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756
756화. 신념
약간 어둑한 하늘 아래, 초록 덩굴로 뒤덮인 건물들이 갈라진 길을 따라 저 멀리까지 늘어서 있었다.
꼭 죽은 공원묘지에 소리소문없이 솟아난 묘비를 보는 것만 같았다.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성건우는 카멜레온 인공지능 갑옷을 입은 게네바와 일정 거리를 둔 채 나란히 서서 걸었다.
귓가에 닿는 것이라고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잠시 고개를 돌린 성건우는 헬멧의 바이저 너머로 주위를 한번 살핀 뒤 신이 난 듯 말했다.
“어둑한 하늘, 버려진 건물, 텅 빈 도로, 미지를 향해 나란히 걸어가는 한 인간과 로봇⋯⋯. 구세계 콘텐츠 아포칼립스물 느낌이 물씬 나네.”
이틀 여정 끝에 커닝미스에 도착한 구조팀은 계획에 따라 생명 천사 목걸이를 가진 성건우와 게네바를 이 구역에 들여보냈다.
초기 정탐을 진행해 이곳에 아직 무심병 바이러스가 남아 있는 근본 원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개 한 마리가 빠졌어.”
거대한 카멜레온처럼 보이는 게네바는 언제나처럼 할 말은 했다.
“그렇네, 개가 없어. 외로운 남자와 로봇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지. 황량한 느낌이 덜 해.”
성건우가 실수를 인정했다. 이후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개를 찾을 수가 없는데⋯⋯.”
그로부터 이삼십 초 후, 어디선가 개소리가 들려왔다.
“멍멍멍!”
성건우가 낸 소리였다.
“이제 다 됐네!”
만족한 얼굴의 성건우를 보며 게네바는 왠지 좀 덤덤했다. 일찍이 성건우의 행동 데이터베이스를 갖춰둔 덕분이었다. 게네바는 원래 이렇게 전개되리란 걸 어느 정도 예측했었다. 오히려 성건우의 행동 속도에 더 의문이 들었다.
“개 역할을 맡는데 왜 그렇게까지 오래 뜸들인 거냐? 난 네가 체면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고 곧바로 결정할 줄 알았는데.”
그러자 성건우가 웃었다.
“우리끼리 민주적인 협상과 투표를 진행해서 누가 그 역할을 맡을지 결정했거든.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지.”
“그렇군.”
게네바는 충실하게 성건우의 행동 데이터베이스를 채워나갔다.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피던 성건우는 방금까지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화제를 바꿨다.
“겐, 커닝미스 도심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더 어두워지는 것 같지 않아?”
커닝미스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남하하는 차가운 한기는 그 산에 가로막혀 빙원의 다른 곳에 비해 기후가 훨씬 온난했다.
지금과 같은 계절에는 쌓인 눈이 이미 녹아 졸졸 흐르고, 대지에선 녹색 새싹이 고개를 내밀며 새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원래라면 매우 아름다웠을 광경이지만 어째서인지 이곳은 시종일관 음침하고 햇빛도 없었다. 종말이 다가오는 듯한 분위기만 물씬 느껴졌다.
“그러네.”
게네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닝미스 가장자리, 구조팀의 야영지에서는 그냥 흐린 날 같았을 뿐이지만 도심지 근처에 이른 이곳의 하늘은 먹구름으로 새까맣게 뒤덮여 있었다.
현재 성건우는 한 손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생명 천사 목걸이를 쥔 까닭이었다. 대신 다른 손엔 금속 골격에 뒤덮인 돌격 소총을 쥐고 있었다.
그는 곧 퍽 기분이 좋은 듯 이야기했다.
“환각이 아니면 이 어둠은 신세계랑 관련돼 있겠네. 앞으로의 일은 간단해. 하늘이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곳이 바로 문제의 근원이 자리한 곳일 거야!”
솔직한 게네바가 답했다.
“아니, 그 추리는 가설일뿐이지. 뒷받침하는 근거가 부족해. 어쩌면 곧 비가 내리려는 걸지도 모르지. 온 도시가 같은 환경에 처해 있을 수도.”
“겐, 우리 팀 좌우명이 뭔지 잊었어? 가설은 대담하게, 실증은 조심히!”
성건우는 당당하게 동료를 가르쳤다.
“그건 큰 흰둥이의 말버릇일 뿐, 팀의 좌우명은 아니지.”
겐의 기억력은 아주 좋았다.
