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683
683화. 같은 꿈 (2)
그때, 성실한 성건우가 팀원 조롱 모드를 활성화했다.
“일반인의 사고방식으로 달지기의 권능을 이해하려 하면 안 되죠. 우리가 못한다고 달지기도 못하는 일이라 볼 순 없어요. 학교 내 모든 사람의 이름을 외우는 것 정도야 겐도 아무 문제 없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겐이 우리랑 같아?’
장목화는 바로 그렇게 쏘아붙이려다 그러면 성건우가 분명 달지기는 우리랑 같냐고 맞받아칠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용여홍, 백새벽, 게네바는 장목화가 혹여나 성건우에게 주먹을 휘두르진 않을지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살짝 머뭇거리던 장목화가 말했다.
“내가 겐한테 갑자기 내 캐릭터 이름을 물어본 건 말이야. 막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겨보는데 아직 남아있는 이식된 사유 속에 그 캐릭터의 일부 기억이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서야.”
사람들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과거의 일부 기억과 떼려야 뗄 수 없었다.
타닥- 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만 채워진 고요한 야영지 속에 장목화의 음성이 약간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 캐릭터가 시험 때마다 전교 3등 안에 들지만, 성격은 비교적 내향적이었다는 게 기억나. 유학하느라 줄곧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 친척 집에 얹혀살아서⋯⋯.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아. 자아를 되찾았을 때 이식된 사유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흩어져 사라졌거든.”
백새벽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제 캐릭터는 몸이 좀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수시로 감기에 걸려 결석을 하곤 했어요.”
용여홍도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제가 맡았던 캐릭터에는 열등의식이 좀 있어요. 어렸을 때 남들한테 괴롭힘을 당해서⋯⋯.”
성건우는 웃으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맡은 캐릭터는 성적이 우수해서 매번 전교 10등 안에 들고 체육도 잘하지만 열등생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어요. 짓궂고 담이 커서 누구에게나 장난을 쳐댔고요.”
게네바가 정리를 도왔다.
“각각의 캐릭터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사고방식도 있고, 나름의 배경과 과거도 있다라⋯⋯. 나한테도 수천 명의 캐릭터에 십수 년, 수십 년의 인생까지 분배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장생의 꿈은 지나치게 사실적인 편이었다. 그 안에 발을 들이면 정말로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분간할 수가 없어졌다.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이건 고민해봐야 할 요소 중에 하나야. 다른 하나는 이런 캐릭터들과 우리 사이에 많든 적든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거고.”
“나는 그걸 분배 원칙이라고 불러.”
게네바가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했다.
구조팀은 잠시 기억을 떠올린 끝에 정말 그런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목화는 막 이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다, 번뜩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라 성건우를 홱 돌아보았다.
“얼굴은 안 돼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성건우는 황급히 손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장목화는 그의 반응엔 신경도 쓰지 않고 자문자답하듯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지, 건우한테 또 분배 원칙에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거기 부합하는 인물도 있고.”
“뭔데요?”
용여홍이 물었다.
갑자기 장목화의 표정이 이상하리만치 진지해졌다.
“그 사람이 장생 영역 각성자라는 거.”
용여홍, 백새벽, 게네바 모두가 장목화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순간 두 탄소 기반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여태 구세계 파괴전에 각성자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찾은 이는 없었다.
그러니 구세계 속 한 부분인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에 각성자가 존재할 리는 만무했다.
이렇게 전제를 두면, 장생 영역 각성자 성건우가 배정될 수 있는 대상은 극히 적었다. 답은 하나밖에 남지 않는 것이었다.
이 땅에 강림했을 당시의 달지기 장생!
“건우가 맡은 도수종이 꿈의 주인공이자 한 해를 대표하는 달지기 장생인가?”
용여홍은 경외심, 심지어 두려움 어린 말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성건우가 덧붙였다.
“정확하게는 장생이 이 세상에 강림했을 때 썼던 신분인 거지.”
지나치게 무거워진 분위기에 장목화가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도수종이 장생이 된 꿈을 꾼 건지, 장생이 도수종이 된 꿈을 꾼 건지 누가 알겠어?”
‘차라리 후자였으면 좋겠네요. 전자는 우리가 도수종 꿈속의 허황된 인물이라는 거니까.’
용여홍은 소리 없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동시에 성건우는 양팔을 펼치고 몸을 살짝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을까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게네바가 나섰다.
“난 도수종이 장생의 강림체일 가능성은 극도로 낮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 밖으로 가장 먼저 끄집어낸 건 야였어, 근데도 꿈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지.”
백새벽이 한 가지 가능성을 시사했다.
“어쩌면 야가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에서 벗어났을 때 그 캐릭터 역시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간 건지도 모르지.”
게네바는 여전히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만약 도수종이 정말 장생의 강림체라면 그는 꿈의 관건일 거야. 난 그와 상호 작용을 하기도 하고, 직접 데리고 건물에서 뛰어내리기도 했어. 그런데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내 생각에 캐릭터 분배에는 숨겨진 전제가 하나 더 있는 것 같아. 공통점이 더 많은 캐릭터를 맡게 되는 거.
장생의 강림체와 야 사이엔 장생 영역에 속해 있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도수종과의 공통점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그 역할을 맡은 걸 거야.”
장목화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예외라는 전제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겠네.”
