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648
648화. 뇌 통제
성영희도 범상치 않은 성건우가 또 무슨 기이한 짓을 할까 걱정이 된 건지 전방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할아버지 자식 중 몇몇은 신력 전기 대개척, 대건설, 대구원이 진행되던 중에 다 죽었어. 남은 건 중년에 얻은 늦둥인데, 할아버지는 그 자식을 끔찍이도 아끼셔.
오냐오냐 자라서 그런지 그 막내아들은 일하는 것도, 고생스러운 직무에 배정되는 것도 거부했어. 사실 이건 큰 문제도 아니야. 할아버지는 자식을 좋은 직무에 배정되도록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아들은 언젠가부터 몇몇 위원의 자식들과 한데 어울려 다니면서 걸핏하면 퍼스트 시티 장원에서 생산된 포도주, 오렌지컴퍼니에서 수입된 최신형 전자 기기, 연합 공업의 고급 자동차 등을 사대기 시작했어. 할아버지의 직급과 직무로 그런 소비가 가당키나 하겠어?”
성건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서 그 사람들이랑 얘기 좀 해봐야겠네. 고생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다는 진리를 일깨우고 그들의 이상도 정화해줘야지.”
‘뭐, 사유 유도라도 쓰려고?’
장목화가 속으로 혀를 찼다.
성영희는 성건우가 대체 어디서 이렇게 강한 책임감과 주도성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홍광명의 아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다.
잠시 고민 끝에 성영희가 다시 운을 뗐다.
“음,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천성이야.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책임감이 생기면 분명 나아지겠지.”
솔직히 그녀는 하마터면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신경 쓰지 말라고 답할 뻔했다. 이성과 예의가 제 역할에 충실해서 참 다행이었다.
“알겠어.”
성건우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 * *
애쉬랜드 그랜드호텔.
용여홍, 백새벽, 게네바는 순서대로 창가를 지키며 지프를 감시했다.
이제 백새벽과 교대한 용여홍은 창가에 서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팀장님이랑 건우는 언제쯤 돌아오려나⋯⋯.”
여름이지만 호텔에 에어컨처럼 에너지를 낭비하는 공산품은 없었다. 그 때문에 창가에서 바람을 쐬는 게 후덥지근한 방에 있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이내 주위를 슥 둘러보는데, 용여홍은 순간 이상한 누군가를 발견했다.
하얗게 바랜 검은 구세군 제복을 입은 그는 몸이 앞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고, 머리엔 회백색 깊은 알루미늄 냄비를 써서 코 아랫부분만 보였다.
‘그 또라이들?’
용여홍은 빠르게 이 도시에 막 들어왔을 무렵 마주친 이상한 사람들과 그들에 관해 성영희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저 정신 나간 사람들은 왜 애쉬랜드 그랜드호텔로 들어온 걸까?
황급히 고개를 돌린 용여홍이 동료들을 불렀다.
“작은 흰둥아, 겐, 뭔가 이상해.”
자기 혼자만으로는 빈틈이 생길까 걱정이 돼서였다.
백새벽과 게네바가 창가로 다가오자, 용여홍은 냄비를 뒤집어 쓴 자가 상당히 느릿하게 전진하고 있는 걸 보았다. 속도가 느린 건 냄비를 쓴 탓에 시야가 좁아져 자신의 발치만 볼 수 있기 때문인 듯했다.
그가 쓴 냄비는 구조팀이 전에 마주친 그 두 사람이 쓰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깊었다.
계속 앞으로 나가던 그는 곧 구조팀의 지프 근처에 이르렀다.
쿵!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한 채 차와 그대로 충돌한 남자는 비틀거리다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여홍의 머릿속에는 구세계 콘텐츠에서 봤던 자해 공갈단이 불쑥 떠올랐다.
냄비를 쓴 남자는 한참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용여홍은 약간 좀 걱정이 돼서 백새벽을 향해 답을 구했다.
“내려가 볼까?”
몇 초간 고민하던 백새벽이 답했다.
“그러자.”
