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698
698화. 한담
용여홍 역시도 그제야 상대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했다.
까무잡잡한 피부, 누런 치아, 얽은 얼굴, 충혈된 눈.
남자는 딱 봐도 유전자 개량을 받지 않은 외부 출신 직원이었다. 미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생김이 흉측하거나 끔찍한 수준도 아니었다.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용여홍은 그래도 질문을 그치지 않았다.
“그럼 방금은 왜, 왜 신음을 했습니까?”
“변비에도 걸리면 안 되는 건가, 형씨?”
남자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유순해져 있었다.
용여홍이 어색하게 웃었다.
“외근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긴장하고 있었나 봐요, 괜히 과민하게 반응했네요. 죄송합니다.”
“이해해, 이해해.”
관대한 남자는 잠시 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 그렇게 내 앞에 서 있어야 해? 아니지, 내가 문을 닫아도 되나?”
“물론이죠.”
용여홍은 어두운 조명 탓에 자신의 안색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굉장히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칸의 문이 안쪽으로 휙 돌아가며 닫혔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르던 중, 안쪽의 남자가 다시금 운을 뗐다.
“어느 행동대대 소속이지? 그 기계 팔은 어디서 얻었나?”
“저는 특별행동팀 소속입니다. 기계 팔에는 왜 관심을 보이는 거죠?”
보안 유지 원칙에 따라 용여홍도 모호한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칸 안의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외부 출신 직원이라 아직 유전자 개량 자격을 얻지 못했거든. 게다가 수시로 밖에 나가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내, 내근직으로 전환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남기 위해선 기계 팔을 하나 장착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잠시 고민하던 용여홍이 진지하게 말했다.
“굉장히 비쌉니다.”
“휴⋯⋯.”
칸 안의 남자는 재차 탄식했다.
용여홍은 임무 중 팔을 잃으면 생체 공학 의수 이식을 무료로 받을 수는 있다고, 그것도 선택의 여지는 없으며 훌륭한 기능을 갖춘 생체 공학 의수를 받기는 힘들 거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팔을 잃게 되면 출혈이 과하게 발생하고, 제때 구조를 받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특히 때맞춰 치료를 받기 힘든 지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대신 돌아선 용여홍은 그대로 공용 화장실을 떠났다.
* * *
용여홍도 방금 만난 남자의 상황과 비교하면 자신의 현재 상황은 확실히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임무하러 나가는 일이 더 이상 없다면 더 좋겠지만.
이내 용여홍은 손전등으로 주위를 비췄다.
벽 곳곳에 각색 분필로 그려진 낙서가 있었다. 은근한 것도, 유치한 것도, 과장된 것도 다양한, 각자 다 특징이 있는 낙서들이었다.
495층과 다르지 않은 광경이었다. 그건 다른 층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여홍은 이에 묘한 기쁨을 느꼈다.
이건 외부 출신 직원들이 회사에 녹아들고 있다는 방증이자 그들 사이에 후대가 탄생했다는 뜻이었다.
점점 B구역 59호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경쾌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서너 걸음을 내디뎠을 무렵, 용여홍이 돌연 또 우뚝 멈춰 섰다.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한동안 귀 기울여도 코 고는 것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역시 아직 긴장을 완전히 놓지 못한 거야⋯⋯.”
용여홍은 자조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B구역 59호로 향했다.
* * *
다음 날 오후, 647층 14호.
손잡고 나란히 사무실로 들어온 용여홍, 백새벽은 안에 성건우 혼자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건우는 굉장히 방만한 자세로 의자를 뒤로 끝까지 눕힌 채 두 다리 다 책상에 턱 하니 올려놓고 있었다.
용여홍은 백새벽이 손을 놓고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팀장님은?”
성건우가 찬란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맞혀봐.”
‘또 길을 잃으셨나?’
용여홍은 본능적으로 이렇게 답하려다가 돌연 서늘해지는 뒷골에 정신을 번뜩 차렸다.
