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826
826화. 지연
헨드릭은 허약한 제이콥을 힐끔 살핀 뒤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보충받지 못한 육신은 빠르게 쇠약해져. 그럼 정신을 정상적으로 회복시킬 수도 없고, 네 의식도 따라서 허약해지지.
이런 상황에서는 주위 인간의 의식을 흡수해야만 정신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어. 인간의 의식은 육신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쳐서 마치 모든 세포가 동면에 들어간 듯 가장 미약한 생체활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줘.”
“하지만 주위에 인간이 없으면?”
성건우는 한발 더 나아간 질문을 했다.
헨드릭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면 여기서 인간 의식을 취하려 해봐야지. 안 그럼 네 육신은 먼저 죽음을 맞이할 거고 네 의식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에 가까워져.”
“가까워지기만 해?”
성건우가 의혹을 표했다.
제이콥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달지기들은 그런 의식이 알아서 소멸하게 내버려 둘 리 없으니까.”
짝!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쳤다.
“알겠다. 우리가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식을 발견했을 때 그걸 최대한 빨리 먹어버리려고 하는 거랑 같은 거구나.”
그는 제이콥과 헨드릭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알아서 반례도 제시했다.
“하지만 내 친구 중 하나는 3, 40년간 주위에 아무도 없는 곳에 있었고, 누군가의 배터리 같은 존재인데도 여전히 살아있어. 미라에 가까운 상태가 돼 있을 뿐이지.”
그가 말하는 친구는 바로 염호였다.
“불가능해.”
제이콥과 헨드릭이 이구동성으로 부정했다. 다만 한 사람은 목소리에 힘이 없어 부드럽게 들렸고, 다른 한 명의 말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진짜라니까?”
성건우가 두 손을 펼쳐 보였다.
헨드릭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자는 누군가의 배터리가 아니란 뜻이지. 누군가 정기적으로 그자에게 인간 의식을 공급하고 있는 거야. 그 빈도는 극히 낮고 공급받은 인간 의식 수도 많지 않지만 가장 기본적인 생존 상태를 유지할 순 있는 거지.”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성건우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우리가 아니라 그쪽에 물어봐야지.”
헨드릭의 답변에 성건우가 짧게 소리를 냈다.
“아.”
여태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는 얼굴이었다.
이후, 그가 또 물었다.
“난 당시 그 친구가 잠든 곳에 들어갔었어. 근데 한참 굶주린 것처럼 바로 내 의식을 먹으려 하진 않던데. 그냥 15분 정도 있다가 나섰어. 그건 왜 그런 거야? 아, 그때만 해도 우린 아직 친구는 아니었어.”
제이콥과 헨드릭은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바보를 마주한 듯 묘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제이콥이 답했다.
“우리가 있는 신세계는 애쉬랜드와 한 겹의 장벽으로 격리돼 있어서 인간 의식이 가까워진 걸 감지하는 데에나, 그 위치를 파악하고 추출하는 데에나 일정한 시간이 걸려.”
“그렇구나. 근데 내가 여기 들어올 때 우리 동료를 위해 보호막을 씌웠는데, 그땐 아무 지연도 없었는데?”
성건우는 알겠다고 대꾸하고선 바로 반례를 들었다.
“보호막 제공이라⋯⋯”
제이콥은 조용히 그 말을 곱씹다가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듯 물었다.
“그때 누군가 네 동료의 의식을 뽑아내려 했어?”
“응, 응.”
성건우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콥은 그제야 조금 전의 질문에 답했다.
“네가 지연을 느끼지 못한 건 누군가 이미 통로를 만들어둬서야.”
“전문적이네.”
성건우가 감탄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또 질문을 이었다. 아예 끝까지 꼬치꼬치 캐묻겠다는 정신으로 아예 물음을 그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해가 안 가는 게 더 있어. 어째서 그 구역에 진입하자마자 바로 포착돼서 의식을 추출 당하기 시작했냐는 거야.”
결국 오랫동안 서 있던 제이콥은 스툴을 하나 끌어와 바 테이블 안쪽에 앉았다. 그 사이, 헨드릭이 추측에 나섰다.
“지연이 없었다는 건 인간 의식을 감지하고 그 위치를 찾아내는 등의 과정을 전에 다 끝내놓았거나 그 구역 각성자가 마침 신세계에서 애쉬랜드로 돌아왔다는 뜻이야.”
