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828
828화. 정탐
인간 의식을 잘 숨긴 장목화는 허리를 굽힌 채 골짜기 안 잡초 덤불을 따라 현실의 신세계로 조용히 접근했다.
이곳 기온은 밖보다 조금 높았다.
이미 빙원에 여름이 찾아온 이때, 각종 생물도 활동을 시작한 상태였다.
장목화는 전기 신호 감지 능력과 외골격 장치에 딸린 야간 투시 기능 덕에 그런 녀석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소리소문없이 도시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곳에 버려진 지 오래된 아파트 옆에 몸을 숨겼다. 거의 동시에 드문드문 느껴지는 생물 전기 신호가 어느 정도 왜곡되는 것을 느꼈다.
미터-45형 군용 외골격 장치의 가시화된 계기판 역시 이곳의 전자파 환경이 외부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역시⋯⋯.’
장목화는 이에 대해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계획대로 별빛도 가로막힌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탑과 그 주위에서 빛을 발하는 등불로 조금씩 다가갔다.
지금은 목적지를 직접 볼 수 있는 상황이라 길을 찾는데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목표를 보던 그녀가 갑자기 미간을 구겼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감지된 무심자 의식이 너무 적었다. 그녀가 낮에 본 무심자들의 10분의 1에 불과해보였다.
지금 장목화는 이미 도시 절반을 관통한 상태였다.
‘10분의 9가 다 맞은편에 몰려 있을 리는 없잖아? 아니면 저들도 의식을 숨길 수 있는 건가? 의식을 숨기고 등불이 밝혀진 곳에 웅크려 있는 거야? 그럼 나머지 10분의 1이 그러지 않은 이유는?’
장목화는 앞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 연유를 알 수 없어서 그녀는 다시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이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등불에서 30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돌연 그녀는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누군가 바늘로 어느 신경을 찌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 익숙한 느낌에 장목화는 즉시 멈춰 섰다.
무심병의 전조 증상이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자 통증은 조금 전 상태 그대로 더 심화되진 않았다.
장목화는 잠깐의 고민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쯤 되니까 건우가 제공한 보호막도 의식 추출을 막아내진 못하는구나. 그래서 상응하는 전조 증상이 나타나는 거야.’
그녀의 현 위치에서 탑까지 거리는 약 160~170미터 정도였다.
장목화는 아쉬움과 실망감을 느꼈다. 성건우의 의식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신세계에 진입한 이후 스스로를 강화하는 방법은 성건우도 알지 못했고 그녀도 알지 못했다.
마지막 100여 미터를 돌파하려면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장목화는 일단 뒤로 일고여덟 걸음 정도 물러나 극심한 두통에서 벗어난 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방법은 두 가지야. 첫째, 건우 몸을 안으로 들여서 나랑 거리를 좁히는 것. 근데 지금은 건우의 의식 보호 효과가 약해진 건지, 아니면 저 탑과 내가 가까워져서 의식 추출의 힘이 강해진 건지 알 수 없어.
둘째, 보아하니 각성자 레벨이 높을수록 의식 추출에 대항하는 능력이 강해지는 것 같아. 내가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상태에서 건우의 의식 보호를 받는다면 분명 저 탑에 이를 수 있을 거야.’
장목화는 아직도 기원의 바다를 헤엄치며 다음 섬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섬에서 그녀는 황금 엘리베이터 앞의 자신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컸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장목화는 목표를 바꿨다.
이제는 감지된 무심자들의 상황을 하나하나 확인할 생각이었다.
* * *
신세계.
성건우는 계속해서 장목화의 정신 보호를 유지하면서 길가의 애쉬랜드풍 합원을 바라보았다.
합원은 인간을 상징하는 등불 없이 캄캄했다. 하지만 성건우는 아까 분명 경미한 기척을 들었었다.
2시간 전에.
즉, 성건우가 여기 서 있은 지도 벌써 2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소리였다.
“이게 바로 신중함이지!”
성실한 그는 스스로를 칭찬했다.
2시간 동안 내내 귀를 기울이던 그는 이 합원으로부터 수시로 기척을 느꼈다. 때로는 누군가 길을 걷는 소리가, 때로는 집을 관통하는 바람 소리가, 때로는 남녀 한 무리가 목소리를 죽인 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건우가 좌우를 살피며 말했다.
“시종일관 빛은 안 나타나네. 신세계 상황은 전에 만난 그 여자나 제이콥, 헨드릭이 알려준 것보다 더 복잡하고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나봐.”
“들어가 보면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
성급한 성건우가 다른 성건우들이 느슨해진 틈을 타 몸을 통제했다.
아예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선 그는 손을 뻗어 담장을 훌쩍 뛰어넘더니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모든 성건우 중에서 그의 힘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성건우가 들어서자, 정원에는 그를 상징하는 등불이 밝혀졌다.
* * *
합원 마당에는 물 항아리와 녹색 식물이 있었다.
그리고 이 맑으면서도 약간 축축한 공기가 왠지 좀 익숙했다. 꼭 퍼스트 시티 등의 대형 거점에서 막 황야의 교외로 나온 듯한 느낌이랄까.
성건우는 마당 상황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럴 때는 지프 지붕에 누워 별을 구경하면서 태양열 충전판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팀장님 욕이 들려야 하는데. 작은 빨강이랑 작은 흰둥이는 날 도와주긴커녕 저기서 알콩달콩 놀고 있겠지. 순찰은 겐 혼자만 할 거고⋯⋯.”
그가 떠올린 건 구조팀의 보통날이었다.
합원 마당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성건우는 심지어 물 항아리 안으로 고개까지 들이밀었지만 어떠한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푸……, 진짜 물이 들어있잖아!”
