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804
804화. 버프를 걸고
둘은 한동안 또 걷던 끝에, 등불로 밝혀진 안개 낀 거리를 맞닥뜨렸다. 마치 좌판이 하나하나 펼쳐져 있는 듯한 곳이었다.
성건우는 눈이 빠지게 그쪽을 응시하다가 아주 힘겹게 시선을 거뒀다.
“이번에는 이 블록을 우회해야겠네.”
“응.”
게네바의 분석 결과도 그랬다.
우회를 시작한 지 몇 분 지났을 무렵, 성건우가 불쑥 물었다.
“신세계 투영에는 왜 불빛이 있는 걸까? 우리가 커닝미스에 들어온 시간대는 지난번과 달라. 근데 왜 어둡고 안개 낀 거리에 티 안 나게 중첩된 컴컴한 신세계 투영은 없는 거지? 그런 투영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미리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우회할 수도 없을 텐데.”
게네바도 성건우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분석에 들어갔다.
“어쩌면 커닝미스에 나타난 신세계 투영은 신세계 강자와 연관되어 있는지도 몰라. 적어도 우리가 맞닥뜨렸던 건 전부 인간이었어.”
그의 말은 강자가 상응하는 구역의 힘을 강화하면서 그 부분의 신세계와 커닝미스에 중첩을 일으켰으리란 뜻이었다.
다시 게네바가 덧붙였다.
“그 강자들은 전부 신세계 등불이 밝혀진 곳에서만 살 수 있는 건가?”
“흥미롭네.”
성건우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두어 번 쳤다. 그의 구미에 맞는 추측인 듯했다.
게네바는 또 현 위치를 확인하고 지도와 비교한 뒤 입을 열었다.
“이 블록을 지나치면 달지기 아들이 살던 그 호화 아파트가 보일 거다.”
“기대 돼!”
성건우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20분 정도 더 나아갔을 무렵, 둘은 마침내 그들이 구획한 위험 구역을 순조롭게 우회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의 고층 아파트였다.
어둠에 얌전히 놓인, 옅은 안개에 휩싸인 아파트에선 층마다 노르스름하거나 흰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건우와 게네바는 그 아파트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건물은 굉장히 감각적이었다. 비스듬한 방향에서 보면 꼭 어두운 하늘을 가를 듯 곧게 세워진 칼날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 검은 외벽과 창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당시처럼 호화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소용돌이가 느껴지나?”
게네바가 물었다.
지난번 커닝미스로 와 파문을 일으켰을 때, 그들은 도심지에서 느릿하게 가속하며 밖으로 확장되는 거대한 소용돌이 하나를 감지한 바 있었다.
성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전에 떠났을 때 소용돌이는 이미 안정되고 있었잖아? 이번에 세운 책략에 확실히 효과가 있던 모양이야. 문제의 근원에 당도했는데도 소용돌이는 활성화되지 않았잖아.”
의기양양한 그를 보며, 게네바가 주의를 줬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지금 저 아파트 내부는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구역은 전부 불빛에 뒤덮여 있어. 신세계 강자가 저렇게나 많다는 건가?”
구조팀 경험으론 등불들 하나하나가 신세계 강자 한두 명을 가리켰다.
이 호화 아파트는 총 30여 층, 각 층엔 집이 2개씩 자리해 있었다.
“맞아, 맞아. 준비를 좀 해야겠다.”
성건우는 일단 게네바 말의 앞 문장에만 동의를 표했다. 그리곤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몸에 건 뒤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전술 배낭에서 육식주와 옥부처를 꺼냈다.
그는 바로 생명 천사 목걸이를 두른 왼 손목에 육식주를 나란히 찼고, 옥부처는 회색 제복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허리에 달린 주머니는 장갑에 가려져 있지도 않고 골격에 방해를 받지도 않았다.
게네바는 그것으로 준비가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성건우는 다른 물건을 또 꺼냈다. 반듯하게 접힌 종이였다.
성건우가 종이를 진지하게 펼치자 아이의 낙서 같은 조악한 그림이 드러났다. 달지기 상징 모음집이었다.
물론 모든 달지기 상징이 다 포함된 건 아니고 아직 몇몇은 빠져 있었다.
성건우는 그 종이를 투명한 반창고로 군용 외골격 장치 가슴 장갑 위에 붙였다. 방향은 그림면이 밖으로 드러나게끔 했다.
