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288
288화. 좋은 날
이내 성건우가 즉각 차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레드스톤 마켓에 들어온 이때, 게네바가 이곳 구조를 잘 살피기도 전에 먼저 튀어 나간 그는 구세계 광고판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광고판 문 안쪽에선 기관단총을 쥔 마을 경비대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면을 정수리까지 젖혀둔 그는 전형적인 애쉬랜드인이었다.
“조심성이 좀 떨어지네.”
성건우가 지적했다. 꼭 상대와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러자 마을 경비대원이 약간 억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안에 숨어있는데 가면까지 쓰면 숨쉬기가 너무 불편하다고.”
이해한다는 듯,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전환했다.
“하긴. 여기서 고성능 배터리를 대량으로 사려면 누굴 찾아가야 해?”
경비대원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디마르코 선생의 집사 울리히, 비자 무역 회사에서 에너지 관련 업무 담당이거든. 앙헤바스한테도 연줄이 있어. 재고가 남아있는지도 모르고.”
고성능 배터리는 밀수 사업 중에서도 에너지 영역으로 분류됐다. 앙헤바스는 구조팀에게 일부 무기를 바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에너지 상인에 더 가까웠다. 애초에 그가 산 요괴에게 무기를 판 것도 다 석탄 사업을 위해서였다.
“좋아! 지금의 치안관과 마을 경비대 대장은 누구야?”
성건우가 활짝 웃으며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도제훈.”
경비대원이 솔직하게 답했다.
성건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사람. 난 그 사람이 무표정한 얼굴로 욕하는 게 좋더라고.”
지켜보던 용여홍은 성건우가 오늘 유난히 흥분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쟤 오늘 왜 저래?”
장목화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신중하게 대꾸했다.
“오늘 건우는 퍼포먼스형 성건우인가보지.”
“아⋯⋯.”
멍하게 있던 용여홍도 깨달음을 얻었다.
‘구세계 드라마 때문이구나!’
“꼭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모습이군.”
게네바도 의견을 제시했다.
“전부 다 건우 형제들이거든.”
장목화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설명했다.
그러자 백새벽이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구세계 즐길 거리의 효과예요⋯⋯.”
그 사이에도 성건우는 경비대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근 머신 헤븐의 사람이 왔느냐는 질문도 포함돼 있었다.
이내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새로 온 주교는 누구야?”
“안토넬라 주교님이셔. 아주 강해 보이던데.”
그때, 장목화가 몇 발짝 앞으로 나가 캐물었다.
“그 사람 혼자 왔어?”
경비대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공포 주교 성 지그문트 님과 다른 성직자도 같이 왔어. 근데 호수에 있는 섬에 갔다가 곧장 떠났지. 너희가 갔었던 그 섬 말이야.”
“혹시 거기서 뭘 가지고 왔어? 그 섬에 무슨 변화가 있지는 않았어?”
장목화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경비대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모르겠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섬에 접근하지 못하게 돼 있으니까. 그런데 사실 그런 금기가 굳이 왜 필요하겠어? 어인이 득실거리는 호수에 우리가 무슨 수로 간다고.”
성건우와 장목화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뒤에 레드스톤 마켓 상황 전반을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새 주교가 부임한 걸 제외하고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 중 하나는 헬빅의 아내 테레사 부인이 이미 이곳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했다는 점이었다.
무기 상인 리만은 벌써 여길 떠났는데, 들리는 말로는 떠날 때 그의 얼굴이 상당히 흙빛이었다나 뭐라나.
* * *
구조팀은 카샤 여관으로 이동해 통조림과 에너지 바, 압축 비스킷으로 방 3개를 구했다. 방값은 전에 묵었을 때보다 훨씬 비쌌다.
“이번엔 로봇을 가져왔잖아. 수시로 충전할 텐데 전기료는 받아야지.”
여관 주인은 구조팀의 약점을 정곡으로 찔렀다.
구조팀에겐 꼭 충전해야 하는 고성능 배터리가 아주 많았다.
