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760
760화. 오랜 친구
안개로 가득한 어둠 속을 10분 정도 더 나아갔을 무렵, 성건우와 게네바는 길목을 통과해 어느 거리에 진입했다.
좌로도 우로도 방향을 틀지 않은 건 전방의 수많은 시체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지나친 구역엔 무심자들이 먹었는지, 빙원 생물들이 가져갔는지 시체들이 거의 없었다. 싸움과 총격, 피를 흘린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곳 거리와 길가에는 마치 모래주머니 같은 시체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기본적으로 백골로 변한 자들은 입은 옷의 색깔이나 스타일도 제각기 달랐고, 부패한 정도도 제각각이었다.
게네바는 빠르게 간단한 정찰에 나섰다.
“이들 중 일부는 습격으로 죽었고, 일부의 사인은 불명확해.”
고개를 끄덕이던 성건우가 정색을 한 채 말했다.
“이곳이 무심병 폭발의 핵심 구역인가? 당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난 이곳에 무심자들은 서로를 살육하며 쉽게 진정하지 못했던 걸까? 그리고 이들은 이곳에서 도망친 뒤 감히 문제의 근원 근처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시 이 구역으로 들어와 먹이를 찾느니 차라리 굶어 죽길 택한 거고?”
게네바가 상황을 분석했다.
“그런 추측도 가능은 한데, 다른 가능성도 아주 많아.”
“그렇지.”
성건우는 반박하지 않았다.
이내 군용 외골격 장치의 탐조등을 킨 그는 노르스름한 불빛의 도움 아래 시체들을 한 구씩 살폈다.
그의 관심은 주로 옷과 물건, 그리고 시체의 키에 쏠려 있었다.
성건우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게네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뒤를 따르며 뜻밖의 상황에 대비했다.
그렇게 걸어가던 둘은 동시에 저 멀리 떨어진 곳의 가로등이 켜지는 걸 보았다. 가로등은 마치 손님을 맞이하는 종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다.
“또 다른 신세계의 투영인가?”
흥분한 성건우가 낮게 읊조렸다.
“아마도.”
게네바는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성건우는 속도를 높이는 대신 원래의 속도를 유지하며 길가의 시체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그중 반고 바이오 출신으로 짐작되는 이는 없었다.
이후에 성건우는 게네바와 함께 가로등 빛으로 밝혀진 구역을 보았다.
길가 근처는 잎이 무성한 가로수 한 그루가 있고, 그 가로수 옆에는 짙은 갈색 나무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벤치에 스물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머리를 뒤로 가지런히 빗어넘긴 남자는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회색 정장을 입고, 조그만 둥근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남자는 지금 가로등 불빛에 기대 한가로이 신문을 읽고 있었다.
“오하명!”
성건우가 기쁜 듯 외쳤다.
상대는 바로 불모지 13호 유적 안에 봉인된 오하명이었다.
그의 투영은 다름 아닌 이곳에 나타나 있었다.
고개를 돌린 성건우가 게네바를 향해 말했다.
“정말로 타향에서 오랜 친구를 만났네.”
“그런 셈이긴 하네.”
게네바는 구체적인 확률 대신, 보다 인간답게 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오하명은 성건우의 인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경험이 있는 성건우는 곧장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손에서 놓고 옥부처를 꺼내 들었다.
청록빛이 번지며 소리소문없이 사방을 채웠다. 안개도 따라서 적잖게 밀려나는 듯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오하명은 안경 너머로 성건우와 게네바를 바라보았다.
그가 느릿하게 웃었다.
“너희들⋯⋯.”
오하명은 여전히 레드리버어를 쓰고 있었다.
“그래, 우리야. 넌 불모지 13호 유적에 봉인되어있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신세계에도 나타날 수 있는 거야?”
성건우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미 전의 추측을 사실로 확정한 듯 지금 이곳에 있는 오하명을 당연하게 신세계의 투영으로 여기고 있었다.
오하명의 표정이 약간 차가워졌다.
“신세계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날 봉인할 수 있었겠어?”
