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375
375화. 오랜 친구
백새벽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의사가 지폐를 챙기며 덧붙였다.
“아류인에게 적합한,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을 심장을 찾긴 힘들 겁니다. 만약 그 종족 중에 그 사람만 남은 상황이라면 희망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다시 몇 초간 침묵 끝에, 백새벽이 물었다.
“어디 사는지는 아시나요?”
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타나 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의사 중 환자에게 주소를 묻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가서 유산이라도 상속할 수 있다면 모를까. 음, 일단 그 환자한테 한 달 치 약을 지어줬습니다. 며칠 됐어요.”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백새벽이 그에게 간단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 * *
휴고 여관, 장목화와 성건우의 방.
“정말 비극적이야. 심지어 운명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한명호의 상황을 전해 듣고, 장목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회사에서는 치료할 수 있을까요?”
성건우가 곧장 물었다.
장목화는 기억을 한번 더듬어보았다.
“평범한 사람이면 문제없었을 거야. 적합한 심장이 없대도 회사에선 인공 심장을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류인 관련 기술은……. 나도 연구 영역에서 물러난 지 꽤 돼서 지금 어디까지 발전이 됐는진 잘 모르겠네. 이론상으론 가능해도 유전자 분석을 하는 데 시간도 걸리고 위험도 클 거야.”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어요! 명호의 의식을 업로드해서 기계 승려로 만드는 거죠! 육신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성건우는 갑자기 흥분하더니 성까지 떼고 한명호를 친근하게 불렀다.
백새벽도 말을 보탰다.
“퍼스트 시티는 기계 심장 기술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아직 그렇게 발전되지는 않았고, 그러는 데에는 비용도 상당히 많이 들죠.”
“그래, 구체적인 건 일단 한명호부터 찾은 후에 다시 얘기해보자.”
장목화는 이쯤에서 이 주제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구조팀은 수종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장목화가 먼저 성건우와 토론했던 결과를 알렸다.
“우리끼리 그 구역의 건물 하나하나를 다 뒤지려면 보름은 걸릴 거야. 지금은 단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게임을 못 하게 되면 수종이가 어떻게 나올지 한번 지켜봐야지.”
“단전이 언제 될지도 모르는데⋯⋯.”
용여홍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걸 듣고, 성건우가 기쁘게 대꾸했다.
“아마 오늘 밤일 거야.”
‘……그래, 당연히 밤에 되겠지.’
용여홍은 딱히 반박도 하지 않았다. 평생을 티격태격하며 지내온 친구인데, 그도 이젠 익숙하단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성건우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밤에 단전될 가능성이 크다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특히 이 그린올리브에선 단수와 단전이 상당히 흔하게 일어났다.
‘흔한 단수와 단전⋯⋯.’
용여홍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수종이는 왜 굳이 수시로 단전되는 곳에 머물렀을까요?”
다들 용여홍의 말에 약간 멍해진 사이, 그의 친구 성건우만은 자세한 고민 끝에 진지하게 답했다.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
수종이가 그린올리브 구역의 전기가 종종 끊긴다는 걸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장목화가 용여홍 편에 섰다.
“처음 왔을 때 모르는 건 그렇다 쳐. 근데 그린올리브에서 며칠 지내면,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여기가 수시로 단전된다는 걸 알 텐데? 그리고 목욕탕 그 손님이 수면 고양이를 마주친 건 벌써 얼마 된 일이잖아.”
즉, 수종이 퍼스트 시티에 막 도착했을 땐 가장 혼란스럽고, 남들에게 발각되기도 어려울 그린올리브를 택했을 수 있겠지만, 며칠 지내며 이곳 사정을 안 이상 벌써 레드울프나 골든그레인 등으로 옮겨갔을 거란 얘기였다.
“만약 수종이가 이 근처 구역 무심병 폭발 사건과 관련 있다면,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 갔다는 이야기다.”
게네바가 칩을 가동해 불가능한 점을 하나씩 배제해갔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만약 수종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넓다면, 무심병 사례가 이렇게까지 집중돼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내 장목화, 성건우, 백새벽의 시선이 분분히 여관 창문으로 향했다.
방 안의 창이 딱히 깨끗하진 않았지만, 유리 너머 그린올리브 구역과 레드울프 구역을 가르는 써드 애비뉴가 보였다.
지금은 한 무리가 그 길을 성큼성큼 걸으며 ‘우리는 토지를 원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원한다!’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연이어 용여홍도 반응했다.
“수종이는 써드 애비뉴 근처 블록에 있을까요?”
“아마도.”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종이의 사고방식도 그다지 정상은 아니에요. 우리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였을지도 몰라요.”
성건우의 말에, 용여홍이 그를 한번 흘깃 훑었다.
‘그래서 친구가 된 거냐?’
다음으로 용여홍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수종이가 저 근처 블록에 있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겠는데요. 저쪽 치안은 훨씬 더 좋아요. 집마다 찾아다니며 탐문을 하고 조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게다가 저쪽은 단전이 쉽게 되지도 않고요.”
집마다 탐문이 어려운 건 현재 정세가 긴장된 탓도 있고, 지금 구조팀은 반 지성교를 피해 숨어다니는 신세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치안관인 척 열흘 넘게 연속으로 고정된 구역에 출입한다면, 거기다 계속 여러 집을 방문한다면 틀림없이 누군가의 시선을 끌게 뻔했다.
이내 장목화가 웃었다.
“단전이 안 되면 단전을 시키면 되지. 병원이야 저기서 멀리 떨어져 있고.”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용여홍은 즐거워하는 두 사람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틀었다. 어쩌면 본인들이야말로 빌런일지 모르겠다는 그 말, 그 말이 불현듯 떠오른 까닭이었다.
