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709
709화. 하늘이 도우시는구나
타르난, 세린 드림 여관.
프론트 데스크에 앉은 여관 사장 아이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약간 멍하게 구세계 드라마 한 편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돌연 몸서리를 쳤다.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둔 옛일이, 원래는 친절하고 부드러웠지만 냉담하고 딱딱하게 변했던 하나하나의 얼굴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이노는 그 섬을 극복하면서 이미 모든 두려움을 떨쳐냈지만, 이따금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렸다.
그러나 전과 달리 방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모두가 자신을 향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노래에 맞춰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어째 더 무서운데⋯⋯.”
아이노가 낮게 혼잣말을 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당시 가족 구역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은 이들이 표정을 바꿔 웃음을 지어 보일 리는 없었다.
아이노는 누군가 자신의 심령 방에 난입해 그 트라우마를 탐색하고 있으리라 의심했다.
한 차례 표정 변화를 보이던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중얼거렸다.
“드라마나 보자. 탐색을 마치고 나면 알아서 나가겠지.”
그녀의 대가는 현실 도피였다.
* * *
정신력의 거의 고갈될 때가 되어 어쩔 수 없이 506호에서 나온 성건우는 그제야 사유 이식의 효과에서 벗어나 판단력을 되찾았다.
턱을 쓰다듬던 그가 의혹에 휩싸여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믿었는데도 안 되네⋯⋯. 어떻게 해야 하지?”
* * *
같은 시각, 349층 C구역 12호.
장목화 역시 506호의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의 줄기가 끝도 없이 뻗어가던 그때, 갑자기 의문이 몇 개 떠올랐다.
‘506호 주인은 제4 연구원 가족 구역 주인이거나 일찍이 그곳에 머무르며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일 거야. 그곳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과 잘 알고 있었고,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애정을 갖고 있었지.
근데 왜 갑자기 제4 연구원 가족 구역의 사람들한테 단번에 버림받은 걸까? 왜 그렇게 냉담하고 차가운 대접을 받게 된 거지?
무슨 짓을 저질렀나? 무슨 문제를 일으켰나? 아니면, 발견해서는 안 될 비밀을 발견하기라도 한 건가?’
장목화는 506호 방 주인에게 있던 일에 상당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녀가 볼 땐 상대와 제4 연구원의 관계는 구조팀과 반고 바이오의 관계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장목화 본인을 비롯한 사람들을 반고 바이오에서 떠나도록 하는, 가족, 친척, 이웃과 지인 직원들이 단번에 자신들을 증오하게 할 일이 대체 무엇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장목화는 당시 506호 방 주인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 제4 연구원을 치명적인 재난에 빠뜨린 건 아닐지 의심하고 있었다. 현재 그 트라우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물론 이는 성건우가 접한 상황과 파악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추측에 불과했다.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단서가 나오면 얼마든 뒤집힐 추측이었다.
또한 이 추측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반고 바이오가 현재까지 파악한 506호의 두 트라우마와 성건우가 진입한 세 번째 트라우마 중 죄책감, 부끄러움, 참회 등의 감정에 연루된 것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장목화는 고향 사람들의 태도 변화를 잊지 못하고 그게 고통스러운 기억이 된 사람이 엄청난 실수를 편안하게 받아들였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속이고 최면을 걸었다고 한들 잠재의식에는 그런 죄책감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실수로 여기지 않는 한에는, 지금까지도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믿고 있는 게 아닌 한에는 그랬다.
하지만 506호 방 주인은 가족, 친척, 친구와 이웃들의 태도가 바뀐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문제는 제4 연구원에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장목화는 성건우가 첫 번째 트라우마에서 봤던 변이 시체들을 감안할 때 이 추측이 조금 더 합리적이란 생각으로 기울었다.
“하…….”
결국 그녀는 한숨과 함께 생각을 접었다. 내일 성건우에게 506호의 트라우마를 통과했느냐고, 어떻게 통과했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집 밖 복도에서 방송이 나왔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입니다.”
* * *
백새벽의 방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용여홍은 익숙하고 앳된 목소리의 방송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소문에 허정민은 사실 유전자 개량의 실패 사례 중 하나래. 키가 160센티미터도 안 된대. 근데 성격이 워낙 밝고 목소리도 좋아서 자포자기하지 않고, 결국 지난 7년간 회사 직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스터가 됐다더라고.”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이도 많지 않겠네. 많아 봤자 서른 살도 안 되겠는데. 난 너희가 어렸을 때부터 방송을 듣고 자란 줄 알아서 벌써 한 마흔은 됐을 줄 알았어.”
“하하, 마흔 살이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겠어?”
웃으며 답하던 용여홍은 다음 순간 말을 번복했다.
“모르겠네, 허정민은 지금 스물일고여덟 살 정도인데 목소리는 전과 똑같거든.”
“태생적으로 앳된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나서 예순 살이 넘을 때까지 그 목소리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어.”
백새벽은 실제로 예전에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퍼스트 시티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허정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던 용여홍은 곧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볼게.”
승진도 하고 보상도 받은 날이니 얼른 가족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현재 그는 D8급 직원이었다. 내근직으로 전환하고 안전부에서 벗어난다면 D9급으로 한 단계 더 승진할 수도 있었다. 그건 관리층이 되는 일은 애초에 엄두도 낼 수 없는 일반 직원들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직급이었다.
또 용여홍이 오늘 집으로 돌아가려는 건 아직 혼인 신고를 하지도 않았는데 계속 백새벽의 집에서 자는 게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배웅해줄게.”