“아, 그렇구나.”
성건우는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대꾸했다.
그가 다시 묻기 전, 오하명은 손에 든 신문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알아, 많은 걸 묻고 싶겠지. 하지만 난 답해주지 않을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한테 주의를 주는 것뿐이야. 더 이상 들어오지 마. 그곳에는 지금의 너로서는 대적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오하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로등 빛으로 밝혀진 구역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 장면은 몇 차례 깜빡거리다가 결국 옅은 안개에 휩싸인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신세계의 투영은 왜 이야기 몇 마디만 나누면 깨져버리는 거지?”
성건우가 서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전에 플로라, 버나드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랬고 오하명과 대화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게네바가 추측했다.
“모종의 힘이 신세계 사람과 애쉬랜드 사람의 교류를 막는 건지도 몰라.”
“구세군 내 최초의 신세계 강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건우는 옥부처를 거둬 넣으며 오른손을 왼쪽 가슴 장갑 위에 얹었다.
“아마도.”
게네바는 그 두 상황이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으리라 생각했다.
이내 그가 성건우에게 물었다.
“이제 돌아갈 거야?”
“왜 돌아가?”
성건우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게네바가 답했다.
“오하명이 방금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고, 그 앞에는 우리가 대항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했잖아.”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하명은 위험할수록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도 했었지. 그건 아마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암시였을 거야. 그래, 모종의 힘이 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을 테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게네바가 돌연 고개를 돌렸다.
“또 뭔가 따라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탕!
일찍이 몰래 준비하고 있던 성건우가 외골격 장치의 유탄 발사기를 이용해 뒤쪽으로 조명탄을 쐈다.
폭발하듯 발산된 밝은 빛 아래, 성건우는 헬멧 보안경을 통해 저 멀리 한 건물 발코니에서 거의 치타만 하고 눈동자는 초록색인, 검은 고양잇과 동물 한 마리를 보았다.
그 동물의 동공은 조명탄의 밝은 빛 아래 가느다란 선으로 수축했다.
탕탕탕!
성건우가 뒤쪽으로 조명탄을 쐈을 때 게네바도 엄청난 반응 속도로 몸을 틀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백발백중이었을 총알은 목표의 몸에 하나도 명중하지 않았다. 총알들은 발코니 가장자리를 때리면서 불똥만 튀길 뿐이었다.
치타 같은 고양잇과 동물은 화들짝 놀라는 듯하더니, 곧 조명탄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 발코니 안쪽의 창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콰광!
성건우가 쏜 유탄이 그 발코니에 떨어지며 작열하는 불꽃을 피워올렸다. 그 여파로 부근의 유리창 여러 개가 부서졌다.
폭발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게네바가 조금 전 실수를 해명했다.
“내 조준 시스템이 큰 방해를 받고 있어.”
성건우도 그를 전혀 비웃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내 시각도 어느 정도 방해를 받았어. 원래는 저 발코니와 이어진 방을 폭발시켜 고양잇과 동물이 거리로 뛰쳐나오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는 이 결과를 매우 실망스러워했다.
게네바는 한동안 이리저리 탐색을 해보았지만, 그 거대한 고양잇과 동물의 자취를 찾지는 못했다.
그가 성건우에게 말했다.
“큰 흰둥이가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했던 그 동물일 거야.”
“조심할 게 뭐 있어? 그냥 우리를 몰래 따라온 것뿐인데. 원거리 전투에서든, 근거리 전투에서는 난 녀석을 한 손으로도 끝장낼 수 있어.”
성건우는 승복하지 않았다.
게네바는 마비돼 축 늘어진 성건우의 왼손을 한번 보곤 그 이야기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이내 그가 합성음으로 이루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큰 흰둥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파악했어.”
“왜 그런 말을 했는데?”
성건우는 궁금한 부분이 생기면 바로 질문을 하는 편이었다.
게네바가 중점을 골라 답했다.