“됐다.”
그가 이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던 그가 문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지, 뭔가가 빠졌어⋯⋯.”
몇 초 후, 그가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아, 뭐가 빠졌는지 알겠다!”
빠르게 몸을 곧추세운 그가 달지기 아들이 살던 아파트를 향해 외쳤다.
“누가 감히 날 죽일쏘냐!”
그가 바로 목소리를 낮췄다.
“음⋯⋯. 너무 센 척하는 느낌인가⋯⋯.”
잠시 조정을 거친 후, 그가 재차 아파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누가 감히 날 막을쏘냐! 누가 감히 날 막을쏘냐! 누가 감히 날 막을쏘냐!”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성건우는 비로소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거면 됐어.”
게네바는 성건우 가슴팍의 달지기 상징 모음집을 힐긋 보며 분석했다.
“방금 그 외침에 사유 이식의 효과가 포함돼 있었던 거야?”
그도 성건우가 미치긴 했어도 아무 의미 없는 짓을 하는 경우는 잘 없다는 걸 알았다. 물론 성건우는 과정을 굳이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나름의 목적은 존재했다.
그때, 성건우가 코웃음을 쳤다.
“겐, 너 바보야? 저 안에 있는 이들의 인간 의식도 감지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사유 이식을 발휘해?”
“확성기로 영향 범위를 넓혔을 때도 목표의 인간 의식을 감지할 수 있었던 거야? 네 감지 범위는 거기까지 닿지 않을 텐데.”
게네바는 성건우와 이 방면의 문제로 토론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성건우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내 힘이 전파를 통해 소리에 녹아들면 그게 전달되는 과정 중에 주위의 인간 의식을 느낄 수 있어.”
게네바가 금속 목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렇군. 그럼 방금은 왜 소리 친 건데?”
“용기를 북돋으려고!”
성실한 성건우의 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게네바는 재차 침묵을 택했다.
성건우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받쳐 들고 앞으로 성큼 나아갔다.
“가자, 이제 달지기들이 우리를 비호할 거야.”
‘모종의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지. 너를 비호하는 달지기의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만.’
게네바는 눈으로 붉은빛을 몇 차례 번득였다.
성건우를 따라나선 게네바는 열려있는 아파트 정문으로 향했다. 도중에 성건우를 힐끔 살피던 게네바는 갑자기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근데 돌격 소총은 왜 들고 있는 거지? 설마 여기 있는 적의 육체가 총알을 막아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고 한들 군용 외골격 장치에도 유탄 발사기 같은 무기 모듈이 딸려 있으니 굳이 돌격 소총을 드는 대신 오른손을 비워두는 편이 더 나을 텐데.”
성건우가 놀란 듯 물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무기를 받쳐 드는 게 더 멋지잖아?”
“글쎄.”
솔직한 게네바가 답했다.
성건우의 말투가 좀 간곡해졌다.
“겐. 이게 바로 네가 아직 진짜 인간이 되지 못하는 이유야. 지난번에는 클리셰를 잘 이해하는 것 같더니 왜 오늘은 되레 퇴화했어?”
“이건 클리셰가 아니다.”
일찍이 데이터베이스를 탐색했던 게네바가 대꾸했다.
성건우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호화 아파트 대문에 이른 둘은 각종 방식으로 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홀은 굉장히 넓었고, 현대적인 옅은 회색이 주를 이뤘다. 천장에 걸린 예술적인 느낌의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순백의 빛을 내뿜고 있었고, 빛이 닿지 않는 가장자리와 구석엔 안개와 어둠이 머물고 있었다.
이곳은 성건우, 게네바가 지금껏 겪었던 것과 다른 점이 있었다. 등불은 밝혀져 있지만 인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보고 성건우가 크게 웃었다.
“하하, 내 달지기 상징 모음집에 놀라 달아났네!”
곁에서 게네바는 매우 이성적으로 대화의 주제를 본론으로 되돌렸다.
“저 샹들리에가 신세계에 속해 있는지, 커닝미스에 속해 있는지 모르겠다. 그 빛의 소속도.”
이곳 광경은 지금껏 마주친 신세계 투영과 커닝미스의 관계와는 전혀 달랐다. 강제적으로 중첩된 탓에, 형성된 모순을 통해 그것이 투영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도 없었다.