그리고는 게네바에게 말했다.
“겐, 너는 여길 지키면서 주위 상황 좀 감시해줘.”
“좋아.”
게네바는 이러한 방면에서 굉장히 믿을 만한 동료였다.
양손으로 창틀을 짚은 뒤 몸을 창밖으로 훌쩍 날린 백새벽은 바깥의 파이프와 불룩 튀어나온 구조물들을 이용해 두세 번 정도 뛰어 땅에 착지했다.
유전자 개조로 총기 재능을 강화한 이후, 그녀의 반응력, 판단력, 협응력은 모두 상당한 수준으로 높아져 있었다. 맨손으로 건물을 오르는 일 역시 특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꽤 잘 해냈다. 게다가 이곳은 겨우 3층에 불과했다.
현재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지 않은 용여홍은 살짝 떨며 백새벽을 따라 착지했다. 그의 동작은 백새벽과 달리 좀 뻣뻣하고 자연스럽지 못했다.
용여홍을 돌아본 백새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쫙 폈다.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고 돌아선 백새벽은 지프를 향해 다가갔다.
회백색 알루미늄 냄비를 뒤집어쓴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었다. 조금 전의 충돌로 머리가 아직도 빙빙 도는 모양이었다.
용여홍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 곁에 쪼그려 앉았다.
“왜 그러세요? 괜찮으십니까?”
상대는 아무 답이 없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백새벽을 바라본 용여홍은 냄비를 가리키며 손짓, 발짓을 다 동원했다. 이걸 벗겨 상태를 확인해봐야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백새벽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녀는 성영희가 또라이라 칭한 이들에게 모종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우스꽝스럽지만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구조팀도 구세군 내부 일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들을 아예 경계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더는 망설이지 않고 양손을 뻗은 용여홍은 냄비를 위로 들어 올렸다.
햇빛 아래, 냄비 안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상대는 노인이었다. 백발은 지저분하게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의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쪼글쪼글했다.
숨을 살짝 헐떡대며 눈의 초점을 잡지 못하던 노인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그 타락자들이 보낸 악귀냐? 얼른 냄비 돌려줘!”
예상치 못한 상대의 성마른 말투와 격한 반응에 용여홍은 당황한 나머지 냄비를 다시 상대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알루미늄 보호구를 되찾고 나서야 안정된 노인은 손으로 땅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용여홍은 매우 미안해하며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여기 넘어져 계신 걸 보고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 전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타락자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외부에서 온 유적 사냥꾼이에요. 구세군을 통해 빙원으로 가려고 합니다.”
노인은 상당히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아주 바른 자세를 하고 있었다.
“외부인이면 더 수상하지. 그럼 나처럼 이렇게 보호막을 잃고 누군가의 통제기로 비밀리에 통제당하더라도 타락자들은 절대 의심받지 않을 테니까.”
그 답에 완전한 확신을 얻은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뇌 통제를 걱정하는 사람 중 하나였네.’
백새벽은 주도적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왜 그들이 누군가에게 비밀리에 통제당한 타락자라고 생각하시나요?”
노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뻔하잖아? 지난 시간 그들은 애쉬랜드에서 아직 굶주림과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걸 잊었어.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고 귀천의 차이 따위 없다는 사실을 잊었다고.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해 더 많은 식량을 점유하고, 다른 이의 아내와 딸을 취하지 않기로 맹세한 걸 잊었고, 자신의 가족을 단속해 물자를 되팔거나, 각종 사항에 끼어들거나, 대중의 원망을 들끓게 하거나, 분위기를 흐리지 않게 하기로 했던 것도 잊었고!
난 정면에서 그들을 욕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나더러 고집불통이라고, 머리가 굳어서 소통할 줄을 모른다고, 발전의 추세를 못 본다고,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한다고 비난하더군.
난 봤어, 문제가 있는 건 그들이야. 분명 뇌를 통제당한 거야. 그러니 저렇게 타락해 최초의 이상을 잊은 거지! 그래! 저들은 분명 뇌를 통제당했어!”