이제 게네바에게 남은 배터리 중 사용 가능한 건 하나뿐이었고, 군용 외골격 장치는 지난번에 벗은 이후 다시 착용하지 않았다.
* * *
여관 구역.
장목화가 전자카드를 나눠주며 말했다.
“난 건우랑 쓸게. 작은 흰둥이, 빨강이가 같이 쓰고 겐은 혼자 써.”
다들 분배에 이미 습관이 된 터라, 별말도 없었다.
하지만 게네바는 달랐다. 그는 한참 망설인 끝에 결국 직접 물었다.
“너희, 원래 쌍쌍이 커플이었던 거냐?”
“켁⋯⋯!”
침을 삼키다 사레가 들린 용여홍은 연신 콜록거렸다.
장목화가 게네바를 보며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커플이 아니라면 왜 이성끼리 같은 방을 쓰는 거지?”
이번엔 성건우가 웃으며 게네바의 어깨를 두드렸다.
“겐, 그건 너무 구닥다리 같은 생각이야. 인간 집단에는 여러 조합이 있어. 커플이 꼭 남녀만 있진 않지. 여자, 여자 커플도 있고, 남자, 남자 커플도 있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사람들이 만나는 경우도 있고. 반은 남자고 반은 여자인 사람들끼리 만나는 커플도⋯⋯.”
성건우의 목소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점점 옆으로 새는 말에 장목화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선을 느낀 성건우가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하여튼 우리 팀은 현실적으로 방을 나눈다고. 잘 생각해봐, 저 둘 중에 누가 날 통제할 수 있겠어? 내가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닌다고 해도, 저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할걸.”
‘아주 잘 나셨어요, 그래.’
장목화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내 조용히 생각하던 게네바가 말했다.
“이해됐어. 근데 왜 굳이 한밤중에 나쁜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 거지?”
성건우는 몇 초간 고민하다가 신중하게 답했다.
“머리에 쥐가 나서.”
대체 그건 또 무슨 의미냐고 묻기 전, 장목화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겐, 방금처럼 그렇게 커플이냐고 직접적으로 묻는 건 아주 무례한 행동이야. 봐봐, 쟤네 둘, 너 때문에 아주 어색해졌잖아.”
말을 그렇게 했어도 사실 불편해하고 있는 건 용여홍 하나뿐이었다. 백새벽은 자다가 방금 막 일어난 사람처럼 몹시도 덤덤한 얼굴이었다.
“사실 나도 이게 무례한 질문이란 걸 안다. 그렇지만 너희들이 그랬잖아? 동료들끼리 굳이 많은 걸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그리고 난 최대한 빨리 인간 사회와 너희 탄소기반인들의 인지 체계에 대한 이해를 보완하고 싶다. 앞으로의 생존과 단독 행동을 위해서라도. 이것도 네가 가르쳐준 거다. 많이 보고, 많이 묻고, 많이 듣고, 많이 체험하라고 했잖아.”
묵직한 게네바의 합성음에서 인간적인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자 장목화도 웃음을 보였다.
“그래, 논리적으론 틀린 게 없는데 조금 더 예의 있는 방식을 택하는 게 좋겠다는 거지. 예를 들면 이렇게 모두 모인 자리에서 대뜸 묻기보다, 나한테 몰래 찾아와서 묻는다든지.”
“그렇군.”
게네바는 또 하나 배웠다는 듯 답했다.
* * *
각자 방으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한 구조팀과 게네바는 다시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게네바의 식량은 충전 중인 고성능 배터리였다.
그런데 그때, 한가롭던 모두가 순간 흠칫하며 시선을 돌렸다.
다들 여관 구역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을 감지했다.
“무슨 일이지?”
용여홍이 의아한 눈으로 문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성건우는 아예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려두고 밖으로 나섰다.
뉘엿뉘엿 지는 석양 아래, 멀찍이 떨어진 곳에 무슨 일인지 다 함께 모여있는 한 무리가 있었다.
“제가 가서 보고 올게요!”
