마련한 다음, 상황이 좀 잠잠해지면 그때 교회당으로 가봐야겠어.”
성건우를 바라보는 버즈에게서 형제에겐 절대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런 상대의 모습에 감동한 성건우가 물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
그 역시 상대를 진짜 형제로 여기는 듯했다. 버즈도 성건우의 진심을 느꼈는지, 조금 더 단단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최근 숨기 미사가 세 번이나 열렸어. 거기서 난 두 번이나 5위 안에 들었지. 레드스톤 마켓을 통틀어 나보다 잘 숨는 사람은 몇 명 안 된다는 얘기야.”
“대단한데?”
성건우도 박수로 호응했다.
그때,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가 교회당에 데려다줄게. 우리도 마침 레나토 주교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거든.”
레드스톤 마켓의 상황은 점점 통제 불가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사실상 이곳 촌장이라 할 수 있는 레나토와도 최대한 빨리 얘기를 나눠봐야 했다. 안 그럼 레드스톤 마켓이란 고래 싸움에 구조팀의 등이 터지게 될 판이었다.
팀장의 결단에 백새벽, 용여홍은 아무 이견도 표하지 않았고, 성건우는 두 손은 물론 두 발까지 들어가며 찬성했다.
* * *
차에 오른 일행은 유탄발사기 폭군과 사신 개인 바주카포 사신을 꺼내놓았다. 언제라도 빠르게 집을 수 있도록 만반의 채비를 해두고 있었다.
그러자 성건우와 용여홍 사이에 앉은 버즈도 조금씩 자신감을 얻었다.
“화력이 상당한데? 차도 개조한 거지? 장갑이 진짜 두꺼워 보이네. 유리도 방탄인 것 같고.”
무기상 헬빅의 심복이었던 그는 이런 방면에서 눈썰미가 퍽 좋은 편이었다.
“우린 이번에 군용 외골격 장치를 구하려 레드스톤 마켓에 온 거야.”
장목화는 짧게 대꾸하며, 레드스톤 마켓에선 전하얀 팀으로 알려진 구조팀의 목적을 밝혔다. 이로써 자신들의 실력을 간접적으로 내보이고, 현지 무기 거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버즈에게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내 버즈가 말했다.
“그건 구하기 힘든데? 큰손들이 다 예약을 해둬서 말이야. 또 큰손이라도 예약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나 신형 모델은 더더욱 그래. 연합 공업의 정예팀도 그걸 구하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백새벽은 폐허 도시 북쪽에 자리한 경계 교파의 교회당을 향해 차를 몰았다.
장목화도 버즈의 말뜻을 이해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오래된 모델을 구할 방법은 없을까?”
버즈가 고개를 저었다.
“지하 방주에 좀 있기는 할 텐데, 누구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지. 디마르코 선생도 그걸 팔려고 하지는 않을 거고. 우리 보스와 앙헤바스도 전에 그 물건을 취급한 적이 있긴 한데 남은 건 없어.”
이 대목에서 갑자기 그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한명호가 조직한 마을 경비대에도 두 대가 있어. AC-42 일반형.”
“가장 오래된 모델이잖아?”
장목화는 군용 외골격 장치에 대해 어느 정도 연구를 해봤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버즈가 간단히 설명했다.
“거의 그렇지. 2년 전, 어인과 산 요괴가 연합해 우리를 레드스톤 마켓에서 내쫓으려 했어. 아주 위급한 상황이었는데도 디마르코 선생은 지하 방주를 지키는 경비대를 파견하지 않으려 하더군.
그래서 한명호가 주민들을 조직하고 물자를 모았어. 그뿐만 아니라 보스와 앙헤바스에게 어떻게든 연합 공업의 한 창고에 있는 그 ‘두 영감’을 가져오라고 요구했지. 낡아빠진 모델이기는 해도 상당히 유용했다고!”
“영감? 두 마님은 아니고?”
성건우가 불쑥 이의를 제기했지만, 장목화는 이제 그 실없는 소리는 공기처럼 취급할 만큼 도가 텄다. 그렇게 그녀는 룸미러로 뒷좌석의 버즈만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레드스톤 마켓을 지키기 위한 무기잖아. 한명호에게도 그걸 팔 생각은 없을 거야.”
“맞아. 게다가 그 사람은 도통 욕심이라는 걸 몰라. 돈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니야.”
말만 들으면 버즈가 지금 불평하는 건지, 감탄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장목화는 곧 잠시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레드스톤 마켓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부 한명호에 대해 상당히 높이 평가하더라고.”
심지어는 테레사 부인도 한명호가 애쉬랜더를 싸고돌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뿐, 그 외의 다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여태까지도 치안관과 마을 경비대 대장 자리를 지키고 있지.”
버즈는 한명호에 대해 칭찬도, 폄하도 하지 않았다.
“외부자에게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장목화가 대꾸했다.
* * *
이윽고 지프는 경계 교회당 근처, 도시 북쪽 구역에 이르렀다.
바깥의 환경을 관찰하던 장목화가 손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세우자.”
백새벽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층 빌딩 옆쪽으로 차를 몰았다.
뒤이어 몸을 돌린 장목화가 용여홍에게 말했다.
“전에 이곳 지형을 확인했었지? 여기 있으면 교회당 주위 구역을 감시할 수 있어. 너랑 새벽이는 이 건물 꼭대기로 올라가서, 오렌지 소총과 사신 바주카포로 우리를 지켜줘. 너희들도 조심하고.”
이곳은 고층 빌딩이 많지 않은 교외였다. 앙헤바스의 사람들이 버즈를 저격하기 위해 그 건물 꼭대기에 자리를 잡고 있을지도 몰랐다.
“예, 팀장님!”
용여홍도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 채 덜덜 떨기만 하는 신입이 아니었다.
“네 체력을 시험할 때가 온 거야.”
덧붙여 성건우가 웃으며 용여홍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