냄비를 쓴 노인은 숨까지 헐떡여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여홍은 노인의 높아진 목소리에서 약간의 슬픔을 느꼈다. 동시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대감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몇 초간 침묵하던 백새벽이 화제를 전환했다.
“왜 뇌 통제라는 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노인은 조금 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듯 두어 번 헐떡인 후에야 답했다.
“내가 아까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 만약 뇌 통제기가 없다면, 비밀스러운 통제 같은 게 없다면 시신으로 산을 이루고 피바다를 건너온 이들이 어떻게 갑자기 이상마저 버리고 변할 수 있겠냐고? 그리고⋯⋯.”
이 대목에서 뜸을 들이던 그는 냄비를 쓴 머리를 살짝 드는 듯했다.
“너희들, 유적 사냥꾼으로 우베이까지 왔다면 분명 각성자도 봤겠지. 그들은 뇌 통제를 통해 목표에 영향을 미치고 각종 기이한 효과를 달성해. 이게 바로 뇌 통제의 표현 방식 중 하나인 거야!
그러나 그런 이들처럼 인공적으로 간섭하는 방식의 효율은 아주 낮아. 당시 구세계 파괴 배후 세력이 만들어낸 뇌 통제기는 한 번에 하나, 혹은 여러 도시를 뒤덮고 수십만 명의 인간들한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
우리처럼 준비해두고 알루미늄 냄비를 머리에 쓴 사람들만이 그런 비밀스러운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사고를 유지할 수 있어. 자신의 이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못된 놈들과 같은 물에서 놀지 않을 수 있다고!”
재차 격앙된 감정에 노인의 마지막 몇 마디에는 강한 힘이 실렸다.
용여홍이 내뱉듯 말했다.
“냄비를 쓰면 각성자의 영향도 막을 수 있나요?”
노인의 코 윗부분은 냄비에 가려져 표정 변화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럼, 막을 수 있다마다! 내가 뭐 하나 알려줄까? 줄곧 냄비를 쓰지 않았다면 난 벌써 무심자가 됐을 거다. 배후 세력은 뇌 통제의 비밀을 알게 된 이에게 약하게 마음먹지 않아. 철저히 통제해버려 더는 주체적인 생각을 못 하게 하든, 뇌를 직접 파괴해 무심자로 만들어버리든, 둘 중 하나거든!
수많은 내 전우들도 그랬어야 했는데, 신중하지 못했어. 매분 매초 냄비를 쓰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는 바람에 오히려 통제됐고, 무심병에 걸려 제거됐지. 휴⋯⋯.”
‘근데 건우는 냄비를 쓴 그 두 명의 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건 상대에게 영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거고.’
용여홍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이 말을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노인의 민감하고 극단적인 신경을 자극할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게다가 그는 성영희가 뇌 통제가 두려워 냄비를 쓰고 다니는 이들은 자신들이 무심병의 감염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던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 내부에선 이미 그에 대한 적합한 이유를 찾아낸 듯했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백새벽이 불쑥 물었다.
“저희한테 왜 그런 많은 것들을 알려주시는 건가요?”
원래는 계속 질문하며 상대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더 많이 끌어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로웠다. 마치 자신들이 적합한 시간과 장소에 나타난 청중이 되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냄비를 쓴 노인이 오른손을 흔들었다.
“난 너희가 우베이에 막 들어왔으면서 아직 뇌 통제를 당하지 않은 것 같길래 이야기해주는 거다. 휴,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한 명의 전우라도 늘릴 수 있다면 늘려야지.”
이 순간 용여홍은 이 자리에 성건우가 있었다면 또 한 발 나서서 오른손을 왼 가슴에 얹고 전 인류를 위한다는 그 숭고한 구호를 외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흠칫한 백새벽은 어떻게 호응할지 알 수도 없어서 겨우 인사만 짜냈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무슨 말인가 더하려다가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호텔 후문 쪽으로 홱 돌아섰다.
“타락자들의 개가 온다. 그 발소리가 들려. 이만 가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