성건우가 크게 외친 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발길을 옮겼다.
용여홍, 장목화, 백새벽, 게네바도 잠시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문을 닫고 그 뒤를 쫓았다.
어느 정도 이동하고 나서야 맞은편 상황이 제대로 보였다.
젊은 남녀 4, 50명 정도가 모여있었다. 15, 6살 정도에서 23, 4살 사이 나이대로 이루어진 무리였는데, 다들 얼굴은 깨끗한 편이었지만 입고 있는 옷은 남루했다.
용여홍은 심지어 발가락이 비죽 튀어나온 낡은 신발과 구멍이 여러 개나 뚫린 다운재킷도 보았다.
이 무리는 일고여덟 정도 되는 사람에게 에워싸여 있었다. 깔끔한 차림에 하나같이 총을 쥔 무리였다.
“과거 너희가 고생을 많이 한 건 잘 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한테 노예로 팔려 오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 너희들의 좋은 날이 다가오고 있다!”
총을 쥔 사람 중 수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4, 50명 정도의 젊은이들은 뻣뻣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엔 약간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노예 상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생각해봐라, 너희들한테 잘해줄 생각이 없었다면 이렇게 여관을 구했을까? 여기 레드스톤 마켓 도처엔 버려진 집들이 널렸다. 그런 곳에 몰아넣으면 그만인데, 친히 여관까지 다 잡아줬지.
하하, 앞으로 2, 3일만 더 있으면 너희는 지하 방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선 최하급의 노예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옷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매일 적어도 6시간은 잘 수 있고, 병이 나면 치료해줄 의사도 있지.
물론 계속 지하에서 살아야 하긴 하지만, 대신 전염병에 걸릴 걱정도, 강도나 군대, 다른 유랑자들에게 시달릴 걱정도, 야수의 습격을 받을 걱정도 필요가 없다. 좋은 모습만 보이면 장차 집사가 돼서 지상 일을 맡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훈련을 잘 받아 디마르코 영감의 하인이 될 수 있도록⋯⋯.”
설명을 듣는 젊은이들의 얼굴이 점차 환하게 폈다. 맑은 눈동자에선 광채가 났고, 신발 밖으로 튀어나온 발가락과 관절이 퉁퉁 부은 손가락도 절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용여홍의 머릿속엔 전에 들었던 말만 맴돌고 있었다.
‘디마르코는 굉장히 잔인한 사람이래.’
* * *
그들이 해산한 뒤 구조팀 일행도 방으로 돌아갔다.
이내 콧등에 얹어둔 선글라스를 벗은 게네바가 좌우를 보며 물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방금 본 노예 상인이 했던 말에 나쁜 기억이라도 떠오른 건가? 애쉬랜드에서는 노예와 하인이 꽤 흔한 편이라고 알고 있다. 거기에 큰 충격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게네바는 역시 완곡한 방식 따위는 생각지 않고 매우 직접적으로 물었다. 어쩌면 그는 완곡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게네바의 시선은 마지막에 백새벽에게 머물렀다.
노예 상인의 이야기를 듣던 이들이 환한 희망에 벅찼을 때, 그녀가 몰래 두 손을 꽉 쥐는 걸 목격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백새벽이 입을 열기 전, 용여홍이 대신 답했다.
“저들이 모실 주인이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이거든.
디마르코는 굉장히 잔인한 사람이래. 저들 운명이 좋은 쪽으로 변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거란 게 씁쓸한 거야.”
용여홍이 잠시 뜸을 들이며 디마르코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맞아.”
장목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2초간 고민하던 게네바가 물었다.
“그럼 왜 그들을 구하지 않는 거지?”
그는 모르는 게 생기면 그때마다 바로바로 물어봤다.
순간 공기가 극도로 고요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성건우를 제외하곤, 다들 게네바가 이렇게 직접적인 질문을 할 줄은 예상치 못한 듯했다.
굉장히 난감한 질문이었다. 물음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모든 허울을 그대로 관통해 이들의 마음까지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