이 호화 아파트 안에 정말로 이렇게 예술적인 샹들리에가 걸려 있는 것 같았고, 그 빛으로 밝혀진 구역도 커닝미스의 원래 모습 같았다. 이곳에서는 신구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래야지. 과연 문제의 근원다워!”
성건우가 만족스럽게 평했다.
붉은 눈빛을 몇 차례 번득이던 게네바는 방향을 제시했다.
“일단 엘리베이터 로비부터 가 보자. 거기서 곧장 꼭대기 층으로 갈 수 있으면 제일 좋을 테니까.”
“그 안에 신세계 강자의 투영이 없다는 전제 하에나 가능한 일이지.”
냉정하고 이지적인 성건우가 대꾸했다. 그러나 그도 상대가 우호적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도박할 수는 없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둘은 모두 여기에 갇혀 그야말로 끝장이 날 터였다.
성건우는 우선 일정 거리를 둔 채 각종 방식을 통해 엘리베이터 안의 상황을 관찰하고 안에 누군가가 있다면 계단을 이용할 작정이었다.
게네바가 무슨 호응을 하기도 전, 주위를 둘러보던 성건우가 말했다.
“올라가기 전에 1층 상황을 살펴보자. 등불로 밝혀지지 않은 곳들이랑 신세계 투영에 뒤덮인 곳 위주로.”
“좋아.”
게네바도 성건우가 그 제안을 한 목적을 분석해 냈다.
둘은 손전등을 가지고 천천히 문을 통과해 홀로 들어섰다.
안개와 어둠에 뒤덮인 가장자리로 나아가는 사이, 성건우는 수시로 옆으로 한발 이동하면서 바닥을 힘주어 쾅쾅 밟았다. 대리석 아래 혹시 뭐가 묻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게네바 역시 비슷하게 행동했다. 이곳 전자파 환경이 너무 혼란하고 복잡한지라 그도 여러 수단을 활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약 20보 정도 이동했을 무렵, 둘은 샹들리에의 빛이 가려지면서 형성된 어둑한 구석에 다다랐다.
노르스름한 손전등 빛 아래, 약간 둥글게 오그라든 시체 한 구가 있었다.
이미 부패해 백골만 남은 시체는 회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성건우가 입은 것과 매우 비슷한 제복이었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무릎을 꿇고 앉은 성건우는 즉각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내려놓고 시신의 제복 주머니를 뒤졌다. 발견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구조팀 일원이었을 거다. 하지만 네 아버지는 아니야.”
옆에 있던 게네바가 말했다.
이번에 커닝미스에 온 건 그 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에 성건우도 출발 전, 장목화를 통해 회사에 아버지 관련 자료를 당당히 요청했었다.
이후 게네바는 관련 데이터를 입력하고, 성건우의 기억과 그가 가진 사진을 결합해 성건우 아버지의 기본적인 입체 이미지를 형성해두었었다.
“어떻게 알아?”
성건우가 물었다.
게네바는 진득하게 설명해주었다.
“첫째, 키가 달라. 둘째, 이 시신엔 옷을 제외한 어떤 것도 남지 않았지. 제8 연구원 특파원이 그들이 네 아버지와 같은 팀이었던 동료들 시체를 적잖게 찾아냈다고 했었잖아. 이 사람도 그중 하나일 거야.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은 그들이 가져갔을 거고.”
성건우가 군용 외골격 장치 힘에 의지해 일어나며 화제를 전환했다.
“사인은?”
“모르겠네.”
게네바는 검사를 진행했으나 죽음의 원인을 찾지는 못했다.
이후로도 둘은 이 아파트 1층에서 일고여덟 구의 시신을 더 찾아냈다. 하지만 이중 성건우의 아버지는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전부 그 구조팀 일원인 것도 아니었다. 애쉬랜드인의 골격 특징을 바탕으로 비교, 대조했을 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또한 그들이 가진 물건 역시 이미 제8 연구원에서 다 가져간 듯했다.
수확을 얻지 못한 성건우, 게네바는 조심스레 엘리베이터 로비로 향했다.
관찰 결과, 엘리베이터 안에 인영은 없었다.
곧장 그쪽으로 달려간 성건우는 열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그가 멈춰 섰다.
“왜?”
게네바 역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성건우가 실망감 가득한 얼굴로 층수가 표시되는 액정 패널을 가리켰다.
“전기가 나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