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694
694화. 각자의 꿈
지프 안, 보조석에서 용여홍도 노부흥이 남긴 편지를 다 읽었다.
그는 감정이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는 인혜 병원 식물인간 재활 센터에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러지 않았다면 전부 다, 음⋯⋯.”
말끝을 흐린 건 게네바는 죽음을 면했을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인혜 병원 식물인간 재활 센터는 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곳인 듯했다. 각기 다른 방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위험을 맞닥뜨리게 되는 데다가 딱히 대비할 방법도 없는 모양이었다.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모종의 의미에서는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지.”
구조팀은 본래 인혜 병원 식물인간 재활 센터를 굉장히 중시했었다. 그곳을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보다 더 위험한 곳으로 여기며 최후의 탐색지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부흥이 남긴 편지를 본 이후엔, 장목화는 자신이 인혜 병원 식물인간 재활 센터에서 마주칠 위험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해도 미쳐버리거나, 식물인간으로 변하거나, 무심병에 걸리거나,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그 현상에는 조짐이랄 것도 없어서 이상을 감지할 수도 없었다. 어느 팀이라도 겁을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탄소 기반 생물이 아닌 지능 로봇, 유전자 개조와 생체 공학 의수 이식을 진행한 그 강력한 인간이 포함된 구조팀이라도 그곳에서는 한두 명의 동료를 잃고 나서야 문제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장목화도 각기 다른 방의 이상 현상이 신세계 교차점과 관련돼 있으리라 의심하고 있기는 했다. 신세계의 곳곳으로 통하는 교차점들이라면 그것이 발휘하는 효과도 서로 다를 것이었다.
그리고 구조팀은 신세계 교차점을 감지할 수 있는 도구인 육식주와 생명 천사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즉, 구조팀은 어느 정도는 미리 문제를 감지하고 위험한 방을 피할 수도 있으리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장목화는 이를 크게 자신하진 못했다. 그녀 역시 인혜 병원 식물인간 재활 센터의 본질적인 문제가 꼭 신세계 교차점이라 확신할 순 없었다.
그렇게나 위험한 상황에 내려진 잘못된 판단은 정말로 팀원의 전멸을 초래하게 될 수도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모든 문서를 다 확인한 장목화가 정리했다.
“보니까 모든 단서는 제8 연구원을 가리키고 있어. 그들은 구세계 파괴전 대대적으로 식물인간을 모아들인 뒤 신령의 금기를 건드릴 정도로 굉장히 위험한 실험을 진행한 거야.
그것 때문에 무심병이 폭발했고 구세계는 파괴됐지. 그들도 모종의 영향을 받고 어둠의 앞잡이가 되어 상응하는 흔적을 제거하려고 노력 중이고.
그들의 2호 기지는 아마도 모든 문제의 기원인 것 같아. 만약 방민서, 이진용의 아들 이휘영과 강소월이 그곳으로 이송된 거라면 말이야.”
성건우는 실망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근데 우린 제8 연구원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는 또 고개를 틀어 게네바를 보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겐, 미사일 궤도로 제8 연구원의 구체적인 좌표를 알아낼 순 없어?”
“데이터가 충분히 수집됐다면 가능한데, 그때의 발견은 좀 늦은 편이었지.”
솔직한 게네바는 성건우의 희망을 싹둑 잘라버렸다.
장목화가 말했다.
“게다가 난 미사일 기지랑 제8 연구원 본부가 꼭 같은 곳이리라 생각하진 않아. 일반적인 연구원이 건립 당시 그렇게 많은 미사일을 준비해뒀겠어?
구세계 파괴 후에, 제8 연구원이 비밀 미사일 기지 몇 곳을 장악해서 계속 유지하고 보수해왔다는 게 더 그럴듯한 추론이야.
음, 그 미사일 기지들은 방호 시설도 단단히 갖춰뒀을 거야. 제8 연구원이 나중에 본부를 그런 곳으로 옮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네.
앞으로 우리는 제8 연구원이 어디에 있을지 조사한 뒤 회사와 구세군이 그곳을 포위 공격할 수 있도록 해야 해. 근데 그 전에 일단 회사로 돌아가 좀 휴식을 취하면서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보자.”