동료들과 토론해본 경험이 아주 많은 성건우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첫 번째 가능성은 너무 공교로워. 우리는 그때 진짜 방금 막 문을 열고 들어간 상태였거든. 어째서 우리가 그 동작을 마친 그 순간에 딱 우리 의식을 포착하고 추출하기 시작했을까?
두 번째 가능성도 공교롭기는 마찬가지야. 내 생각에는 며칠, 혹은 몇 달 전이든, 아니면 며칠, 몇 달 뒤든 그 구역에 발을 들이기만 하면 무심자로 변할 것 같거든. 음, 이 점은 나중에 확인해볼 수 있을 거야.”
주관이 뚜렷한 그의 모습에 제이콥도 그냥 농담만 하나 던졌다.
“지연이 없을 가능성이 하나 더 있긴 해. 당시 네 의식을 추출하려 했던 게 달지기일 가능성이지.”
성건우는 다시 또 부정했다.
“그것도 이상해. 정말 달지기였다면 내가 제공한 보호막은 쉽게 뚫렸을 거야. 아무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겠지.”
제이콥은 이번엔 대답 대신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화제를 바꿨다.
“넌 일찍이 신세계 대문을 발견했지만 위험이 닥쳐온 후에야 그 문을 열고 들어온 거야?”
“맞아.”
성건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인내심이 굉장히 강하네. 난 그러지 못했는데.”
제이콥이 한숨을 내쉬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눈 뒤 레몬 마가리타를 다 마시고 정신이 또렷해진 헨드릭은 옆쪽 소파로 가 구석에서 색소폰을 꺼냈다.
묵직하고 고요한 분위기 속, 우울하면서도 편안한 악기 소리가 서서히 이 작은 술집을 채웠다.
성건우는 한동안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이 분위기에 푹 빠진 듯했다.
최소한 늘 눈을 가늘게 뜨고 다니는 헨드릭에게 얼후(*중국, 대만 전통 악기)를 주 악기로 다루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지 않은 걸 보면.
선율에 맡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자리에서 일어난 성건우는 제이콥에게 작별을 고한 뒤 밖으로 나갔다.
길가 가로등은 그의 걸음에 맞춰 다시금 빛을 발했다.
* * *
저녁 무렵, 제8 연구원 밖, 지프 안.
“포착과 추출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구나. 어쩐지 네가 늦지 않게 신세계 대문을 열고, 나도 네가 보호막을 씌워줄 때까지 버텼다 했네.”
성건우의 얘기를 듣고, 장목화가 깨달음을 얻은 듯 중얼거렸다.
성건우도 민감한 금지어는 일찍이 약속한 암호로 대체해 설명했다.
“맞아요, 맞아.”
성건우가 동조했다.
“이렇게 보면 그때의 상대가 달지기가 아닌 건 확실한데.”
장목화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달지기에게는 지연이 없었다.
이후로 장목화는 성건우와 간단히 몇 마디만 나눴다. 저녁에도 할 일이 있는 터라 지금 너무 많은 정신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장목화가 끝으로 성건우에게 말했다.
“이따가 너한테 영양제 한 대 놔줄게. 곧장 탑으로 가거나 부원장 등의 사람을 무작정 찾아가란 말이 아니야.
제이콥이나 플로라 같은 우호적인 사람들이랑 접촉하면서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더 많은 도우미를 찾도록 해. 음,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을 맞닥뜨린다면 완강하게 맞서지 말고 최대한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알겠어요, 믿을 만한 사람들과 뭉쳐 힘을 모아야죠.”
성건우는 늘 그랬듯 구세군의 행동 양식을 모범으로 삼았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한번 정리했다.
“우린 매일 아침, 점심, 저녁에 한 번씩 얘기하는 걸로 하자. 교류는 짧게 하는 게 좋겠어. 음, 만약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곧장 정신을 뻗어 네 의식과 접촉시키도록 할게.”
“제 쪽에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요?”
성건우가 되물었다.
장목화가 웃었다.
“넌 지금 네 육신을 통제해 어떤 동작을 취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본능은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어. 적어도 여태 대소변을 가누지 못하진 않던데.
나중에 뭔가 긴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곧장 바지를 적셔. 그럼 나도 바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있잖아.
