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860
860화. 폭로
황금빛으로 변한 양개형 문이 뒤로 젖혀지자, 순간 방 안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그림자는 구석구석이 완벽한 대칭을 이룬 데다가 불빛의 영향을 받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주인의 완벽함을 드러내는 그림자였다.
그와 동시에 그 방에 있던 성건우와 이두형은 사라졌다.
대신 붉게 달아오른 돌덩어리가 빽빽하게 쌓이고, 물이 한 줄기, 한 줄기 흘러내리며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방 안은 마치 선경처럼 부옇게 흐려졌다.
극도로 무더운 느낌이 생생했다.
이윽고 안개 깊은 곳에서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여자의 인영이 보일 듯 말 듯 아스라이 떠올랐다.
8월의 달지기 작열하는 문, 다피티르 오스라였다.
매우 아름답고 학업 성적도 남달랐던 그녀는 학생일 때도 상당히 유명했었다. 이후 제8 연구원에 들어와서는 한 걸음씩 더 성장해서 결국 핵심 프로젝트의 정식 연구자가 되었다.
그녀는 발랄한 성격과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이에 제8 연구원 내 적잖은 미혼 남성들이 그녀를 마치 신처럼 여겼었다.
달지기가 되고, 그녀가 갖게 된 결함은 추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작열하는 문의 등장에 검은 그림자의 주인, 황금 저울 찰리가 문밖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곧 분노가 어린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다피티르, 난 네 왼쪽 속눈썹이 오른쪽 속눈썹보다 두 가닥 더 많다는 걸 확인했다!”
그가 항상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이었다.
평범한 키에, 흔한 외모의 찰리는 헤어라인은 약간 뒤로 밀려나 있으나 금발 머리칼은 정확한 자리에서 완벽한 대칭을 이루었다.
* * *
쾅!
큰소리와 함께 인간의 얼굴이 드러난 문이 열렸다.
이내 화려한 셔츠에 비치 팬츠, 머리에 선글라스를 얹은 진리가 들어왔다.
이곳에서 그는 장생의 어떤 인격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맞은편 벽에 나타난, 호리호리한 검은 그림자뿐이었다.
검은 그림자는 이목구비가 없는 하얀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진리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모노, 네가 다 나타나다니. 어느 구석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모노는 3월의 달지기, 말인의 이름이었다.
당시 그는 제8 연구원 내에서 비교적 평범한 직원이었다. 주위에 인수영과 같은 천재가 수두룩하게 널린 탓에 줄곧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게 모노가 달지기가 된 후 갖게 된 결함은 나약함이었다.
하얀색 가면을 쓴 말인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나약할 뿐이지 겁쟁이인 건 아니야.”
“겁쟁이가 아닌데 어떻게 나약할 수 있겠어?”
진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 * *
반쯤 열린 방문 뒤, 깊은 어둠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한 여성의 인영이 빛이 있는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빛이 가장 밝게 비추는 곳에는 4월의 달지기 왜곡의 그림자 윈스트 갈랜드가 서 있었다.
한 손에 곰돌이 크래커를, 한 손은 주머니에 꽂아 넣은 그는 눈이 구현된 흰 천에 둘둘 싸여 있었다.
그랬다, 보이는 게 없다면 왜곡된 생물을 보고 놀랄 일도 없을 터였다.
곧 에이돌른이 들어왔음을 감지한 왜곡의 그림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때 수시로 농땡이 피우면서 순찰을 핑계로 재무실에 찾아가 너희들과 얘기하곤 했는데. 넌 매번 나한테 곰돌이 크래커를 나눠 달라고 했지.”
에이돌른은 잠시 침묵하다가 짙은 분노가 어린 목소리로 반문했다.
“내가 거저 얻어먹었다고 얘기하려는 거야?”
* * *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 라디오 방송국.
녹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작실 입구를 지키는 한 명뿐이었다.
벽에 기대 한가로이 책을 보는 남자는 전형적인 월급 루팡 그 자체였다.
그때, 남자는 회색 군화 두 켤레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누구…….”
남자의 질문은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다. 차가운 손에 목을 틀어 쥐이며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겁에 질린 얼굴로 눈앞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반고 바이오 내에 강도나 약탈은 발생할 공간 자체가 없었다.
라디오 방송국을 파괴하는 것 또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 순간, 남자 직원은 어느 프로그램에서 특정 부서에 관해 좋지 않은 내용을 보도해서 누군가 처벌받았고, 이에 화가 난 이들이 자포자기한 채 보복하러 온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다고, 난 그저 엔지니어로 설비 처리를 담당할 뿐이며 그 어떤 프로그램 제작진과도 밀접한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제 그는 눈앞의 남녀가 꺼낸 천에 입이 틀어막혔다. 그것도 빈틈없이, 꽉.
뒤이어 용여홍은 예비용 기기의 전선을 골라 남자의 손을 뒤로 결박했다.
그는 이 내부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무고한 이를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상대를 기절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상대에게도 지하 빌딩에서 도망칠 기회는 주어져야 했다.
기회를 주지 않는 건 그냥 죽이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용여홍은 조작실로 향하는 백새벽을 보며 성건우의 녹음 펜을 던졌다. 동시에 고개 숙여 엔지니어에게 말했다.
“조용히 하면 조금 있다 풀어주지. 그러지 않으면⋯⋯.”
용여홍은 강철 오른팔로 목을 부러뜨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런데 엔지니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 녹음실 대문이 벌컥 열렸다.