결국 그의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데 실패한 성건우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팀장님이 내 롤모델이거든!”
“그럼 문제없지.”
이제는 게네바도 전과 달리 어느 정도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알았다.
곧 그가 점점 가까워지는 전방의 도심지 건물들을 보며 진지하게 일렀다.
“야, 조심해야 해. 언제든 무심병에 감염될 수 있으니까. 근데 일단 나한테 먼저 정탐을 시키고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뒤에 문제의 근원을 찾아볼 생각은 왜 안 한 거냐?”
지능 로봇은 무심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네가 유용한 상황을 정탐해내든 어쨌든, 난 결국 여기 들어왔을 거니까.”
성건우는 꼭 봄 소풍에 적합한 이 계절을 놓칠 수는 없었다는 듯 답했다.
이후 게네바가 1차 정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커닝미스에 들어왔어도 됐었다고 답하기도 전, 성건우가 다시 웃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감염 따위 안 두렵기도 하고.”
카멜레온 인공지능 갑옷을 착용한 게네바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성건우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쥔 오른손을 높이 들며 낮게 외쳤다.
“길고도 긴 밤, 사명이 비호하시니라!”
마음 같아서는 왼쪽 손목에 두른 생명 천사 목걸이를 흔들고 싶었겠지만, 그는 지금 그쪽 손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게네바는 붉은 눈빛을 몇 번 번득이다 화제를 전환했다.
“야, 너는 네 아버지가 살아계실 거라고 생각해?”
한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중에야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난 늘 아버지가 아무 이유도 없이 집에 안 돌아오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어. 분명 무슨 일이 생겨서 못 왔을 거고, 난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해.”
게네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어붙었다가 바짝 마르면서 갈라진 시멘트 바닥을 건너며 질문을 바꿨다.
“그럼 넌 커닝미스에서 네 아버지의 행방이나 그와 관련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성건우가 웃었다.
“구조팀에 가입한 후에 어디를 가도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게네바의 눈에서 붉은빛이 몇 차례 번득였다.
“너희 탄소 기반인들 감정은 확실히 우리 지능인들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다양하고 훨씬 더 미묘하네.”
곧이어 그는 머지않아 밤이 될 듯 어두운 하늘과 조용히 솟아있는 건물들을 바라보다 질문을 이어갔다.
“그 단서가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은 어디일 것 같아?”
성건우가 재차 웃었다.
“가장 위험한 곳이지. 제8 연구원 특파원은 커닝미스에 화가 닥친 게 그 팀이 구세계 파괴 원인을 조사했기 때문이라고 했어. 그 재난의 중심은 분명 그들이 뭔가 진상을 조사한 곳이거나 그들이 마지막에 출현한 장소일 거야.”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그게 제8 연구원 특파원의 모욕일 뿐이라면?”
성건우가 고개를 틀어 게네바를 바라보았다.
“그럼 더 잘된 거 아냐?”
게네바는 잠깐의 분석 끝에 성건우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막 무슨 이야기를 더 하려던 순간, 그에게 작은 이상이 감지됐다.
“저기 혈흔이 있어. 생긴 지 2주가 지나지 않은 흔적이야.”
게네바는 커닝미스 도심지로 이어지는 길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길가의 한 포기 잡초 아래에, 검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탁! 탁! 탁!
한 손이 마비된 성건우는 손뼉을 치는 대신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으로 가슴팍의 장갑을 두드렸다.
“난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는 지나칠 만큼 솔직하고 성실했다.
현재 성건우는 군용 외골격 장치의 종합 경보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 매우 총명한 사람임에도 정탐에 있어서는 지능 로봇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게네바는 주위를 검사하며 자신이 발견한 것과 분석 결과를 보고했다.
“부근에 시체는 없는데 격투 흔적은 어느 정도 있어. 지나치게 격렬한 전투는 아니야.”
성건우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네 생각엔 어떤 상황이었던 것 같아?”
게네바의 눈에 붉은빛이 두어 번 번득였다.
“싸움이 붙은 양측 모두 총기를 안 썼어. 무심자 사이의 내분일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이네. 이 폐허에는 아직 소수의 무심자가 살아있고 남은 물자는 부족한 모양이야.”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커닝미스에 있던 무심자는 무려 수십만 명이었다.
“무심자라⋯⋯.”
성건우는 약간 실망한 눈치였다.
이후 그가 도심지를 가리켰다.
“가자, 가장 위험한 곳으로!”
