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221
221화. 섬으로의 상륙
다음날 오전.
“대부분은 다 사라졌네. 넌 진짜 나보다 회복력이 훨씬 좋구나.”
용여홍이 성건우의 등에 생긴 멍에 약을 발라주며 한숨을 쉬었다. 등에 난 멍은 격투 훈련의 여파였다. 약을 겨우 한 번 발랐는데도 멍은 벌써 이만큼이나 사라져 있었다.
이때 성건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많이 얻어맞으면 얻어맞을수록 저항력이 높아지거든. 너도 해봐.”
용여홍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내가 팀장님한테 얻어맞으면서 어떻게 오래 버틸 수 있겠어? 팀장님은 진짜 대단해. 병이 낫자마자 그 정도로 힘을 쓰다니. 평소에도 전력을 다 발휘하는 건 아니었나 봐.”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이 전력을 다 발휘하면 전투 훈련은 일주일에 하루밖에 못 할걸. 제일 큰 문제는 너지. 넌 한 번 훈련할 때마다 일주일씩은 누워있어야 할 거야.”
용여홍은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대화를 나누던 그때, 돌연 고개를 돌린 성건우가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장목화는 일찍이 옆방에서 백새벽의 손을 빌려 약을 바르고, 벌써 문밖으로 나가 방문자를 맞고 있었다.
“한 대장.”
“네 외골격 장치가 도착했나 보다.”
말을 마친 성건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입었다.
용여홍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문 쪽으로 달려갔다.
성건우는 가면을 쓰자마자 곧장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등에 소총을 맨 한명호와 낡은 SUV 두 대, 그리고 레드스톤 마켓 마을 경비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나무 상자 하나를 장목화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AC-42 일반형 외골격 장치 한 대야. 확인 부탁해.”
한명호가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인기척을 느낀 장목화가 용여홍을 돌아보며 웃었다.
“와서 확인해봐.”
용여홍과 성건우는 곧장 그쪽으로 다가가 나무 상자를 열고 금속광이 나는 검은색 외골격 장치를 살펴봤다.
동시에 장목화가 한명호에게 말했다.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가면을 쓰지 않은 한명호가 드물게도 웃음을 보였다.
“치안소까지 찾아와 재촉하는데 어떻게 시간을 더 끌 수 있겠어.”
거기다 마을 경비대 실권자들도 만장일치로 해당 사안을 통과시켰다.
장목화가 실소를 터뜨렸다.
“우리가 그렇게나 무서웠단 말이야?”
“맞아.”
식량이 든 상자 하나를 옮기던 경비대원 하나가 작게 답했다.
다행히도 장목화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내 성건우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린 중이 산에서 내려와 동냥을 하는데⋯⋯.”
그러나 그는 장목화의 부릅뜬 눈을 보고는 다음 가사를 내뱉지 못했다.
한명호는 이 광경을 보고 뭔가 감정에 젖어 말했다.
“애쉬랜드에는 자신들만의 힘으로 큰 거점 하나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유적 사냥꾼 팀이 아주 많아. 레드스톤 마켓 마을 주민들이 보기에 너희들은 그 정도로 강한 유적 사냥꾼 팀이야.”
그날 밤 나타난 강력한 어인 각성자는 레드스톤 마켓 주민들 마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런 그들이 전하얀 팀에게 느끼는 경외심과 두려움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칭찬을 받은 장목화가 겸손하게 대꾸했다.
“레드스톤 마켓은 달지기의 비호를 받는 대형 거점이잖아. 우리를 포함해 유적 사냥꾼 팀들한테 파괴될만한 곳이 아니야.”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몇몇 경비대원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로 쏠렸다. 왠지 ‘정말 레드스톤 마켓을 파괴할 생각을 하긴 했었구나.’하고 말하는 듯했다.
‘경계심이 너무 강한 거 아냐? 지나치게 예민한 것도 좋은 건 아니라고.’
장목화는 애써 이 말을 꾹 삼켰다.
곧이어 용여홍이 성건우의 도움을 받아, 검은색 외골격 장치를 착용했다. 장치는 모듈이 굉장히 조악한 편이었지만,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본 결과 이러한 장비의 강력함을 재차 느낄 수 있었다.
한 차례 실험 이후, 용여홍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없습니다!”
그 사이 식량 몇 상자를 살펴본 백새벽도 그 양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이윽고 장목화가 한명호에게 말했다.