연이어 앳되고도 달콤한, 아주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산이 오빠, 저 테스트 좀 해보려고⋯⋯.”
몸을 홱 돌린 용여홍은 소스라치게 놀란 허정민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점점 겁에 질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용여홍도 이미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른 전사였다. 그는 이런 뜻밖의 상황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몸을 날렸다.
허정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얼른 도망쳐 도움을 청하려 했다.
쾅!
용여홍은 강철 손바닥으로 살짝 허정민의 귀 뒤를 가격해 그대로 기절시켰다. 동시에 그는 재빨리 쓰러지는 허정민을 부축하고, 강철 손으로 조용히 녹음실 문을 닫았다.
그 틈을 타 백새벽은 설비 조정을 마쳤다.
앞서 백새벽, 용여홍은 게네바에게 특별 훈련을 받았었다. 그 덕에 라디오 방송국 기기들을 사용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모델이 달라도 글자만 읽을 수 있다면, 구체적인 패턴만 파악한다면 그 이후에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게다가 정 안 되면 옆에 있는 조작실 직원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용여홍과 시선을 주고받은 백새벽은 녹음 펜을 상응하는 단자에 넣었다.
이 시각, 이 층에 있던 내근직원들은 명령을 받고 라디오 방송국 입구에 이르러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각성자 2명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 층으로 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직원 대부분은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보통날이었다.
* * *
소용돌이형 건물 안.
장목화는 실험 캡슐 옆에서 투명한 커버 안쪽의 성건우를 보고 있었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듯,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상응하는 지시등은 계속해서 빛을 발했다.
뇌 개발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주위론 출처 모를 바람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들이 장목화를 이 홀 밖으로 밀어내려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더 걸리려나⋯⋯.’
장목화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래도 그녀는 절대 성건우를 이대로 남겨두고 가고 싶진 않았다.
이제 뇌 개발에 성공하는 대로 핵탄두를 남겨놓고, 장목화는 즉시 성건우를 업고 빠르게 이 소형 도시와 제8 연구원을 벗어날 것이었다.
폭발은 원거리에서 일으킬 예정이었다.
또한 그사이에 게네바한테 전보도 보내야 했다.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 입구로 가서 직원들의 도피를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 * *
기기로 가득한 장생의 방.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성건우의 얼굴은 고통에 점철돼 있었다.
현재 그의 모든 인격이 거둬 들여진 채, 주위에 영체처럼 떠 있었다.
이 인격들은 때로는 고통스러워했고 때로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그들의 독립성과 자주성이 한층 증강된 듯했다.
곧 성건우의 몸 주위로 더 많은 허상이 떠올랐다. 머지않아 한계를 돌파해 대가를 최대치로 드러낼 것만 같았다.
“진도가 나쁘지 않군.”
옆에서 장생 이두형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때, 얼굴이 일그러진 성건우가 불쑥 외쳤다.
“제기랄! 작은 빨강이와 작은 흰둥이 쪽에서도 시작됐어!”
그러면 뇌가 한층 더 개발되고 있는 이 와중에 그는 반고 바이오 쪽 상황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성건우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반고 바이오 관리층과 내근직원에게 곧바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해서는 안 됐다.
동시에 성건우는 더 많은 힘을 발휘해, 녹음이 처음으로 방송되는 동안 심령의 복도급 각성자 대부분이 회사를 배신하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 그들은 지하 빌딩에서 도망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머지들을 처리할 터였다.
그냥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난도가 느껴졌다.
이는 아주, 아주 세심한 작업이었다.
더더욱 지금 같은 상황의 성건우에게는 더 극한의 수준이었다.
이두형도 그런 그를 힐긋 바라보며 약간의 도움을 제공하기로 했다.
바로 그때였다.
성건우에게 더 이상 익숙할 수 없는 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피티르, 모노, 갈랜드.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원장이 현상을 유지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아직 모르는 것 같네. 원장은 이 모든 걸 파괴할 생각이야. 제2 연구 구역에 핵탄두도 가져다 놨지.”
음성의 주인은 반고 바이오의 빅보스, 12월의 달지기 사명 조단옥이었다.
사명의 말을 들은 순간, 이두형의 안색에는 미미한 변화가 일었다.
‘벌써 알아차렸나?’
이두형은 핵탄두에 관한 일은 최대한 마지막까지 숨기고 싶었다.
현상유지파 달지기들은 맹목적인 변화를 거부했다. 그들은 유지를 원하지, 본인을 희생하면서까지 이 재난을 끝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 달지기들도 만약 장생이 그들의 목숨을 비롯한 이 모든 걸 끝내려 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들도 더는 개혁파 달지기를 막지 않을 것이었다. 심지어 반격에 나설지도 몰랐다.
본래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 아니던가.
계획의 성공을 위해 이두형은 줄곧 그의 진짜 생각을 숨긴 채 몇몇 달지기들을 속이는 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에 사명이 그 모든 걸 폭로할 줄이야.
이두형은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임과 동시에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을 들어봐⋯⋯.”
“얼른 청각을 막아! 무엇이 사실인지는 핵심 연구 구역을 관찰하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을 테니.”
이미 이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른 사명이 즉각 장생의 말을 끊었다.
장생의 사유 이식은 신세계 이하의 각성자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보조적인 말도 필요치 않았다. 뇌파 한 줄기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달지기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달랐다. 아무리 장생이라도 반드시 전력을 다해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