* * *
구조팀의 지프는 서쪽 산에서 커닝미스로 진입하는 길목 숲에 정차 중이었다. 이곳에서는 보호색으로 지프를 숨길 수 있었다.
현재 보닛 위에는 장목화가 망원경을 쥐고 멀찍이 자리한 마을과 도로, 도시 가장자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커닝미스의 도심지는 서쪽에 치우쳐 있었다.
그리고 용여홍과 백새벽은 각각 한쪽을 지키며 경계 중이었다.
한참 후, 용여홍이 침묵을 깼다.
“팀장님, 건우는 왜 안 막으신 거예요?”
장목화는 느릿하게 한숨을 토하며 잠시 뜸을 들였다.
“인류 구원을 제외하고 건우가 가장 오래도록 바랐을 일일 테니까. 무엇보다 우린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잖아. 배후에서 우리 등을 떠민 존재들은 절대 우리가 무심병에 걸려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상응하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 제8 연구원 사람들이 저 도시에 들어갈 수 있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을 확률이 커.”
그녀가 말한 ‘존재들’이란 빅보스와 에이돌른 등의 달지기를 가리켰다.
그런데 장목화가 말을 막 마친 그 순간, 그녀는 어느 버려진 마을 안에서 휙 스쳐 가는 검은 그림자를 목격했다.
커닝미스에 무심자와 야생 동물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일찍이 예견하고 있었던 그녀는 딱히 놀라지도 않고 백새벽과 용여홍에게 사실을 알렸다.
“검은 고양잇과 동물 한 마리를 봤어. 크기도 좀 크네.”
백새벽이 입술을 오므렸다.
“고양잇과 동물⋯⋯. 제가 빙설에서 봤던 것도 고양잇과 동물이었죠. 녀석은 흰색이었지만요.”
무심자 상인단과 만났던 그 폐허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순간 미간을 팩 구긴 장목화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공교로운 것 같기도 하네⋯⋯.”
백새벽과 장목화의 대화를 듣고, 용여홍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빙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인가 보죠. 계절에 따라 털갈이하는.”
눈 내리는 추운 날씨에는 흰 털이 자라 그 보호색으로 존재를 숨기는 한편 위험을 피하다가 눈이 녹기 시작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흰 털을 벗고 지금의 상태에 적합한 검은 털이 자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구조팀은 다른 지역에서도 그런 동물을 여러 차례 마주친 적 있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럴지도. 하지만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듯이 추측할 때는 최대한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두고 다양한 가능성에 대비해둬야 해. 그래야 생각지도 못한 허점으로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있어. 음, 그 빙설 폐허와 커닝미스에 대형 고양잇과 동물이 출몰했다는 것 말고 또 무슨 공통점이 있지?”
그녀는 만약 비슷한 고양잇과 동물을 본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두 지역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이 숨겨져 있으리라 확신했다.
백새벽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둘 다 빙원에 있어요. 둘 다 이미 죽은 관계로 살아서 활동하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요.”
용여홍이 덧붙였다.
“파괴되기 전의 주민들은 레드리버인이 위주였죠.”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리고⋯⋯.”
뜸을 들이던 그녀의 표정이 점차 진지해졌다.
“그리고, 둘 모두 제8 연구원과 어느 정도 관련돼 있어. 빙설 폐허는 그런 것으로 의심이 될 뿐이고, 이곳은 관련되어 있는 게 확실하지만.”
구조팀은 현재 빙설 폐허에서 무근자 상인단의 물자를 증발시킨 것이 제8 연구원의 짓이리라 의심하고 있었다.
또한 제8 연구원 특파원은 커닝미스 주위 구역을 어느 정도 격리해 무심병의 확산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그 구역에 진입해 성건우 아버지가 속한 구조팀의 행방을 찾기도 했다고 했다.
용여홍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니까 팀장님 말은, 대형 고양잇과 동물과 제8 연구원도 서로 연관돼있으리라는 건가요?”
장목화가 말했다.
“음, 수종이는 변이 생물을 부릴 수 있으니, 제8 연구원도 특정 동물을 부릴 수 있을지 몰라.”
이 뜻인즉, 제8 연구원 내에 수종이처럼 다른 생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각성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물론 장생의 인격 중 하나로 짐작되는 수종이에게 가위 말과 수면 고양이 따위의 변이 생물을 만들고 부리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8 연구원을 한 달지기의 인격 조각에 비견할 순 없었다. 그러니 설령 그런 각성자가 있다 한들 일반적인 동물을 부리는 데에 그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