“좋아요, 좋아요.”
용여홍이 가장 먼저 동의했다.
“그럼 이 문서와 유서들은요?”
감정을 중시하는 성건우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여기 며칠 더 있으려고 했어. 근처에 있는 구세군 관측소에서는 분명 미사일 폭격 사건을 감지했을 거고, 수색을 위해 누군가 파견해 현장을 조사하게 했을 테니까. 그 사람들한테 문서랑 유서를 넘겨주려고 했어.
근데 지금 우리 차에 핵탄두가 실려 있잖아. 이렇게 민감한 곳에서 그 상태로 구세군과 만나기에는 문제가 좀 있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지금 바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기회를 봐서 문서를 한 부 복사한 뒤 구세군 세력 범위를 떠날 무렵에 문서랑 유서가 든 배낭을 성영희에게 넘기는 거야.”
“좋은 방법인 것 같네요.”
백새벽이 응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가 싶던 성건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는 수밖에 없겠어요.”
장목화는 더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운전하는 백새벽에게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돌아가자.”
지프가 천천히 타이 시티를 벗어나는 동안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틀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 구세계 유적은 이미 진정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붕괴한 건물들 가운데 서 있는 일부는 꼭 묘지에 세워진 비석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창밖으론 여름날 바람이 불어왔다. 빙원에 이른 바람은 온화하고 부드러웠지만 그다지 따뜻하지는 않았다.
* * *
파란가를 따라 며칠을 걸어서 이동한 끝에, 고행부 승려들도 마침내 타이 시티 부근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너진 건물들과 곳곳이 불에 탄 흔적을 목격하고, 다들 한동안 침묵한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몇 분 후에야 파란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큰 재난이 닥쳐올 거예요.”
* * *
구세군과 퍼스트 시티의 경계, 구름산의 형편없는 도로 위.
지프의 운전대를 잡은 장목화는 인공지능 내비게이션 성건우의 도움 아래 높은 산과 험준한 령 밖으로 향했다.
“왜 배낭을 성영희한테 넘기자마자 떠난 거예요?”
성건우는 그곳에서 좀 더 있으면서 밥 한 끼라도 얻어먹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슬퍼하는 모습을 못 보겠더라.”
성실한 성건우는 잠시 성실하게 심사숙고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건 좀 실례기도 하고 마음도 아프겠네요.”
뒷자리 가운데에 앉은 용여홍은 백새벽의 오른손을 쥔 채 고개를 빼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이제 바로 회사로 가는 거예요?”
“그래.”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도중에 여러 차례 물자 보충과 충전이 필요하기는 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반고 바이오로 돌아갈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때가 되면 겐 너는 위드 시티나 검은 늪 황야 어디서 핵탄두를 지켜줘.”
장목화의 당부에, 게네바도 곧장 수긍했다.
“그럼, 문제없지.”
성건우가 얼른 덧붙였다.
“잘 지키고 있어야 해! 나중에 어딘가 쓸 데가 있을지도 몰라. 이번에는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랑 인혜 병원을 폭파하진 못했지만, 나중에는 누군가를 놀라게 해줄 수 있을 거야.”
‘뭐, 어째 넌 좀 아쉬워하는 것 같다?’
장목화가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렇게 한담을 나누던 도중, 용여홍이 돌연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새, 새벽이랑 상의를 좀 해 봤는데요. 회사에 돌아가면 바로 질서감독국에 혼인 신고를 하고 친척들과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식사 대접을 하려고요. 팀장님, 올 수 있으시죠?”
뭐, 성건우야 공짜 밥 먹을 기회를 거절할 리 없으니 물을 필요도 없었다.
장목화는 운전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어떤 선물을 줘야 하나? 고민 좀 해봐야겠는데.”
“선물은 필요 없어요.”
“맞아, 맞아요.”
백새벽과 용여홍이 연이어 손사래를 쳤다.
뒤이어 용여홍은 한숨을 내쉬었다.
“꼭 꿈꾸는 것 같아요⋯⋯.”
순간 성건우가 픽, 웃음을 흘렸다.
“이게 네 꿈 맞잖아. 짝을 찾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매일 고기반찬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거.”
“맞아.”
