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304
304화. 왜
한편, 구조팀은 디마르코가 사라진 짧은 찰나, 완벽한 정신을 되찾았다.
장목화는 그 즉시 입을 열었다.
“저놈은 전자기를 무서워해!”
이는 실천으로 증명된 일이었다.
장목화는 소위 의식 생명이라는 것과 전자장이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것도 벌써 다 알아차렸다.
그녀가 전에 폭발시킨 전류 폭풍은 디마르코의 생존 기조를 대대적으로 파괴하고 그가 몰래 숨겨뒀던 수많은 분신도 훼손시켰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고작 생체 공학 의수의 전기 에너지 강도로, 각기 다른 육신으로 오랜 세월을 살았던 괴물을 어떻게 소멸시키겠는가.
게다가 전에 이미 힘을 소진했기에, 장목화가 한동안 축적해둔 전량은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 지금은 기껏해야 인체 한두 차례 마비시킬 정도의 전량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허공에 디마르코의 인영이 빠르게 나타났다.
그 괴물은 여전히 구세계 검은색 사제복 차림에 같은 색 구식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전보다 훨씬 더 흐릿해져 거품처럼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나약해 보였다.
동시에 왼손을 드는 장목화와 고성능 배터리 하나를 뽑아 들려는 게네바를 보고, 디마르코가 코웃음을 쳤다.
뒤이어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머리 위로 큼직한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심지어 뭔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정확히 게네바와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의 머리를 정조준해 집중적으로 추락했다.
반면, 성건우가 자리한 곳은 태풍의 눈처럼 잠잠했다.
요란한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용여홍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크고 작은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목격했다.
조금 전 장목화가 한 말이 있었지만, 마땅한 대책을 세울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군용 외골격 장치를 활용해, 두 다리의 관절을 살짝 굽혔다가 뻗으며 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곳의 상황은 그가 원래 자리해 있던 곳보다 훨씬 나았다.
그런데 순간, 용여홍은 몸을 날리고서야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용여홍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백새벽이 있었다.
그녀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지도 않았다. 천장이 붕괴하고 있어도, 백새벽은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허공에서 용여홍은 억지로 고개를 돌려 백새벽 쪽을 돌아보았다. 매섭게 추락하는 콘크리트 덩어리가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킬 것만 같았다.
용여홍의 눈빛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영겁같이 느껴질지라도 지금은 분명 찰나고, 용여홍은 현재 문 쪽으로 가기 위해 허공에 몸을 던진 순간이었다.
쾅!
다음 순간, 용여홍은 문가에 착지했으나 몸을 굴리지는 않았다.
그때, 백새벽은 풍부한 경험에 기대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러곤 오른손과 팔로 머리를 막고, 급소를 단단히 보호했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주위 환경을 관찰하며, 규모가 크지 않은 콘크리트 덩어리 아래쪽으로 알아서 움직였다.
지금으로서는 차악을 고르는 수밖에 없었다.
쾅! 쾅!
비교적 작은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그녀의 어깨와 등, 팔을 타격하며 추락했다. 그래도 백새벽은 이를 악문 채 신음을 삼켰다.
그런가 하면 가장 큰 콘크리트 덩어리를 피한 장목화는 왼쪽 주먹에 어마어마한 힘을 실어 여러 차례 떨어진 덩어리들을 깨부쉈다.
이로 인해, 그녀는 다행히 경미한 찰과상만 입었다.
게네바의 경우, 더욱 상황이 좋았다. 그는 놀라운 반응 속도는 물론, 힘도 세고 몸 대부분이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했기에 무사했다.
물론 몸 곳곳의 부위가 약간 패이긴 했지만, 크게 망가진 부분도 없었다. 칠만 좀 새로 하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다들 공습을 피하느라 정신없는 와중, 디마르코의 인영은 허공에서 사라졌다. 이에 따라 성건우의 눈동자도 재차 짙어지며,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졌다.
* * *
기원의 바다, 산과 물, 밝은 햇볕이 노니는 섬.