‘만약 복도에서 배회하던 팀장님이 내가 뒷담하는 걸 듣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져. 팀장님 청력은 전 같지 않잖아.’
그는 고개를 홱 돌려 뒤를 살폈지만 근처를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곁눈에 자신의 뒤통수에서 몰래 손을 거두는 백새벽만 들어올 뿐이었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용여홍은 진지한 얼굴을 한 백새벽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목격하고 따라서 웃었다.
“멍멍!”
성건우가 짖었다.
따르릉!
용여홍이 막 난감해할 무렵에 때마침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얼른 받아.”
용여홍의 말에, 성건우가 별것 아니라는 양 답했다.
“분명 팀장님 찾는 전화일 거야. 팀장님도 안 왔는데 전화 받아서 아무 변명이나 대느니 차라리 안 받는 게 낫지.”
“하긴.”
용여홍은 잠깐의 고민 끝에 납득했다.
백새벽도 반대하지 않았다.
전화 소리는 한동안 이어지다가 겨우 끝이 났다.
그로부터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장목화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평소처럼 팀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장목화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기가 다시금 울렸다.
수화기를 든 그녀는 간단히 호응한 뒤, 성건우를 향해 크게 외쳤다.
“야! 너 찾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건우는 멀리 떨어진 수화기를 향해 소리쳤다.
“저를 무슨 일로요?”
그와 동시에 장목화 곁에 이른 그는 바로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성건우가 가진 협조성과 균형 능력, 달리기 속도, 타이밍 잡는 능력까지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이를 보고 흠칫한 장목화는 곧 뭔가를 깨달은 듯 입 모양으로 물었다.
‘내가 무슨 능력이라도 발휘해줘?’
구세계 어느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었다.
성건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한번 웃곤, 전화를 시작했다.
몇 마디 나눈 후 수화기를 내려둔 그가 넘치는 의욕을 드러냈다.
“소 이사님이 절 찾는대요.”
소 이사란 안전부를 관리하는 회사 이사회의 이사, 소지훈이었다.
“소 이사님이 널 왜?”
용여홍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성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몇 초간 고민하던 장목화는 추측에 나섰다.
“넌 이미 네가 각성자란 사실을 털어놨어. 정신적인 문제는 대가였으니 C-14 프로젝트팀 검사랑 정신과 의사 평가는 필요가 없어졌지. 대신 널 관찰하는 건 같은 각성자이자 이사회에 소속된 소 이사님한테 넘어간 거고.”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법이었다.
멍한 표정을 보이던 성건우는 돌연 빽 소리를 쳤다.
“안돼!”
“왜?”
백새벽은 그 반응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건우의 얼굴에는 실망한 빛이 떠올랐다.
“인 선생님이랑 대화하는 건 편했고, C-14 프로젝트팀 전속 식당 음식은 엄청나게 맛있었단 말이야.”
장목화가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어떻게 하겠냐.”
꽤 오랫동안 침묵하던 성건우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사람은 앞을 보고 살 줄 알아야 하는 법이죠. 이사회 전속 식당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순간 그의 눈에 다시금 생기가 감돌았다. 당장 이사회 전속 식당으로 달려가고 싶은 눈치였다.
* * *
지하 빌딩 5층, 관리구역.
성건우는 506호에서 이사회 이사 소지훈을 만났다.
소파 구역에 선 소지훈이 맞은편을 가리키며 웃었다.
“와서 앉아.”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한 경비 몇몇은 아직 방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성건우는 널찍한 나무 책상과 검은색 등받이 의자가 놓인 사무 구역을 바라보며 의혹을 드러냈다.
“소 이사님, 왜 저기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이사님 의자에 앉아 계시면 제가 책상 맞은편에 앉으면 될 텐데요. 그쪽이 더 정식적이기도 하고요.”
회색 작전복 차림의 소지훈이 무슨 답을 하기도 전, 다시 성실한 성건우가 자문자답하듯 말을 이었다.
