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825
825화. 회귀 방법
문가에 나타난 사람은 남자였다.
중간 정도 키에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는 머리는 갈색, 눈동자는 초록색, 피부는 약간 거칠어 보였다.
겉으로만 보면 30하고도 몇 살은 더 든 것처럼 보였다.
평범한 레드리버인 같은데, 눈매는 굉장히 가는 편이었다. 심각한 근시인 사람이 안경 쓰는 걸 잊기라도 한 듯 매우 가는 모양이었다.
그가 들어오자 술집 샹들리에가 더 밝아졌다.
그제야 성건우를 발견한 남자는 놀란 건지 잠시 멍한 표정을 보였다.
“……넌 누구지?”
그 낮은 목소리가 번지며 술집 안의 공기가 굳어버렸다.
파직-
작은 소리와 함께 전기 불꽃도 튀었다.
그러나 성건우는 전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그의 눈동자가 점점 밝아지는가 싶더니, 끝내는 두 덩어리 전광이 되었다.
이 모습에 남자는 퍽 놀란 듯했다. 그는 곧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어 성건우의 눈을 피했다.
이때, 겨우 정신을 차린 바텐더 제이콥이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의는 없어.”
눈을 가늘게 뜨는 걸 좋아하는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굳어진 공기는 원상태로 돌아가 다시 자연스럽게 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소리를 내며 번득이던 전기 불꽃도 사라졌다.
제이콥은 이내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내 단골, 헨드릭이야.”
“아.”
성건우는 짧게 감탄사를 뱉고, 눈 속의 전광을 거뒀다.
“내 레드리버어 이름은 더그야.”
헨드릭은 성건우가 이름을 밝혀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스툴에 앉았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제이콥을 보며 말했다.
“레몬 마가리타 한 잔.”
제이콥은 능숙하게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성건우는 헨드릭을 가만히 관찰했다. 그에게서 타인이 접근조차 못 하게 막는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성건우가 친근하게 물었다.
“단골이라고? 그럼 이미 육신을 잃은 건가?”
헨드릭은 고개를 홱 틀어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눈속에 녹색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건우는 상대를 다독였다.
“진정해. 아주 평범한 추리일 뿐이잖아. 너도 내가 방금 막 신세계에 진입한 햇병아리라는 것을 추리해냈듯이.”
너무 솔직한 이야기에 헨드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성건우는 이를 보고 불굴의 정신으로 다시 또 질문했다.
“육신은 어떻게 잃게 된 거야? 자연사? 아니면 누군가한테 속아 넘어가서 자발적으로 버렸나?”
헨드릭의 눈썹이 두어 번 꿈틀거렸다.
그때, 제이콥이 그 대신 답했다.
“헨드릭은 운이 엄청 나빴어. 육신을 포기한 건 아닌데 신세계에 진입한 지 20년이 채 안 됐을 때 재난으로 순수한 정신 생명이 돼 버렸어.”
“재난?”
성건우는 남의 말에 언제나 전문가처럼 호응해주었다.
이번엔 헨드릭이 직접 나섰다. 그도 제이콥의 나쁜 몸 상태와 허약한 체력을 알기 때문인지 더는 상대의 입을 빌릴 수가 없었다.
“대지진 때문에 이웃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내 육신은 폐허에 묻혔어.”
“정말 운이 나빴네.”
성건우가 공감하는 듯한 표정을 했다. 그건 정말로 누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었다.
제이콥이 청록색 레몬 마가리타를 헨드릭 앞에 내주며 한숨을 쉬었다.
“당시 헨드릭이 애쉬랜드에 있었다면 문제는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지 않았을 거야.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 물질 간접 능력으로 목숨은 구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게 운명이지.”
헨드릭과 성건우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전자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후자의 얼굴에는 마치 부모가 다른 형제를 만난 듯한 기쁨이 어려 있었다.
성건우가 관심이 동한 듯 물었다.