“거래가 정식으로 마무리됐네.”
한명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 안에 머신헤븐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해달라고 하지 않았나?”
“벌써 다 수집한 거야?”
장목화가 깜짝 놀랐다.
한명호는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근데 여태까지 찾아낸 자료에서 문제 하나를 발견했어.”
“어떤 문제?”
성건우가 얼른 끼어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명호가 말했다.
“여태 머신헤븐 출신의 인간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머신헤븐과 거래하는 이들이 만난 건 지능 로봇뿐이었대.”
“그렇구나.”
장목화는 이러한 사실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위드 시티의 성주 허양원도 이런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대화를 마치고, 한명호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 함께 온 몇몇 경비대원들은 언제라도 숨을 곳을 찾아 들어갈 것처럼 멀찍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러자 한명호가 한껏 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뭔데?”
장목화가 물었다.
한명호는 잠시 생각을 해본 뒤 입을 열었다.
“너희들 말고 레나토 주교가 급하게 경계 교파 본부에 소환되었던 그날 밤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있어?”
구조팀이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자, 그가 간단히 설명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어인, 산 요괴와 일차적인 포로 교환을 진행했어. 너희들도 알고 있는 가우디가 돌아왔지.
가우디는 어인에게 붙잡힌 후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대. 그들 말이, 원래는 한 달 정도 더 준비하면서 상황을 좀 더 확실하게 파악한 뒤에 공격하려고 했는데, 레나토 주교가 갑자기 마을을 떠난 데다, 새로운 주교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소식에 계획을 앞당겼다더라고.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데다가 신사까지 잃었으니, 그들도 서로를 원망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마구 끄집어냈다고 해.”
장목화도 한명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아류인에게 그 중요한 정보를 팔아넘겼다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한명호는 본인의 추측을 숨기지 않았다.
‘아류인이 레나토 주교가 본부에 소환되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고? 이거 재미있네.’
잠시 생각하던 장목화가 답했다.
“그날 교회당에 경고자와 경비대원들이 있었어. 버즈와 비엘도⋯⋯.”
그리고 그들은 레나토 주교가 사실은 무심병에 걸렸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얌전히 듣던 한명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서대로 조사해볼게.”
장목화가 웃었다.
“우리도 용의자일 것 같은데.”
한명호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대꾸했다.
“만약 너희들이 그 정보를 팔았다면, 어인 각성자를 꾀어낸 뒤 그자를 죽여 우리로부터 외골격 장치를 얻기 위해서겠지.”
“좋은 설명이야.”
성건우는 깊이 감명받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 * *
오후 무렵, 준비를 마친 구조팀은 호숫가 구역에 이르러 마을 경비대 모터보트를 빌렸다. 그들은 이미 한명호의 도움 아래, 어인이 밀집된 구역을 우회하는 항로까지 계획해둔 상태였다.
“이건?”
유백색 모터보트 옆에서 장목화는 한명호를 따르는 경비대원들이 자전거 4대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한명호는 햇빛 아래 금빛으로 물든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며, 서늘하고 축축한 겨울바람을 한번 들이켰다. 그러고는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했다.
“섬에 도착하고도 신전까지는 조금 더 가야 해. 이동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건 결코 현명한 짓이 아니지. 마을 경비대원 몇몇이 상의해서 너희들한테 자전거도 몇 대 빌려주기로 했어.”
이 작고 조악한 모터보트에 자동차를 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성건우는 그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보다 앞서, 장목화는 얼굴에 쓴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웃고 있었다.
“너흰 원래 이렇게 관대하게 구는 사람들이 아니잖아.”
한명호가 솔직하게 답했다.
“우리도 최대한 빨리 잠든 신령에 관한 일을 해결하고 싶어. 그러지 않으면 어인 중에 언제 또 그날처럼 강력한 각성자가 나타나 우리를 성가시게 할지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에이돌른에게 레드스톤 마켓을 비호해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는 없겠지. 경계 교파에서는 기꺼이 공포 주교 한 명을 보내려고 할 테고.”
장목화도 숨겨진 위험 요소에 대한 그들의 경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지.”
한명호는 이내 자전거 넉 대를 가리켰다.