“인재를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기 위해서군요.”
40살이 조금 넘은 소지훈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두어 번 헛기침했다.
“업무 이야기가 아니라 한담이나 나누자는 거야. 앉지.”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가진, 열악한 환경에 갈린 남자의 각진 얼굴은 머지않아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이후로 경비들이 방을 떠나고 성건우가 맞은편의 긴 소파에 앉자 소지훈은 그제야 웃음을 보였다.
“장문봉 씨 따님이 제출한 보고서는 이미 다 확인했어. 근데 자네의 각도에서 자네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더라고.”
성건우가 자세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말하자면 깁니다.”
소지훈은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하라고 답하려다 성건우가 여태 보인 모습을 떠올리곤 그냥 미소만 지어 보였다.
잠시 기다리던 성건우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구조팀이 철강 공장 폐허에서부터 타이 시티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중요한 일들을 한 차례 들려주었다.
장목화가 보고했던 그대로였다. 차이점이라고는 옥 부처의 효과를 강조했는지, 강조하지 않았는지가 전부였다.
지금까지 전보에 옥 부처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장목화도 이번 보고에는 타이 시티의 일 덕분에 철강 공장 폐허에서 얻은 그 물건의 특수성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적은 바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수시로 고개를 끄덕이던 소지훈이 입을 열었다.
“그 옥 부처랑 육식주가 있으니 생명 천사 목걸이가 없어도 신세계 교차점을 발견할 수 있겠군. 와, 신세계 교차점을 처음 마주하자마자 거기 대항할 방법을 찾아내고 고강도의 전류를 방출하다니, 자네들은 능력뿐만 아니라 머리 역시 명석하군.”
성건우는 장목화를 대신해 겸손을 떨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잠시 또 생각하던 소지훈이 다시 물었다.
“그것 말고 자네 자체적으로는 무슨 변화가 있었나?”
순간 성건우는 그 이야기면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다는 듯 굴었다.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에서 장생의 꿈을 마주했을 때, 전 학교 교문에서 잠들어 제 심령 방 주위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 관찰해봤습니다.”
소지훈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진지해졌다.
“무슨 변화가 있던가?”
성건우가 웃었다.
“그전까지는 없던 방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102호가요!”
소지훈은 눈이 살짝 커졌다.
“102⋯⋯. 하……, 102호에 대응하는 건 장생이었군. 염호뿐만 아니라 회사의 어느 각성자도 그 방에 들어갔다가 완전히 미쳐버렸지.”
긴 한숨을 뱉은 그가 법랑 컵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성건우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이 들어간 방이 102호라는 건 어떻게 확인하셨습니까?”
소지훈이 덤덤하게 답했다.
“회사에 있는 모든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새로운 방을 탐색하기 전 이사회에 그 방의 번호를 미리 보고해야 하거든. 그래야 구조를 받을 수 있으니까.”
탁!
성건우가 소리 나게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저는 보고하지 않았는데요!”
흠칫 놀란 소지훈이 물었다.
“자네, 자료상에 언급되지 않은 새로운 방에 들어갔었나? 심령의 복도 깊은 곳까지 탐색하기 전엔 자료에 나온 순서대로 트라우마를 통과해야지!”
심령의 복도 깊은 곳까지 탐색하고 난 이후 신세계로 통하는 문을 찾는 작업은 비교적 개인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자료에 언급된 방으로부터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게 아닌 이상 누구도 낯선 방을 목표로 삼지는 않았다.
그래서 소지훈도 성건우에게 딱히 이를 주의시키지 않았다. 세상에 어느 누가 쉬운 길을 버리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려 하겠는가?
지금 이 순간 소지훈은 자신이 성건우의 정신 문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어쩌면 단순한 인격 분열뿐만 다른 문제가 더 있는지도 몰라. 아니면 분열된 인격들이 극단적으로 구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