성건우가 급히 물 항아리에 담근 머리를 빼냈다.
이내 얼굴의 물기를 닦아낸 그는 몸채의 문으로 향했다.
잿빛으로 바랜 나무 문은 잠겨 있지 않고 살짝 닫혀만 있었다.
똑똑똑-
성건우는 담을 넘어 들어온 주제에 예의 바르게도 노크를 했다.
연달아 세 번이나 노크를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래도 성건우는 이쯤이면 만족했는지 큰소리로 외쳤다.
“답이 없으시니 허락한 걸로 알겠습니다!”
성건우는 즉각 오른손을 뻗어 몸채의 대문을 열었다.
* * *
문 안쪽에는 응접실 같은 곳이 있었다. 너무 고전적인 분위기에 성건우는 저도 모르게 탄사가 나왔다.
“와, 이거 완전히 살아있는 화석이네!”
말을 마친 그는 두 발짝 물러나 문밖으로 나가더니 위쪽을 올려다봤다.
“문화재도 아닌데⋯⋯.”
문화재라는 단어도 구세계 콘텐츠에서 보고 배운 것이었다.
응접실은 가구 배치마저도 매우 고전적이었다. 방문 맞은편에는 탁자 하나가, 그 좌우에는 홍목으로 만든 팔걸이의자가 있었고, 아래 자리에는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둔 구식 의자들이 두 줄로 놓여 있었다.
“영화 촬영장인가?”
성건우는 상당히 흥미로워했다.
그는 작지만 모든 걸 갖춘 신세계를 찬미하는 한편, 응접실을 우회해 들려오던 기척의 근원도 찾아 나섰다. 그는 좀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남자였다.
한참을 돌아보다가 결국 좌측 팔걸이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성건우는 자신 때문에 밝혀진 문 가의 등롱 2개를 보며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아무 문제도 없⋯⋯.”
순간 그의 목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왼쪽 방에서 들릴 듯 말 듯 낮은 곡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흑, 흑, 흑⋯⋯.”
성건우는 조용히 일어나 살금살금 소리의 방향으로 향했다.
탁!
성건우가 문가에 이르자 방 안의 등이 켜졌다.
그와 동시에 문가의 두 등롱은 꺼졌다.
“어휴!”
성건우가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방 안의 등을 밝힌 것 역시 그의 의식이었다.
더는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없었던 그는 문고리를 비틀어 문을 열었다.
방 구조는 평범했다. 책장 두 개, 창가에 붙은 책상, 맞은편에 자리한 침대가 있고, 빈 공간에는 의자 하나와 스툴 하나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가구들은 합원과 상당히 잘 어울렸지만 그리 낡아 보이진 않았다.
성건우는 방을 전체적으로 한번 슥 훑다가 창가 책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곳에는 액자가 하나 있었다.
성건우는 그쪽으로 다가가 등불 빛에 기대 액자 속 사진을 살폈다.
사진 속엔 앳된 여자가 있었다. 머리를 땋아 묶은 그녀는 그렇게 예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웃음이 참 아름다운 여자였다.
성건우는 한동안 그 사진을 보다가 돌연 오른 주먹으로 왼손을 쳤다.
“아, 기억났다! 이 여자가 누군지! 그 천재 과학자 인수영이야!”
당시 성건우는 522호 아이언마운틴 시티 폐허 트라우마에서 인수영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성건우는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중얼거렸다.
“여기도 그 사람 방이 있었다니⋯⋯. 근데 왜 등도 없고 사람도 없지? 아직 안 들어왔나? 그럼 아까 그 울음소리랑 다른 기척은 다 뭐야?”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던 성건우들은 일순 침묵에 빠졌다.
몇 초 후, 성건우는 방 곳곳을 뒤지며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점차 책장과 가까워졌다.
책장에는 각양각색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대부분은 전문 서적이었다.
성건우는 갑자기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 지식의 빛에 눈이 멀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내 책들 제목만 대충 훑어본 그는 침대 쪽으로 돌아섰다. 책 내용은 전혀 볼 생각조차 없었다.
* * *
어두운 밤, 장목화는 전의 감응을 따라 일부 무심자들 거주지로 향했다.
몇 번 맴돌긴 했지만 대략적인 방향은 맞아서 큰 문제는 없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이른 그녀는 창문 밖 그늘에 숨어 건물 안을 엿보았다.
남녀 무심자 한 쌍이 침대에 누워 정상인처럼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상한 구석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장목화는 시선을 거두고 다른 무심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한 차례씩 정탐을 마친 결과 그녀는 현재 감지할 수 있는 무심자들은 전부 인간의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파악했다.
그들은 침대 위에서 잠들었고, 창문을 닫았고, 문을 잠갔다.
한편, 그런 집 안에는 쌀 여러 포대나 밀가루, 통조림, 압축 비스킷, 에너지 바 등이 상자째로 난잡하게 쌓여 있었다.
이에 장목화는 제8 연구원이 터널 안에 레일을 설치해둔 것이 이 작은 도시의 무심자들에게 물자를 운송하기 위함이 아니었을지 의심했다.
그녀는 곧장 그 무심자들을 제거하려 하지는 않았다. 나머지 10분의 9에 해당하는 무심자들의 행적이 불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장목화는 이 점을 고려해 일단 이 현실 신세계에서 빠져나간 뒤, 성건우에게 자신이 발견한 문제들을 알려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를 통해 그의 정신 신세계 내 탐색을 촉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또한 그곳에서의 수확 역시 장목화가 현실에서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반드시 현실 신세계와 정신 신세계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것이 전제로 돼 있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