높은 하늘에 구세계 사제복을 입고 구식 모자를 쓴 디마르코가 떴다.
하지만 인영은 전에 비해 훨씬 약해졌고, 얼마 버티지도 못할 듯했다.
이내 디마르코가 아래쪽 성건우들을 바라보며 날 선 목소리로 외쳤다.
“네 육신은 그다지 적합한 그릇이 아니라 기껏해야 2년 정도 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내 아이가 곧 탄생하지! 나한텐 더 많은 생명을 만들어낼 기회가 있다!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의식 박탈 능력에 굴복할 것이지, 이렇게 직접적인 동화를 선택하게 한 건 바로 너다!”
말을 하는 사이, 디마르코가 아래쪽을 향해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성건우의 기원의 바다가 무섭도록 출렁이기 시작하면서, 근 100미터에 달하는 높은 파도를 일으켰다.
거대한 파도 속, 수많은 미약한 빛이 점점 크게 부풀며 뭔가를 담아냈다.
부모님 앞에서 걸음마를 하는 아기, 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 숨바꼭질하며 어린 용여홍을 잡아 이기는 소년, 어두운 방에 홀로 웅크린 조그만 몸, 하얀 침대보 옆을 지키는 작은 그림자.
공부에 몰두한 눈빛,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나아가겠다고 지원서에 서명하는 손, 실험실 수술대 위에 누워 서서히 감기는 눈…….
모두 성건우의 순간들이었다.
숙명통은 중생의 과거를 보고 불성의 유일함을 아는 능력이었다.
네가 곧 나고, 내가 곧 너인…….
이제 성건우들이 아무리 억지쟁이 능력을 쓰고, 추리 광대 능력을 쓰고, 아무리 바주카포를 날려도, 디마르코는 더 이상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의 인영은 허상의 파도와 함께 저 빛 속 장면들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철썩!
결국 섬 주위로 밀려든 거친 파도가 성건우들을 다 삼켜버렸다.
* * *
디마르코의 방.
드디어 천장의 붕괴가 끝났다.
그리고 장목화는 디마르코가 점거할 육신을 정확히 예측했다.
그녀는 곧장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장목화의 왼손에선 아크가 한 줄기씩 흘러나왔다. 하지만 허공을 가로질러도 은백색 아크는 결코 성건우의 몸에 떨어지지 않았다. 상대에게 직접 다가가야만, 직접적인 접촉으로 전기 충격을 가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장목화는 이것이 과연 빙의한 디마르코에게 얼마만큼의 피해를 줄 수 있을지, 정말로 디마르코를 성건우의 몸에서 꺼내 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뭐라도 해야만 이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고, 저렇고 뭘 따질 시간이 없었다.
단 1초 만에 성건우 옆으로 달려간 장목화가 왼손을 뻗은 그 순간이었다. 원숭이 가면 속 성건우의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움직였다.
성건우는 분명 눈빛으로 장목화에게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장목화도 왼손을 뻗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 * *
성건우의 기원의 바다, 산과 물, 밝은 햇볕이 찬란히 공존하는 섬.
이제 이곳엔 디마르코의 인영과 주위 파도 속에서 미약한 빛을 번득이는 하나하나의 장면들만 남아있었다.
그 장면 속의 성건우들은 어쩐지 전보다 조금 더 음산해 보였다.
“하하!”
디마르코가 고개까지 젖혀가며 크게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얼굴과 이마, 목에서 성건우의 얼굴들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성건우의 얼굴들은 내부에서부터 디마르코를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내려는 것 같았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완전히 동화되지 않을 수 있지?”
디마르코가 약간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기운도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약해져 있었다.
그러다 그가 섬 가장자리에 나타난 한 손을 목격했다.
뒤이어 그 손의 주인이 나타났다.
제복을 입은 성건우였다.
성건우는 곧 씩 웃으며 디마르코를 바라보았다.
“왜냐면 내가 남아있었거든. 마지막 남은 성건우 하나가.”