용여홍은 약간 부끄럽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용감하게 인정했다.
성건우도 피식 웃곤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새벽아, 그럼 네 꿈은 뭐야?”
백새벽은 잠시 할 말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등을 믿고 내줄 수 있는 동료, 그리고 손잡고 함께 죽음을 마주할 수 있는 짝을 만나는 것.”
그 말에 용여홍이 백새벽의 손을 더욱 꼭 그러쥐었다.
성건우는 여세를 몰아 게네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겐, 너는?”
게네바는 눈으로 붉은빛을 몇 차례 번득인 뒤에 말했다.
“난 이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어느 정도 갈피를 잡았어. 앞으로는 인간의 의의를 찾을 생각이야.”
짝짝짝!
성건우가 박수를 보낸 뒤, 끝으로 장목화를 돌아보았다.
“팀장님은요?”
장목화가 웃었다.
“나? 당연히 구세계 파괴 원인과 무심병의 기원을 밝혀내는 거지. 그게 인류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예리한 칼을 제거하는 방법이니까.”
시선을 거둔 성건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 꿈은요⋯⋯.”
“아무도 안 물었거든?”
장목화가 끊어내도 성건우는 꿋꿋이 자세를 바로하고 말을 이어갔다.
“전 인류를 구원하는 거예요!”
장목화는 그를 조용히 흘기다 옆에 놓인 소형 스피커 스위치를 눌렀다.
스피커에서는 그녀가 최근 몇 달 동안 즐겨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 어렸을 적 꿈을 아직 기억하니, 영원히 지지 않는 꽃 같은⋯⋯.
잔잔히 번지는 노래를 싣고, 지프는 구름산을 빠져나왔다.
투명한 앞 유리창으론 끝없는 황원이 펼쳐져 있었다.
* * *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 입구.
현재 유정식이 휘하에 있는 안전부 직원 한 팀을 데리고 은백색 대문 뒤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은 다들 하나 같이 늘어진 상태였다. 본래 이곳에 의자를 대량으로 가져다 두었는데, 모두가 축 처진 채 앉아있거나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거나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총을 쥐고 두 신형 스캐너 옆을 진지하게 지키는 건 네 사람뿐이었다.
이건 절대 이들이 나태하고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매일 지하 빌딩에 진입하는 인원의 수는 상당히 제한돼 있어서 대개는 할 일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억지로 모두에게 고도의 경계를 주문했다간 심신만 지쳐서 겉으로 집중한 시늉만 하지 실제론 정신을 빼놓는 결과만 낳을 뿐이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땐 조를 나눠 근무하는 편이 나았다. 총 넷으로 이뤄진 한 조가 1시간씩 돌아가면서 일을 맡는 식이었다.
허리 받침이 있는 등받이 의자에 앉아 부하들을 슥 훑어보던 유정식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네 근무자가 경계에 바짝 집중하고 있는 것도 만족스러웠고, 나머지 직원들이 편안하게 쉬고 있으면서도 근무 중이라는 의식을 잃지 않고 마지막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 역시 만족스러웠다.
‘정말 질리지 않는 나날이야.’
몸을 뒤로 살짝 젖혀 전에 애쉬랜드에서 주워온 메탈블랙 색상의 보온컵을 집어 든 유정식은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는 할 일은 적고, 공헌 점수는 많이 받고, 위험하지는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이에 부러움을 느끼고 그를 밀고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상사로부터 좀 조심하라는, 입구를 지킬 때 너무 늘어져 있지 말라는, 그러다가 누군가에게 꼬투리를 잡히기 쉽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유정식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망할 자식들, 내가 지금 같은 삶을 누리는 건 전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정말로 D8 팀장급이 연줄과 경력만으로 이 나이에 이런 일을 맡은 줄 아는 건가? 10년 이상의 풍부한 경험도 없는 나 같은 직원한테 회사가 입구 관리와 같은 중책을 맡겼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안전부의 외근 직원 사망률은 절대로 낮지 않았다. 별도의 보상금과 더 나은 식사, 개인에게 돌아가는 우연한 수확이 있다고 해도 외근직에 지원하려 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직급이 같다면 기본급도 같고, 별도의 보상금이나 더 나은 식사가 목숨을 걸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