여기에서 말하는 ‘나’란 꿈의 근원, 장생의 강림체였다. 이 전제대로라면 어떤 외부자도 그의 역할을 맡을 순 없을 터였다.
“그렇지.”
게네바가 동조했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성건우는 많이 아쉬워했다. 아무래도 달지기에 씌는 경험을 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장목화가 그를 한번 돌아보았다.
“도수종이 장생이 강림체일 가능성이 극도로 낮다고 해도 그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어.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의 이상 현상을 해결할 단서가 너무 적잖아. 할 수 있는 모든 추측이나 시도는 다 해봐야지. 그래, 도수종에 대한 다른 기억은 없어?”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식된 사유에 얽혀있던 기억이었다.
성건우는 기억을 찬찬히 더듬었다.
“거의 다 잊어버렸는데. 좀 전에 말한 걸 제외하면 도수종이 외부에서 전학을 온 것 같다는 것과 집이 어디인지 정도뿐이에요⋯⋯.”
“어딘데?”
“어디서 전학 왔는데?”
용여홍과 장목화가 앞을 다퉈가며 캐물었다.
“집은 윌로우 레지던스 6동 1801호. 어디서 전학 왔는지는 모르겠고요.”
장목화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내일은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에 가기 전에 도수종의 집부터 한번 수색해보자.”
* * *
다음 날, 이른 아침.
“하버 홈랜드보다 훨씬 고급스럽네⋯⋯.”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젖혀 눈앞의 고층 빌딩들을 올려다보았다.
대리석 타일로 싸인 윌로우 레지던스 빌딩 외벽은 먼지와 빗물의 흔적, 그리고 타일 틈에서 자란 식물들에 덮여 원래 재질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백새벽이 말을 받았다.
“가정 형편이 꽤 괜찮은 편이었나 봐요.”
“주인공한테 딱 어울리는 배경이잖아?”
성건우가 상당히 흥분하며 말했다.
하지만 성실한 성건우가 곧바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구세계 콘텐츠 속 주인공 대부분이 빈곤층 출신에 평범한 편 아니었나?”
뒤이어 농담하기를 좋아하는 성건우가 우스갯소리를 하듯 대꾸했다.
“난 로맨스 소설의 남자 주인공을 말한 거야.”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이 고작 이 정도 집에서 살진 않을 것 같은데.’
속으로 중얼거리던 장목화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바로 6동 1801호로 가자. 속전속결로 끝내자고.”
한 차례 조사를 마친 구조팀은 놀랍게도 6동에 사는 사람들이 도수종 가족이 아닌, 그와 하등 관계도 없는 다른 가족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 아냐?”
용여홍이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우리 열 명 다 전부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 틀릴 리가 없어.”
성건우, 아니 성건우들은 자신 있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모종의 생각에 잠긴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만약 장생의 강림체가 정말 도수종이라면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그 꿈에서 처음엔 학생에 불과했지만, 나중엔 설법도 하고 열반에도 올랐을 거야. 즉, 그 꿈의 시간적 배경은 구세계 파괴로부터 한참 전이란 거야. 도수종 가족은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사했을 가능성도 있어.”
백새벽이 입술을 오므렸다.
“도수종에 관한 이 단서는 끊어진 것 같네요.”
“휴.”
용여홍도 동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1801호 방에 우두커니 서 있던 장목화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겐, 혹시 도수종 사진 있어?”
게네바가 금속 목을 흔들었다.
“아니, 어제 그 꿈속의 도수종은 땡땡이를 치고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것 같아.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고.”
몇 걸음 서성이던 장목화가 돌연 고개를 홱 틀어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성건우는 곧장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장목화는 그 과도한 반응에 신경도 쓰지 않고 모두를 향해 물었다.
“만약 야가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가서 도수종이라는 캐릭터를 배정받고 그 역할을 연기한다면 더 많은 기억을 얻을 수 있을까?”
“물론.”
“틀림없죠.”
“틀림없어요.”
게네바, 용여홍, 백새벽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아직 네 탄소 기반인의 머릿속엔 이식된 사유에서 기인하는 캐릭터의 기억이 남아있었다. 다만 이식된 사유 대부분은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를 나와 자아를 되찾으면서 자연히 흩어져 사라졌기에 그 기억도 온전치는 못했다.
그러니 다시 사유 이식을 받는다면 그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부 기억 또한 머릿속에 주입될 것이었다.
물론, 그 온전한 기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건우가 전과 같은 도수종으로서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성건우는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드러난 그의 얼굴엔 지나칠 정도로 진지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장목화와 곧게 눈을 맞췄다.
“차라리 제 얼굴 한 대 치시죠.”
장목화는 그를 팩 노려보았다.
“일 얘기 중이잖아!”
빠르게 표정을 다잡은 그녀가 다시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방안이 있어. 나랑 야가 다시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거야. 그러면 도수종 역할을 맡은 야는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 스타일, 그와 관련된 일부 기억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나는 기회를 봐서 도수종한테 질문하고, 겐은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들으면서 답을 기록하면 돼.”
용여홍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근데 팀장님도 학교에 들어가면 서연교로 변해 버리잖아요. 도수종한테 그런 질문들을 해야 한다는 건 어떻게 기억하려고요?”
“맞아요.”
백새벽도 동조했다.
순간 장목화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러니 일정 사유를 미리 이식해둬야겠지.”
‘아, 독을 독으로 물리친다?’
용여홍의 머리를 스친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