지금껏 섬 위에 있던 성건우는 여덟뿐이었다.
“너 이 자식!”
디마르코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도 어떤 동작을 취하지는 못했다.
뒤이어 성건우가 자문자답하듯 말했다.
“당신이 다른 사람 심령 세계에 침입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나도 몇 가지 사실을 알았어. 역대 지하 방주의 주인 모두가 전부 당신이었던 거야.
당신은 원래 쓰던 육신이 쇠락하면, 다른 사람 육신을 점거해 다시 또 그 질긴 생명을 이어가지. 방주 주인이 하나같이 그 많은 여자를 두고, 그 많은 자식을 낳았던 건 가장 적합한 다음 육신을 선발하기 위해서였던 거야.
근데 그 안에 아주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더라고. 방주의 선대 주인이 중병에 걸렸을 당시, 하인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당신 가문의 구성원 여럿이 죽었다던데. 그것 때문에 지금껏 쓰던 육신에 한계가 왔는데도 적합한 다음 육신을 찾을 수가 없었지. 그 후로 당신은 광기 어린 악마가 됐어.
그러다 당신이 새 희망을 본 순간이 있지. 바로 라르스가 나타난 거야.
있지, 당신은 심령의 복도 급 강자야. 애초에 이런 문제를 일으켜서 자기 자신을 궁지에 빠뜨려선 안 됐다고.
전부 다 당신 덕분에 결론도 편하게 낼 수 있었어. 당신이 매번 다른 사람과 동화해 그 육신을 점거하려 할 땐, 하인도, 경비 대원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가장 약해진 상태일 거야. 그렇지?
당신이 여기 오자마자 곧장 내 몸을 차지하는 대신, 의식부터 박탈시키려고 하는 걸 보고 완전히 확신했지. 이것보다 완벽한 증명이 어딨어?”
디마르코의 얼굴이 점차 흉악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비밀을 들킨 듯한 눈치였다.
성건우는 계속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계속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어. 비로소 동화를 시작하긴 했지만 그 작업을 완수하지는 못한 때를. 즉, 당신은 가장 약해졌지만, 이 심령 세계의 주인은 여전히 나인 때가 완벽하게 다가온 거야.”
디마르코는 더 이상 억누르기만 했던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했던 그 많은 짓이 전부 날 놀리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성건우들이 보인 모습에 속아 그것들이 상대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환경이 계속 변하며, 디마르코도 당장 저 성건우의 육신을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왔다.
“아니? 아니지. 우리 모두 다 전력을 다했어. 한 사람한테만 모든 희망을 걸 수는 없잖아?”
성건우가 웃으며 설명했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디마르코는 몇 초가 지난 후에야 이를 악문 채 소리쳤다.
“미친놈! 왜 경계 교파의 말을 따르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나한테 대적하러 왔다고? 그게 너희들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데! 나도 너희들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다고!”
성건우는 위태로운 디마르코를 향해 다가가며 미소를 그렸다.
“아니야, 이건 경계 교파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그럼 대체 왜 날 공격한 건데!”
시간이 갈수록 디마르코의 충격과 분노는 깊어졌다.
성건우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변함없는 말투로 대꾸했다.
“당신 때문에 귀한 목숨을 잃은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희망에서 절망으로 떨어져야만 했던 그 눈빛들을 위해서.”
디마르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겨우 그것 때문에? 도대체 왜!”
그가 재차 이유를 물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노예들을 위해 자신과 맞서 싸우러 온 사람이 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고?”
성건우는 천천히 좌우를 살폈다.
허공에 멎어버린 거대한 파도 속, 미약한 빛으로 번득이던 장면들이 전보다 훨씬 더 몸집을 키우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빛 속에 얼어 죽고 굶어 죽는 황야유랑자들이 널린 위드 시티 밖이 있었다. 피가 강을 이뤄 흐르는 거리와 광장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국수 한 입을 위해 미쳐버린 이의 질문이 흘렀다.
– 우리도 사람인데 굶어 죽어도 된다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