“이건 전부 연합 공업에서 만들어진 거야. 쓰기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어. 보다시피 구세계 초기 스타일을 모방해 전부 뒷좌석이 있지. 난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구세계의 자전거는 어째서 점차 사람을 실을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한 걸까? 낭비 아닌가? 실용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지.”
장목화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멋대로 동조하기도 좀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뒷좌석이 있으니 두 대면 충분해. 넉 대 다 실으면 모터보트가 꽉 찰 거야.”
한명호는 아무 이의도 표하지 않고, 한담하듯 말했다.
“전에 연합 공업 밀수업자는 우리한테 세그웨이라는 물건을 홍보하기도 했어. 아주 작아서 휴대하기 편리한 교통수단이었지.
근데 그건 폐허 내 도로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만든 게 분명했어. 여기서 그런 걸 탔다간 건물 잔해나 파편에 걸려 날아가 버릴 게 분명해.
그 어인 포로 말이, 섬 내 도로는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상태라고 했으니 세그웨이를 타기엔 좋을 거야. 근데 그때 우리가 그걸 산 게 아니라서.”
그 말을 들으며 웃던 장목화가 불쑥 물었다.
“한 대장, 이전보다 말이 많아진 것 같다?”
흠칫 놀라 멍한 표정을 드러내던 한명호가 자조하듯 웃었다.
“강한 실력을 보인 너희들과 친해지고 싶은가 보지.”
* * *
몇 마디 한담을 더 나눈 뒤, 성건우와 백새벽은 자전거 한 대씩 끌고 모터보트에 올랐고, 용여홍은 낑낑대며 외골격 장치가 든 나무 상자를 옮겼다. 장치를 착용하지 않은 건, 전력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모터보트에 훌쩍 뛰어오른 장목화는 모터의 요란한 소리 속에 한명호를 비롯한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십여 초 후, 유백색 모터보트는 끝이 보이지 않는 분노의 호수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물결 위로, 금빛 비늘 같은 흔적이 길게 새겨졌다.
호숫가에서 부는 바람은 유난히 더 차가워, 용여홍은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그러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그는 하나의 선처럼 보이는 연안을 확인했다. 여러 개의 섬은 괴물처럼 호수 깊은 곳에 잠복해 있었다.
“팀장님, 왜 더 늦게 출발하지 않은 거죠? 오후에 움직이는 건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 어인들에게 쉽게 발견될 것 같은데⋯⋯.”
용여홍이 생각하기로 보통 이러한 작전은 깊은 밤에만 이루어졌다.
피식 웃던 장목화가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성건우는 모터보트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아, 맨손으로 물고기 낚시를 시도 중이었다.
“우리 작은 빨강이한테 설명 좀 해줘.”
그러나 성건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장목화가 다시 그를 불렀다.
“야.”
그제야 고개를 돌린 성건우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너 길 알아?”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에 용여홍이 얼떨떨하게 답했다.
“무슨 길?”
그때, 백새벽이 끼어들었다.
“그 섬으로 가는 길.”
“몰라.”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답한 뒤에야 깨달음을 얻었다.
“밤에 움직이면 우린 절대 그 섬을 찾을 수 없다는 거야?”
장목화는 한명호가 그들에게 알려준 표지로,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낮에는 지도나 설명이나 주위 환경을 비교해가면서 미리 계획해둔 항호를 따라갈 수 있어. 근데 밤이라면 우리는 물론, 한명호를 비롯한 마을 경비대원이라도 길을 찾지 못할 거야.”
호수 구역은 어인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레드스톤 마켓 주민들은 당연히 지리 파악에 미흡했다. 무엇보다 일단 이 조악한 모터보트에는 스마트 내비게이션이라는 것도 없었다.
다시 장목화의 말이 이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만약 네가 어인이라면 언제 가장 경계심을 곤두세우겠어? 분명 깊은 밤이겠지. 레드스톤 마켓 사람들이 어두운 밤을 틈 타 습격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거야. 낮에는 비교적 마음을 놓겠지만.
분노의 호수는 굉장히 넓어. 어인들이 주로 활동하는 구역에 접근하지만 않는다면. 그 섬에 다가가기 전까지는 아무런 위험도 없을 거라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용여홍이 한 마디로 정리했다.
“구체적인 상황과 구체적인 분석이네요.”
모터보트는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며, 점차 분노의 호수 깊은 곳으로 진입했다. 시간이 1분 1초 흘러가는 동안, 햇빛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