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498
498화. 붕괴
라운드힐 스트리트 14호.
이미 멀어진 구조팀을 보고 황급히 지연 반지를 손에서 뺀 칸나는 휴대하고 있던 보석함에 그것을 넣었다.
이 물건의 대가는 강렬한 이명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이걸 계속 착용하고 싶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 칸나는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카드에는 스페이드 킹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킹의 얼굴은 약간 흐릿했다.
그 카드를 쥔 칸나는 가상 세계의 주인을 향해 능력을 발휘했다.
“기억상실!”
말인 영역에서 기인한 이 카드에는 최근 5분 동안의 기억을 잊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걸 사용하는 사람 본인 역시 5분 이하의 특정 기억을 잃게 될 수 있었다.
강력한 세력을 등에 업은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칸나는 현재 총 다섯 개의 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두 개는 휴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끼치는 부작용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부작용은 물건을 착용하지 않고 그저 가지고만 있어도 발휘되었다.
칸나는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그건 다른 사람과 거래하는 데 쓸 생각이었다. 그녀가 흔히 사용하는 세 가지 도구는 언젠가 그 능력을 다하면 평범한 물건으로 돌아갈 운명이었다.
* * *
레드울프 구역, 원로원.
가이우스는 집정관이 주민들을 향한 연설을 할 때 쓰는 발코니로 나갔다.
근처 창가에 떠 있던 갈루란이 아래로 내려와 착지했다.
주위의 부상자들은 한창 신음 중이었다.
갈루란은 한 해를 대표하는 장생 영역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사실 두 종류의 기본 능력을 겸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만 물질 간섭 능력은 다른 영역보다 훨씬 약해 보였다.
전에 울린 종소리의 영향으로 원로원 밖의 전투는 잠시 중단되었다.
이곳에서부터 희망 광장까지의 주민들과 도시 방위군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직 이전의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
지금 이곳은 바람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고요했다. 실질적인 소리라고는 부상자들의 본능적인 신음밖에 없었다.
가이우스는 그들이 다시 광기에 휩싸이기 전, 마이크를 들었다.
“주민 여러분, 병사 여러분! 원로 바로는 구세군, 반 지성교와 결탁해 집정관을 통제하고 우리처럼 여러분의 편에 선 원로들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다행인 건 달지기와 퍼스트 시티 창립자 영령들의 비호 아래, 여러분이 때맞춰 진행한 시위 덕분에 우리에게 기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초조해진 그들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제 그들은 처리되거나 통제됐습니다. 다시 퍼스트 시티 상공에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신임 집정관이 주민들과 병사들에게 선포하는 사이, 그가 가장 신임하는 개혁파 원로는 하인 두 명과 원로원에 딸린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바로가 그곳에 갇혀 있었다.
그는 이미 두려움에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가이우스의 말을 듣고 집회 주민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뭘 원했는지를 떠올렸다.
주민들의 환호 소리가 커졌다.
원로원 바깥 각기 다른 곳에 포진해 있던 아류인 호위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그림이었다.
아류인 중 몇몇은 안색이 흙빛이 돼 있었고, 더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발발 떨고,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가이우스는 주민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 그들이 이 기세를 몰아 과도한 요구를 제기할까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아예 직접적으로 말했다.
“저는 이미 살아남은 원로들에 의해 집정관으로 선출됐습니다. 저는 기꺼이 주민 여러분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그들과 함께 반역자들의 재산을 싹싹 찾아내고, 여러분이 잃었던 땅을 여러분들에게 돌려줄 겁니다!”
더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주민들이 감격에 겨워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가이우스!”
“가이우스!”
“가이우스!”
감찰관 알렉산더는 그 우렁찬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동시에 젊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전 집정관 오레이 역시 주민들과 병사들에게 이렇게나 열렬한 지지를 받았었다.
알렉산더는 가이우스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흥분한 얼굴들과 열광적인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꼭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선을 옮기던 알렉산더는 멍하니 선 딸을,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생사를 알 수 없는 잔나가를 발견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가 옆에 있던 하인과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얼른 가서 잔나가 대사를 구해라.”
그와 수정의식교의 관계는 얕지 않았다. 비록 보리를 믿기 전 상응하는 영역의 능력을 각성하긴 했지만, 그래도 알렉산더는 그런 좋은 구실로 수정의식교와 공고한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놓치진 않았었다.
“감찰관님, 지금 바로 나갔다가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알렉산더의 하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일시적으로 얻은 안정은 굉장히 나약해 보였다. 무슨 뜻밖의 상황이라도 발생한다면 연기는 다시 피어오를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침묵한 채 가이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의 상황을 안정시키고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느냐는 신임 집정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망설이는 알렉산더의 곁눈에 잔나가에게로 향하는 딸의 모습이 비쳤다.
주위 사람들은 이 광경을 무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알렉산더가 하인과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일단 좀 기다려도 되겠다. 구급함을 준비해둬라.”
원로원 내에는 당연하게도 구급함이 비치되어 있었다.
이때 가이우스는 보다 심층적인 약속을 하고 있었다.
“반역자들의 영향을 모두 청산하고 나면, 여러분의 땅에서 다시 풍성한 수확물을 거두고 나면 우린 계속 외부 확장을 진행할 것입니다. 퍼스트 시티의 총기로 퍼스트 시티 주민들을 위해 더 많은 토지를 개척하겠습니다!”
