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710
710화. 다 들어주지
다음 날 오전, 647층 14호.
성건우는 제4 연구원 가족 구역에서 겪은 상심과 단장을 상세히 전한 뒤,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다들 원래 태도로 절 대했고, 저도 그 상황을 진짜라고 믿었는데 왜 그 트라우마를 통과할 수 없었던 거죠?”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 모두 침묵에 빠진 채 이유를 찾았다.
그리고 하나하나 추측들이 속속 부정되었다.
그때, 장목화가 문득 성건우가 전에 언급한 특정 사건을 떠올렸다.
“네가 전에 그랬잖아. 폭발이 발생한 후에 그 사람들이 널 봤을 때 표정이 냉담하고 얼굴 근육이 경직된 게 꼭 감정 없는 시체들 같았다고.”
“네.”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목화는 모종의 생각에 잠긴 채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진짜 시체로 변해버린 건지도 몰라. 제4 연구원 가족 구역에서 뜻밖의 사건이 발생해서 이미 다 죽어버린 거야.
방 주인은 그들이 죽기 전 자신에게 보였던 태도를 떨쳐내지 못하고, 영원히 그 태도를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잘 아는 거지. 그 기억이 트라우마로 변한 것도 그것 때문일 거야. 네가 아무리 그들의 태도를 바꾼다고 해도 방 주인은 그게 거짓이란 걸 알 수밖에 없어.”
성건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방 주인은 어떻게 그 두려움 섬을 극복하고 자신과 화해한 걸까요?”
장목화가 고민했다.
“그건 아무래도 방 주인에 대한 제4 연구원 가족 구역 사람들 태도가 바뀐 원인에서 찾을 수 있겠지? 그 원인을 파악해야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고.”
뒤이어 장목화는 어젯밤 했던 추측을 얘기했다. 방 주인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거나 특정 비밀을 발견하는 바람에 제4 연구원이 끔찍한 재난에 휩싸였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태도도 일시에 바뀌었으리라는 추측이었다.
용여홍은 듣는 것만으로도 무섭다는 듯 중얼거렸다.
“자기가 나고 자란 곳을 배신하다니,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짓이에요.”
그는 스스로를 반고 바이오와 분리하지 못했다. 만약 용여홍 자신에게 그런 일이 생겼더라면 자살을 택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성건우는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 거대한 건물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이렇게 30년을 살아왔어⋯⋯.”
그를 팩 노려보던 장목화가 무슨 말인가 하려던 순간,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성건우의 보고를 받은 소지훈이 대면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전화였다.
* * *
지하 빌딩 5층, 소지훈 사무실.
성건우는 이곳에서 이사회의 이사를 다시 만났다.
“나한테 갑자기 할 얘기가 있다고?”
소지훈이 컵에 담긴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제도 선사는 곧장 답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 이사님, 제가 제출한 보고서는 괜찮았습니까?”
소지훈은 티슈 한 장을 뽑아 입가의 물과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아주 훌륭했어. 그 여객선 트라우마가 특히 그랬지. 여태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거든. 아주 특이한 트라우마더라고.
이전의 탐색 진도가 저장되는 데다가 들어갈 때마다 타임라인이 바뀐다니. 그 안에서 관건을 찾고 해당 트라우마를 통과했다는 건 자네의 관찰력과 추리력, 판단력이 모두 출중하다는 뜻이지.”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성실한 그는 조금도 겸손을 떨지 않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지훈도 그의 모습에 이미 익숙해진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특수한 트라우마는 신세계와 관련 있기도 하고, 회사 강자들이 참고할 만한 가치도 있어. 우리는 자네에게 충분한 보상을 지급할 예정이야. 혹시 뭐 바라는 게 있나?”
성건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제 방에 전화기 한 대 설치해주십시오!”
소지훈은 흠칫 놀란 눈치였다.
“⋯⋯그거면 돼?”
“예.”
성건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인 느낌이 풀풀 풍기는 소지훈은 몇 초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공평하지 않지. 차라리 자네 집을 방이 세 개 딸린, 자체적으로 전화기가 설치된 집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나?”
그러자 성건우가 진지한 자세로 설명했다.
“필요 없습니다. 방을 바꾸는 건 저희끼리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건 훗날 저랑 결혼할 아내 생각까지 고려해야 할 문제입니다. 아내의 의견도 들어봐야 해요.”
소지훈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
“자네, 만나는 사람이 있나?”
“없습니다.”
성건우의 답은 거침없었다.
소지훈이 캐물었다.
“그럼 언제쯤 짝을 찾을 생각인가?”
“전 인류를 구원하고 나서요!”
성건우의 말투는 매우 단호했다.
회색 작전복을 입은 소지훈은 잠시 다른 곳을 쳐다봤다. 상대의 말을 완곡한 거절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다른 조건을 더 제시해보게.”
성건우는 한참 더 고민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용여홍 팀원의 집과 백새벽 팀원의 집, 그리고 두 팀원이 혼인 신고한 뒤 배정받을 집에도 전화를 설치해주십시오.”
소지훈이 실소했다.
“자네, 전화기랑 무슨 원수라도 졌나? 좋아, 다 들어주지.”
그리고 한동안 침묵에 빠져 있던 그가 물었다.
“자네가 특수한 트라우마에서 얻은 것들은 어떤가?”
성건우가 제출한 보고서에 그 방면 내용까지 나와 있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소지훈과 만남을 따로 요청하지 않았더라도 소지훈이 다시 성건우를 불러 그 부분에 대해 질문했을 것이다.