만약 쌀 오줌도 없으면 의식을 포착해 추출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나를 자극해봐. 근데 그 방법엔 지연이 적잖게 생길 거야.”
“문제없어요.”
시원하게 응한 성건우가 빙그레 웃었다.
“지금 화장실 가고 싶은데. 큰 거랑 작은 거랑 둘 다.”
웃고 있던 장목화의 얼굴이 1초간 굳었다.
“잠깐만. 일단 널 밖으로 끌어내 자세를 갖출 때까지 기다려.”
할 일을 모두 마친 장목화는 곧장 현실의 신세계로 달려가진 않았다. 앞으로 몇 시간 정도 기다리면서 하늘이 더 어두워질 때를 노릴 작정이었다.
* * *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
한동안 부모님과 얘기를 나눈 용여홍, 백새벽은 그들의 집으로 돌아왔다.
막 자리에 앉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 바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익숙한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입니다.
오늘 오전, 지난 분기의 업무 보고를 심의한 이사회에서는 출생 인구가 안정적으로 늘어나고 물자 생산이 한층 다양해지는 추세를 칭찬했습니다⋯⋯.
이번 해의 공동 결혼 결과가 곧 발표될 예정입니다⋯⋯.
퍼스트 시티와 구세군이 변경에서 새롭게 충돌했습니다⋯⋯.
질서감독부에서는 지난달을 ‘악성 사건이 없는 달’로 지정했습니다⋯⋯.
오락부에선 각 층 활동 센터에서 탁구 대회 개최를 준비 중입니다⋯⋯.
방 안을 메우는 허정민의 목소리에 용여홍은 또 한 번 익숙함을 느꼈다.
그에겐 오늘 모든 순간이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반고 바이오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규칙적이고, 편안하고, 평화롭고, 느릿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래의 삶으론 다신 돌아갈 수 없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백새벽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표정은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웠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안정적이고 따뜻했던 때를 회상하고 있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 * *
신세계.
어둡고 적막한 거리를 걷던 성건우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밝혀진 위쪽 가로등을 바라보던 그는 곧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계속 똑같네. 아무 변화도 없어, 재미없게. 왜 랜턴 하나쯤 들고 다닐 순 없는 건데? 빛이라곤 없는 거리잖아.”
신기하고 새로운 걸 좋아하는 성건우의 불만이었다.
이에 성실한 성건우가 반박했다.
“달지기들이 너 하나만을 위해 신세계 규칙을 바꿔줄 수는 없잖아.”
“왜 안 돼? 나처럼 한 번에 달지기 10명을 믿는 사람이 흔해?”
신기하고 새로운 걸 좋아하는 성건우는 제 딴에는 당당한 듯 대꾸했다.
그 거만함에 신경 쓰는 성건우는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가 좀 어색해졌다.
한참 후, 신기하고 새로운 걸 좋아하는 성건우가 분위기 전환에 나섰다.
“말해 봐, 우리가 애쉬랜드로 돌아가려면 어느 달지기에게 기도하고 도움을 청해야 할까? 달지기 상징 모음집에 포함된 선택지는 엄청 많잖아!”
성급한 성건우가 내뱉듯 말했다.
“당연히 빅보스지! 회사에서 나고 자란 직원이자 빅보스의 직계 중 직계니 어쩌면 매주 5일씩 애쉬랜드로 돌아가는 특혜를 받을지도 몰라.”
성실한 성건우는 바로 그 의견을 무시했다.
“회사 내 신세계 강자들도 수시로 돌아오지는 못했잖아.”
성급한 성건우는 승복하지 않았다.
“그들이 수시로 돌아왔는지 어쨌는지 어떻게 알아? 세 끼 식사 시간에 딱딱 맞춰 돌아오면서 매일 맛있는 음식을 즐겼을지 누가 아느냐고.”
“나도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동조하기를 좋아하는 성건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감정을 중시하는 성건우가 나섰다.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대적해야 할 주요 목표가 바로 빅보스야. 그래야만 회사 내 모두를 구해낼 수 있어.”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제도 선사는 한숨과 함께 염불을 외웠다.
겁이 많은 성건우를 제외한 나머지 아홉 성건우는 한 달지기에 맞서는 걸 너무 높은, 허황된 망상 같은 목표로 여기지 않았다.
성건우들은 늘 자신감이 충만한 편이었다. 거의 흘러넘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