“데이터베이스에 ‘고양잇과 생물’을 검색하니 지난번 방문한 눈과 얼음으로 덮인 도시에서도 녀석이 나타났던 걸 찾아냈어. 당시 작은 흰둥이가 흰색의 거대한 고양잇과 생물을 목격했다고 했지.
그곳과 커닝미스의 공통점은 많지 않지만, 그중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둘 다 제8 연구원과 어느 정도 연계되어 있다는 거야. 빙설 폐허는 그런 것으로 의심되고, 이곳은 확실하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방금 그 고양이가 제8 연구원에서 기른 것일 수도 있다?”
성건우는 어렵지 않게 게네바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는 전혀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냥 자기한테도 한 마리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래.”
게네바가 카멜레온처럼 보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린 어디로 가야 제8 연구원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휴, 아까는 너무 성급했어. 안 그럼 그 고양이한테 길 안내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게네바가 추측하며 말했다.
“아마 그 고양이는 곧 제8 연구원 사람을 데려올 거야. 녀석은 제8 연구원에서 커닝미스를 순찰하는 구성원 중 하나일 거고. 동물은 무심병을 염려할 필요도, 전자파가 혼란한 핵심 구역에서 무슨 일을 당할 염려도 없지.”
성건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과 잘 이야기해서 양측이 교전하게 되더라도 특사가 죽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알려줬어야 했어.”
게네바도 성건우의 모든 말을 굳이 받아줄 필요는 없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의 사고 흐름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 대답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이때 게네바가 화두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 생각에는 지금 커닝미스에서 철수하고, 팀원들이랑 합류해서 제8 연구원의 습격에 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위험할수록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이야, 겐.”
오하명의 말을 빌려온 성건우가 씩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제8 연구원 사람이 신세계와 어느 정도 중첩된 이 구역을 어떻게 그렇게 무사히 돌아다니는지 보고 싶어. 내가 인간 의식을 숨기고 네가 카멜레온 인공지능 갑옷의 은신 기능을 켰을 때 과연 우릴 찾을 수 있을지도 궁금하고.”
게네바가 바로 허점을 보완했다.
“그러려면 네 냄새도 어느 정도 처리해야 할 텐데. 거기다 넌 도중에 탐조등을 켤 수도 없어. 그래서는 길가에 널브러진 시체를 확인할 수 없는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 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성건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
“이번 탐색에서는 최소한 문제의 근원을 대략적으로라도 파악해야 해. 어, 문제의 근원이 신세계 교차점일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확정해야 한다고.”
“그럼 빨리 들어가자.”
지능 로봇인 게네바는 결정이 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앞뒤를 살피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
돌아선 성건우가 허리를 살짝 굽혀 금방이라도 달려갈 자세를 취했다.
그 사이 그는 회사의 생물 제제로 체취를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준비를 다 마쳤는데도 성건우는 계속 움직임이 없었다.
몇 초간 그 상태가 지속되자 게네바가 그에게 물었다.
“내가 하나, 둘, 셋이라도 외쳐줘야 하는 건가?”
성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갑자기 문제가 하나 생각나서.”
“어떤 문제?”
게네바가 캐물었다.
“우리, 아까 전에 한 고등 무심자의 습격을 받았었잖아?”
게네바는 럭비공처럼 통통 튀는 성건우의 사고 흐름을 도저히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거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성건우가 엄숙하게 말했다.
“당시 난 그자의 영향에 능력을 쓰는 법을 잊었어. 그리고 사지 동작 불능과 비슷한 능력에 적중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생각도 못 하다가 수십 초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지.
만약 그 고등 무심자가 기원의 바다 급에 불과하다면 난 기껏해야 몇 초 만에 효과에서 벗어났을 거야. 능력에 그렇게까지 심각한 영향을 받지도 않았을 거고. 내가 보기에 그자는 심령의 복도 급 고등 무심자였던 것 같아.”
그러자 게네바가 물었다.
“하지만 무심자가 어떻게 트라우마로 이루어진 섬을 극복하지? 그가 어떻게 승급을 해?”
지능이 부족한 생물로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