* * *
다음날, 오후 3시.
오늘도 구조팀은 두 개의 조로 나뉘었다. 장목화, 성건우 그리고 용여홍, 백새벽이 서로 한 조가 되어 목표 구역을 조망할 수 있는 두 건물에 올라섰다.
“10, 9, 8⋯⋯.”
성건우는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초읽기를 시작했다.
이내 마지막 1을 외쳤을 때, 써드 애비뉴 근처 레드울프 구역은 정전이 됐다. 일부 불을 켜고 있던 곳은 하릴없이 햇빛 속으로 잠겼다.
구조팀이 밤이 아닌 오후를 택한 건, 수종이에겐 딱히 정해진 게임 시간이 없었고, 해가 없는 밤에 정전을 시키면 감시만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시간대 레드울프 주민 대부분은 출근한 상태라 한결 더 수월했다.
만약 밤에 정전이 됐다면 다들 거의 거리로 쏟아져 나올 테니, 겨우 구조팀 다섯만으론 그 많은 이들을 다 살필 수가 없었다.
목표 구역이 정전된 것을 보고, 성건우가 말했다.
“겐은 정말로 시간을 딱딱 잘 지키네요. 1초의 오차도 없어요. 우리 탄소기반인과는 비교도 안 되네요.”
“나도 그럴 수 있어.”
장목화가 바로 왼손을 들어 보였다. 의수에 장착된 보조칩의 도움을 받으면 그녀도 1초의 오차 없이 시간을 잘 지킬 수 있었다.
이야기 중에도 구조팀 팀장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건 팀원인 성건우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시야에 방과 거리로 빠져나온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 장목화는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백새벽의 보고를 들었다.
– 수종이로 의심되는 인물은 없어요. 이상을 보이는 방도 없고요.
“이쪽도 그래.”
장목화가 대꾸했다.
곧이어 휴고 여관이 자리한 라베 스트리트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모두 확인한 게네바도 소식을 전했다.
– 수종, 수면 고양이, 가위 말로 의심되는 생물은 없어.
장목화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수종이의 사고방식은 정말로 보통 사람과는 다르나 보네⋯⋯. 야, 건우 너라면 어디로 갔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가 답했다.
“주사위를 던져 하늘의 뜻에 따랐을 것 같은데요. 나 스스로도 어디로 갈지 몰라야만 절 찾으려 하는 사람을 더 헷갈리게 할 수 있잖아요.”
‘주사위를 잘못 굴리면 원수 옆집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어떡할래?’
속으로만 타박하던 장목화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또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도 그냥 잘못된 선택지는 주사위를 굴리기 전에 미리 배제하면 그만 아닌가.
“이번 무심병 발생 범위에 근거해 조금씩 추측해나가는 수밖에⋯⋯.”
장목화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뺨을 불룩 부풀렸다.
사실 수종이가 이번 무심병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하나의 추측에 불과했다.
그때였다. 성건우가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찾았다! 찾았어!”
“수종이?”
장목화는 황급히 성건우가 살피던 쪽으로 망원경을 돌렸다.
상대는 아이가 아닌 4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짙은 색 가운을 걸치고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의 입가엔 매우 우아해 보이는 수염이 나 있었다.
그는 수종은 아니었지만, 구조팀에게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수종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정식 사냥꾼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비로운 강자, 자칭 골동품 학자이자 역사 연구원, 이두형이었다.
“저 사람도 수종이를 쫓아 퍼스트 시티에 온 걸까?”
장목화는 이두형을 보고 수종이 퍼스트 시티에 있다는 걸 확신했다.
“가서 인사라도 할까요?”
성건우가 신나서 제안했지만, 장목화는 힘겹게 마련한 정전의 기회를 이대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조금 더 관찰하면서 기다려 보자.”
그러나 정비공이 와서 고장을 처리하고 전기 공급을 회복시킬 때까지 구조팀은 수종이도, 그 어떤 이상 현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장목화도 더는 성건우를 가로막지 않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이두형이 있는 그 거리로 빠르게 향했다.
* * *
운이 꽤 좋았는지 이두형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 그가 자리를 떠났다 한들 장목화와 성건우도 큰 걱정은 없었다. 여전히 건물 옥상에서 관찰 중인 백새벽과 용여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젊었을 땐 더 수려했을 듯한 미남자 이두형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성건우, 장목화를 발견하고 소리 내 웃었다.
“저를 보고 있는 게 누군가 했더니, 당신들이었군요.”
그는 애쉬랜드어를 쓰고 있었다.
‘너무 예리한 거 아닙니까? 우리는 나름 위장도 했는데.’
장목화가 웃으며 대꾸했다.
“타향에서 옛 친구를 만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맞아요.”
성건우가 깊은 동감을 표했다.
두 사람 역시도 애쉬랜드어를 사용했다.
그때, 이두형이 고개를 들어 백새벽과 용여홍이 자리한 건물을 올려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동료분들도 내려오라고 하시죠. 지난번에 여러분께 토끼 고기를 대접받았으니 이번에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성건우는 곧장 무전기를 들었다.
“빨리 내려와, 밥 먹자!”
곧 다 모인 구조팀은 차 두 대로 나뉘어 레드울프 구역 모처로 향했다.
* * *
이두형이 탑승하지 않은 차량에선, 용여홍이 돌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소리에 운전하던 백새벽이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용여홍은 전방을 주시한 채 복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두형은 우리 지인이고, 한명호도 그렇잖아. 이두형이 잘 지내는 걸 보니까 한명호가 더 걱정돼. 지금은 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