성건우가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그런 것도 말씀드려야 합니까? 방들을 탐색하는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만 진술하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탐색 후에 있었던 일인데요.”
소지훈은 미소를 유지한 채 대꾸했다.
“답하기 싫다면 안 해도 돼.”
성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소지훈이 무슨 말을 하기 전 다시 입을 열었다.
“수확물은 보통 때의 두세 배 정도에 달했습니다. 여객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기운도 있었고요.”
성건우는 자신이 얻은 별도의 수확이나 육식주에 녹여 넣은 불가의 기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 트라우마에 진입할 사람이라도 그것을 찾을 순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지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군.”
이내 성건우는 상대가 내어준 차를 사양하지 않고 몇 모금 마셨다.
“소 이사님, 그런 특수한 트라우마를 연구해봤거나 혹은 그와 관련된 경험을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소지훈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더니 재차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건 특수한 트라우마는 전부 신세계의 강자, 그리고 특정 달지기에 연루돼 있다는 것뿐이야. 아마 목표의 기원의 바다에 일부 기운이 숨겨져 있거나 혹은 신세계 교차점의 투영이 형성됐기 때문일 거야.”
답을 마친 소지훈은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갔다.
“자네, 근데 왜 나를 만나겠다고 한 거지?”
성건우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소 이사님, 생명 제례 교단 사건, 기억하고 계십니까?”
소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 왜, 그 교단과 관련한 단서를 또 발견했나?”
성건우가 진지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전 그들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증거는 없습니다.”
“얘기해 보게.”
소지훈은 방심하지 않았다.
일찍이 열 개 정도 복안을 세워둔 성건우는 아무것이나 하나 골랐다.
“그러니까, 전 용여홍 팀원을 통해 부적을 그리는 한 직원을 찾고 그 여성분 집에 가서 다산 부적을 구했습니다.”
“자네는 지금 만나는 사람도 없고, 당분간은 누군가를 만날 생각도 없는 거 아니었나?”
게다가 그 ‘당분간’은 꽤 긴 시간일 것 같았다. 전 인류 구원이 수십 년 안에 실현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더더욱 고작 서너 명이 그 목표를 달성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산 부적을 가지고 있으면 짝이 없어도 아이는 생길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었거든요.”
소지훈은 상대의 정신 상태를 감안해 일단 그 설명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소용없었습니다.”
성건우가 아쉽다는 듯 답했다.
곧 소지훈은 컵을 들어 물을 벌컥 마셨다.
“어쩌다 생명 제례 교단 단서를 발견하게 되었느냐고 물은 거였어.”
성건우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대꾸했다.
“부적을 그리는 직원이 말하길, 자기 아버지인 목인걸 씨가 5년 전 한밤중 공용 화장실에 가던 도중에 급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손쓸 틈도 없이 돌아가셨답니다. 목인걸 씨는 진짜 다산 부적을 그릴 줄 알았고요.”
“진짜 다산 부적?”
소지훈은 언제나 그렇듯 성건우가 자신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내 성건우가 설명했다.
“제가 찾아갔던 직원은 어릴 땐 소중함을 모르다가 잃고 나서야 그게 보물이었음을 알게 된 거죠. 지금은 더 이상 다산 부적을 그리지 못해 멋대로 꾸며낸 그림을 부적이라고 팔고 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소지훈이 말했다.
“그래, 갑작스럽게 심근경색을 겪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야. 우리가 전에 재조사해 본 적도 있으니 이론적으로 목인걸 씨 사망에는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근데 다산 부적을 그리는 사람이었다니 뭔가 공교롭기는 하네. 사람을 시켜 해당 거리에 사는 직원들을 다시 조사해 보도록 하지.”
그는 해당 감시카메라 영상이 이미 보존 기한을 넘겼으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이때 성건우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말했다.
“소 이사님, 내부 범인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난번 생명 제례 교단을 조사하던 중에도 소식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중요 단서가 끊어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성사는 시종일관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요.”
그가 문밖 복도를 가리켰다.
소지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명심하지.”
손뼉을 치던 성건우가 다시 화제를 전환했다.
“소 이사님, 회사 내 신세계 급 강자 중에 사명 영역도 있습니까?”
이는 생명 천사 목걸이의 기운을 교환한 뒤에도 그 작용은 바뀌지 않고 효과만 더 강해진 것과 그것을 통해 신세계 교차점을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도출한 결론이었다.
“있지.”
소지훈은 솔직하게 답했다.
이에 성건우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럼 그 사람은 생명 제례 교단을 어떻게 봅니까?”
소지훈은 기억을 찬찬히 더듬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이런 자질구레한 문제에 관해 도움을 청한 적이 없어. 근데 언젠가 한 번, 그가 애쉬랜드 위의 각종 교파를 언급하며, 신도들에 대한 각 달지기의 태도가 서로 다르다는 모호한 말을 한 적은 있어. 신경 쓰지 않는 이도 있지만 성가셔하는 이도 있고, 꽤 좋아하는 이도 있다고 하더라고.”
소지훈은 달지기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강조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구조팀은 장생의 꿈을 경험한 적도 있고, 구세계 파괴가 제8 연구원의 금기된 실험에서 비롯됐으며, 무심병의 기원이 신세계일 확률이 높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성건우가 작은 탄성과 함께 말했다.
“그럼 이번에도 이 일로 그 사람을 방해하지는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에 소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더 할 말 있나?”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성건우는 예의 바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소지훈도 따라 일어나 그의 손을 가볍게 쥐며 악수를 했다.
성건우는 맞잡은 소지훈의 손에서 열감을 느꼈다.
“아직도 열이 좀 있으시네요?”
소지훈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