“질문이 있어. 마신 술에 대한 대가는 어떻게 치러? 신세계 주민의 규모를 보자면 성숙한 화폐 체계가 갖춰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제이콥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가게에선 돈을 낼 필요 없어. 다만 매번 얻어오는 인간 의식 수에 한계가 있다 보니 아껴 써야지. 갈 때마다 얻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짝! 짝! 짝!
손뼉을 친 성건우가 아리아를 부르듯 상대를 찬미했다.
“자기 이익은 차리지 않고 오직 남만 이롭게 하는 숭고한 정신이네.”
제이콥이 웃었다.
“나한테도 이득은 있어. 만약 내가 습격당하게 되면 헨드릭을 비롯한 손님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날 도울 거야. 안 그럼 저들은 안정적인 인간 의식 공급처를 잃게 될 테니까.”
성건우는 탄식을 하며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꼭 인간의 영혼을 거래하는 악마가 된 듯한 느낌이 드네.”
“모종의 의미에서 보자면 틀린 말도 아니지.”
제이콥 역시 그 사실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았다.
뒤이어 눈을 가늘게 뜨고 술을 마시던 헨드릭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우리는 질서와 규칙을 지키는 악마야. 하지만 그것들을 지키지 않고 멋대로 구는 악마도 있지.”
성건우의 생각은 이미 다른 곳에 꽂혀 있었다.
“신세계는 그렇게나 혼란스러워? 수시로 각종 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해야 할 만큼?”
헨드릭은 눈앞의 칵테일을 보며 목소리를 착, 깔았다.
“대규모 혼란이 발생하지 않는 한 달지기는 우리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아. 이곳은 의식의 유배지야. 혼란과 무질서가 그 메인 테마고.”
제이콥이 덧붙였다.
“적당한 동료를 찾아 연합해야만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어. 안 그럼 다른 이들에게 감금되어 보조 배터리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거야.”
이야기를 하는 사이 제이콥이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팀에 들어오기에 적합한지 평가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배터리? 아주 정확한 비유네!”
성건우가 재차 손뼉을 쳤다.
그 후로 몇 초간 웃던 그가 돌연 격분했다.
“애쉬랜드에 도는 신세계 관련 소문은 전부 거짓말이었네! 대지는 풍요롭고, 햇빛은 찬란하고, 아이들은 즐겁고, 성인들은 행복할 거라더니! 기아, 괴물, 감염, 변이와 각종 위험은 없을 거라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사실 심령의 복도에 진입하지 못한 골동품 학자나 유적 사냥꾼, 역사 연구자들도 전부 신세계가 허상이라는 걸,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저 사람들이 가진 아름다운 꿈일 뿐이었다.
“난 신세계 소문을 퍼뜨린 게 달지기들이 아닐까 의심스러워.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각성자들이 전부 여길 인생의 목표로 삼게 하려는 수작인 거지.”
헨드릭은 그리 좋지 못한 얼굴로 레몬 마가리타를 벌컥 들이켰다. 마치 술 한 잔에 과거의 아픔을 잊어보려는 것처럼.
“그걸 철석같이 믿은 우리는 이렇게 유배된 채 갇힌 거고.”
성건우는 헨드릭이 맺지 못한 말을 완성했다.
그러다 그가 문득 짧은 감탄사를 냈다.
“아, 한 가지 질문이 더 있다는 걸 깜빡했네. 애쉬랜드로는 어떻게 돌아가? 신세계 사람 중 이따금 돌아가는 사람들도 여럿 있던데.”
헨드릭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이콥은 그를 힐긋 바라보며 느릿하게 답했다.
“육신이 남은 상황이라면 특정 달지기를 향해 기도하고, 대문의 투영을 얻어 잠시 회귀할 수 있어.”
“잠시?”
성건우가 추궁했다.
제이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허약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본질적으로는 철저한 회귀지. 하지만 네 기도에 호응한 달지기는 네 의식에 낙인을 찍어뒀다가 네가 신청한 시간이 다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면 억지로 신세계에 끌고 들어와선 본인 먹이로 삼아.”
“그럼 난 어느 달지기에게 기도해야 하는데?”
성건우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달지기 상징 모음집에 그려진 선택지가 너무나 많은 탓이었다.
제이콥은 솔직했다.