주민들이 환호하는 사이 가이우스는 주위에 서 있거나 쓰러져 있는 아류인 호위대원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누군가 그들을 철저히 제거하기 전, 가이우스는 손을 들어 아래쪽으로 누르며 큰 소리로 선포했다.
“반역자에 의탁했던, 반역자를 도왔던 자들은 전부 체포돼 공정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 중 저지른 악행이 비교적 적고 회개하길 원하는 자에게는 한 번의 기회를 주겠습니다. 그러나 저지른 악행이 많거나 회개하려 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저는 그들을 달지기에게 보낼 것입니다!
자, 주민 여러분, 이제는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토지와 일자리를 기다리십시오. 범인 체포는 도시 방위군 형제자매들에게 맡기십시오. 여러분이 조금 전 직접 보셨다시피, 그들 역시 여러분과 같은 편입니다!”
주민들은 아직 이번 행위에 대한 단맛도 보지 못하고 어떤 자부심도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가이우스의 약속이 그 마음을 달랬다.
다들 목적을 달성했으니만큼 고향 퍼스트 시티가 어서 질서를 회복하길 바랐다. 그렇게 희망 광장 쪽으로 물러나 속속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일부 주민은 자리에 남아 조금 전의 충돌로 생사를 알 수 없어진 가족을 찾아 나섰다.
그러자 가이우스가 도시 방위군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세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부상자 구조와 광장 정리를, 한 팀은 심판받을 아류인들의 지하 감옥 압송을, 한 팀은 도시 내 각지의 동료들을 향한 통지를 맡도록.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반역자들을 적은 목록을 나눠주겠다.”
그중에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최소 두 명은 포함돼 있었다. 앞으로 질서를 유지하는데 가장 큰 잠재적인 위험으로 작용할 그들을 투항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가이우스의 지시를 듣고, 아류인 호위대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저항하고 싶기도 했고, 죽음의 항전을 벌이고 싶기도 했지만 상대편에 심령의 복도 급 강자가 몇이나 존재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절망하고 용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항해봤자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기다려본다면 혹시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원로원으로 들어온 도시 방위군들은 살아남은 원로 경호원들의 도움 아래 아류인 호위대원들을 묶고 결박했다.
눈이 튀어나와 괴물처럼 보이는 몰 역시도 고개를 숙인 채 바들바들 떨면서 원로원 지하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사실 그가 어릴 때부터 봐왔던 아류인 중 지금 그의 나이까지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몰은 그저 자식들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어린 막내는 이제 겨우 걷기 시작했다. 옹알이를 좋아하는 아이는 매일 잠들기 전 몰이나 아내와 30분씩 수다를 떨곤 했다. 수다, 사실 수다라기엔 좀 거창했고 아이가 알 수도 없이 옹알거리는 동안 부모로서 열심히 맞장구를 쳐준다는 얘기였다.
곧이어 몰의 눈앞에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단지의 대문이 퍼스트 시티 주민들에게 파괴되는 광경이, 폭도가 된 주민들이 그 안으로 달려들어 강도짓을 하고, 집을 불태우고, 단 한 명의 아류인도 놔주지 않는 광경이.
그러다 어린아이가 매섭게 바닥에 쓰러지고, 그중 일부는 노예로 팔려가는 광경을 떠올리자 몰은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자신의 아이들이 그런 고통에 울부짖는데도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을 것을 떠올리니, 광산이나 공장으로 팔려 간 아이들이 밤낮없이 힘겨운 일을 할 것을 떠올리니, 몰은 정말로 더는 견딜 수가 없어졌다.
점차 걸음이 느려지는가 싶던 몰이 갑자기 몸을 홱 틀더니 가이우스를 향해 꿇어앉았다.
“집정관님, 저희를 용서해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저, 저는 집정관님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몰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모습을 목격한 다른 아류인들도 따라서 무릎을 꿇으며 자신들도 노예가 될 테니 가족들의 안전만을 보장해 달라고 빌었다.
잠시 고민하던 가이우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공평한 재판을 받게 될 거야. 어쩌면 노동으로 죗값을 치를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르지.”
그는 더 이상 아류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골든애플 구역을 돌아봤다.
곧 자신을 지지한 이들, 그리고 신세계에서 돌아온 그 존재와 함께 즐거운 대화를 나눌 예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득권을 보장해준다는 약속이면 충분한 호의를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 * *
골든애플 구역, 엠퍼러 스트리트 9호.
아수스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매우 다급했다. 상대는 몇 마디 말만 급히 남긴 뒤 전화를 끊었다.
아수스는 순간 악몽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무심병에 걸리셨다고? 보수파 원로 절반 이상이 처형당했다고? 가이우스가 신임 집정관이 되었다고? 도시 방위군이 반역자들의 동료를 처단하려 하고 있다고?’
바르르 몸서리를 치던 아수스는 집에 딸린 밀실로 달려갔다.
일부 경화와 지난 몇 해 동안 모은 유용한 물건을 챙긴 뒤 황급히 저택을 나온 그는 차고로 달려가 방탄 처리가 된 검은 세단에 올랐다.
세단 트렁크에는 무기와 탄약, 최신형 군용 외골격 장치 한 대가 들어 있었다.
아수스는 자신이 통지받은 사실을 집사와 하인, 경호원들에게 알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인들도 이미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있었다.
차를 몰고 집정관 저택을 빠져나온 아수스는 한산하고 냉랭한 주위 광경에 조금 허망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