백새벽이 따라서 일어났다.
용여홍은 괜스레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 * *
방에서 나온 용여홍은 백새벽의 손을 잡고 걸었다. 거리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복도인 곳을 걸어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때, 한동안 말이 없던 백새벽이 물었다.
“너희 집에 갈 때 혹시 뭐 주의해야 할 거 있어?”
용여홍은 진지하게 생각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특별히 없는데? 팀장님 말처럼 그냥 평범하게, 예의 있게 있으면 되지.”
솔직히 그도 이런 경험이 전무해서 장목화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장목화도 상견례를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 집에 종종 초대받아 방문했고, 그럴 때마다 예의 바르다는 칭찬을 들었다고 했으니 용여홍도 그냥 그녀의 말을 믿는 것이었다.
용여홍은 문득 장목화가 그 말을 할 때 성건우가 곁에서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것도 생각이 났다.
“진짜로 팀장님이 예의가 발라서 그랬을까요? 그냥 인사치레였을 수도 있죠. 팀장님 아버님이 관리층이시잖아요.”
그때 장목화는 용여홍과 백새벽에게 예의도 없고 눈치도 없는 사람이 어떤 말로를 맞는지 몸소 그 자리에서 보여주었었다.
“응.”
백새벽은 팀장의 가르침 중 핵심을 떠올렸다. 많이 듣되 말은 적게 하고, 많이 칭찬하되 불만은 줄이고, 많이 웃되 움직임은 최소화하라.
간만에 여자친구를 다독일 기회를 포착한 용여홍이 막 무슨 말인가 하려는데, 순간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까무잡잡하고 얽은 피부, 충혈된 눈, 평균 이하의 생김새를 가진 그는 딱 봐도 유전자 개량을 받지 못한 자였다.
용여홍은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상대는 한밤중에 방문한, 이 층의 화장실에서 마주친 외부 출신 직원이었다.
회색 제복을 입은 남자는 약간 서두르는 걸음으로 빠르게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백새벽이 고개를 돌려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 아는 것 같네?”
“아, 건우가 장난쳤을 때 화장실에 갔다가 본 사람이야.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더라고.”
용여홍이 솔직하게 답했다.
이내 백새벽이 말을 받았다.
“음, 이성철이라는 사람이야. 작년에 회사에 가입했어. 듣기로는 성격이 좀 거칠대. 수시로 다른 사람들과 말다툼을 한다나 봐. 회사에 질서 감독실이 없었다면 몸싸움으로 번졌을지도 몰라.”
“그래? 그렇게 나쁜 성격은 아닌 것 같던데.”
용여홍은 자신과 짧게 마주친 이성철이 꽤 예의가 발랐다는 감상을 표했다. 실제로 용여홍이 무턱대고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어도 당시 이성철은 부끄러움에 화를 내긴 했지만 무슨 욕설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백새벽은 용여홍의 기계 팔을 슥 훑어보며 대꾸했다.
“황야유랑자였던 사람이 항상 거칠게 구는 건 아냐. 그런 사람은 대개 이 나이까지 살아남지 못 하거든.”
그 후,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뭔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었다.
“저 사람, 수시로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나 봐. 다른 이웃들도 저 사람을 몇 번이나 마주쳤다고 했어.”
“뭐, 이상한 건 아니잖아. 습관일 수도 있고.”
용여홍은 그 사실에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렀다. 아쉽다는 듯 작별 인사를 한 용여홍은 495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는 잠시 물자 공급 시장에 들러 과일과 간식을 샀다.
* * *
“와, 이번에도 맛있는 거 사 왔네?”
용애홍이 바로 달려와 용여홍이 든 자루를 받아들었다.
고홍자는 기분 좋게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뭘 또 사 왔어? 전에 사 왔던 것도 이제 겨우 다 먹었는데.”
용여홍은 이 기회를 빌려 소식을 전했다.
“이번 임무에 따른 보상을 받았거든요. 3만 점이에요.”
“3만 점이나?”
용애홍은 오빠가 돌아올 때마다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기쁨을 감추지는 못했다.
용대용은 뿌듯해하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고홍자가 활짝 웃으며 목소리를 잔뜩 낮춰 물었다.
“승진은 안 했니?”
용애홍도 귀를 쫑긋 세웠다.
“이제 D8이에요.”
용여홍은 승진 사실을 밝히는 것에 갈수록 여유로워지고 있었다. 더는 홍보를 위해 성건우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아, 하늘이 도우시는구나.”
고홍자는 양손을 모아쥐고 살짝 흔들었다.
연이어 용애홍은 기대감을 잔뜩 드러냈다.
“오빠! D9로 승진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는데? 어느 날 관리층에 진입하면 나도 더 좋은 직무를 배정받을 수 있겠다! 우리 학교 친구들은 아마 부러워 죽으려고 할걸? 다들 내 시누이가 되려고 줄을 설 거야!”
고홍자가 딸을 나무랐다.
“얘가,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 오빠를 이용하려고? 직무 배정에 손대는 건 금기인 거 몰라?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직무 배정 자체는 건드리지 않고 일이 년 정도 배정받은 직무에서 일하게 한 다음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제야 전출을 시키잖니.”
“아이고, 아직 정해진 일도 아닌데⋯⋯. 저 두 사람 좀 봐라, 어휴⋯⋯.”
용대용이 작게 중얼거리며 용여홍을 쳐다보았다.
용여홍은 그저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행복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게다가 그는 관리층이 될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