“나는 보리의 힘을 빌려. 그분은 날 가장 긍휼히 여기고 인자하거든.”
성건우는 불쑥 기이한 생각을 떠올렸다.
“오오, 그럼 주에 한 번씩 5일간 회귀하겠다고 신청해도 돼?”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한 헨드릭이 레몬 마가리타를 홀짝이며 말했다.
“달지기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선 그 신청에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해.”
“허점을 이용할 수 있을 줄 알았지.”
성건우는 숨기지 않고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을 뱉었다.
제이콥과 헨드릭이 호응하기도 전, 또 그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튀었다.
“실종된 카스 말고 탑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사람은 또 누가 있어?”
제이콥은 이미 카스 말고 다른 이들은 누구인지 모른다고 답했으나 헨드릭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보였다.
몇 초 후, 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성건우를 잠시 살피다가 말했다.
“탑 부근에 사는 몇몇 사람들이 들어가 본 적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것도 여러 번.”
제이콥이 뭔가를 떠올린 듯 물었다.
“탑 부근에 사는 이들이라면?”
헨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원장, 찰리, 이 교수, 박사.”
성건우는 바로 흥분한 듯 손뼉을 쳤다.
“아는 사람들이네! 이따가 만나러 가야겠다.”
“그들은 썩 친절한 사람들이 아니야.”
제이콥이 일렀다.
“그럼 친절하게 만들어야지.”
성건우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제이콥과 헨드릭은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은 뒤 침묵을 택했다.
성건우는 그들에게 공백 한번 주지 않고, 다시 또 질문을 이었다.
“혹시 오하명은 알아?”
“그 사람⋯⋯.”
제이콥이 머뭇거렸다.
“그 사람 뭐?”
성건우가 캐물었다.
헨드릭은 술을 다 털어 마신 후, 몇 초간 눈을 감고 그 여운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주 위험한 자야. 우리처럼 정상적인 신세계 주민보다 훨씬 위험해.”
제이콥이 덧붙였다.
“난 그가 달지기들의 비밀을 찾아낸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 물론 그 탑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겠지만.”
성건우가 작게 탄식했다.
“그럼 진리는? 들어본 적 있어?”
그 순간, 제이콥과 헨드릭의 안색이 동시에 변했다.
성건우는 두 사람이 안색이 변한 걸 못 본 것처럼 계속 캐물었다.
“진리는 굉장히 강한 것 같던데. 너희도 진리가 무서운가 봐?”
몇 초 후, 상대적으로 성격이 더 좋은 제이콥이 무기력하게 말했다.
“진리도 그 탑 안에 있어. 하지만 ‘그’는 수시로 나오곤 하지.”
그는 레드리버어 중 신령을 가리킬 때 쓰는 ‘그’라는 표현을 썼다.
“‘그’도 달지기에 상당하는 존재인 거야?”
성건우가 기세를 몰아 물었다.
헨드릭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그’가 나올 때마다 한 명에서 두 명 정도의 각성자가 죽어.”
제이콥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직접 겪어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답을 알려줄 수는 없어.”
성건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달지기들은 보통 탑에서 나오지 않나 봐?”
제이콥의 얼굴에 경외의 빛이 떠올랐고 목소리는 전보다 더 낮아졌다.
“‘그’들은 탑에서 나오지 않고도 이곳에 있는 주민들 의식을 취하거나 각기 다른 기도에 호응할 수 있어. 물론 난 달지기들이 탑을 떠나는 것을 본 적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지.”
성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구나. ‘그’들은 주민 친화적이지도 않고, 함께 즐길 줄도 모르네.”
헨드릭은 가늘게 뜬 눈으로 잠시 그를 몇 초간 응시했다.
“양 떼도 사자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는 않아.”
그 말을 받아들이기 전, 성건우의 생각은 어느새 또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애쉬랜드에 있는 우리 육신은 누군가 영양분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천천히 굶어 죽어? 아니면 인간 의식을 섭취하면 육신에도 영향을 미쳐서 가장 기본적인 생체활성은 유지 시켜?”
이는 신세계 강자들 사이의 상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