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868
868화 번외. 연회
타르난.
한 차량 행렬 무리가 세린 드림 여관 문 앞에 멈춰 섰다.
행렬의 우두머리는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를 맨 레드리버인이었다.
나이는 30대 정도로 보였다. 머리는 옅은 노란색, 눈동자는 옅은 파란색, 딱히 눈에 띄는 특징은 없었다.
이 레드리버인은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자동으로 회전하는 문을 통과해 여관 홀로 들어갔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리셉션의 사장은 앞에 놓인 컴퓨터 모니터에 몰두하느라 손님이 와도 묵묵부답이었다.
“아이노 부인, 방 20개가 필요합니다.”
레드리버인이 약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애쉬랜드어는 굉장히 유창한 편이었다.
아이노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오셨나요? 처음 보는 분들인 것 같은데?”
그녀는 남가관의 주명희가 아니었다.
남들의 특징을 굉장히 잘 기억했다.
레드리버인 남자가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임해 연맹 십방 상사의 신임 간사, 샐린저라고 합니다.”
아이노의 자세는 상당히 여유로웠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한가로이 물었다.
“이전 간사는 민스였죠? 그 사람은 왜 안 왔죠? 나이가 들어서 더는 타르난 같은 먼 곳에는 오기 싫다던가요?”
샐린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민스씨는 예전의 무심병 대폭발 속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이노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무심병에 걸렸나요?”
샐린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무심병에 걸린 이웃에게 죽었죠. 아무 대비도 못 했었거든요.”
아이노가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심병 대폭발은 들어봤어요. 임해 연맹의 손실도 심각했습니까?”
샐린저의 표정은 진지했다.
“엄청 심각했죠. 몇몇 대도시에는 무심병에 걸린 사람과 그들에게 죽어간 안타까운 이들이 절반을 넘었습니다. 중소형 거점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나아서 몇몇 곳에만 산발적으로 무심병이 폭발했고요.
하지만 저희한테는 이미 무심병에 대응하는 성숙한 방안이 있었고, 군대도 타격을 입기는 했으나 붕괴하지는 않았습니다.
최초의 비극을 넘어선 후에는 천천히 다시 일어나 조금씩 질서를 회복했어요. 구세계 파괴 당시의 그때처럼 완전한 혼란에 휩싸이진 않았죠.”
아이노가 낮게 웃었다.
“구세계 파괴 당시 90%가 넘는 이들이 무심병에 걸리거나 무차별적인 공격 속에 죽었단 걸 아실 텐데요. 이번 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고요.”
샐린저는 그녀와 논쟁하려 하는 대신 하던 말을 이었다.
“저희는 이번에 물자 손실이 상당합니다. 그래서 예정보다 일찍 타르난에 거래하러 온 겁니다.”
“다른 곳은요? 당신들과 다를 바 없던가요?”
아이노는 타르난은 물론 세린 드림 여관에서도 거의 떠나지 않았지만, 외부 상황에 대해선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샐린저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제가 알기론 각 대형 세력에는 전부 무심병의 대폭발이 발생했습니다. 굉장히 심각한 타격을 입은 곳과 상대적으로 나은 곳만 있을 뿐이죠.
구세군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지만 퍼스트 시티는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애쉬랜드 최대 도시였던 그곳은 주민 중 5분의 1만 살아남았는데……, 참 그것만 해도 다행이라 볼 수 있지요.
음, 퍼스트 시티 내 중소형 거점은 저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약간만 손실을 봤다고 하더군요.
반고 바이오는 검은 늪 황야 남쪽에 기지를 지었습니다. 본부가 큰 타격을 입었으니 밖에 나와 있던 구성원과 도망친 생존자들이 지은 것이겠죠.”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아이노가 자조하듯 웃었다.
“우리 타르난은 구석진 곳에 자리한 터라 어느 달지기의 관심도 받지 않아서 참 다행이네요. 몇몇 교파의 성직자만 무심자로 변했을 뿐이거든요.”
그녀는 곧 시선을 거두고 컴퓨터를 조작하더니 십방 상사의 사람들에게 방 스무 개를 내어 주었다.
물론 무료는 아니었다.
* * *
체크인을 마친 샐린저는 하늘색이 이미 어둑해진 것을 보았다.
배가 고팠던 이들은 얼른 역할을 나눠 움직였다.
일부 인원은 물건을 지켜야 하니 일단 마른 식량으로 허기를 달래도록 하고, 다른 부하들은 자유롭게 활동하며 알아서 먹을 것을 찾도록 했다.
샐린저는 전에 민스를 따라 타르난에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
이에 능숙하게 세린 드림 여관을 떠나 큰길로 접어들었다. 술집을 찾아 배를 채우고 시간도 죽일 작정이었다.
길 양옆의 화려한 등불은 저 끝까지 밝혀져 있었다. 적잖은 유적 사냥꾼은 등불 아래 좌판을 펼쳐 놓았고 로봇 경비대는 이따금 순찰을 했다.
샐린저의 기억 속 타르난과 크게 다르지 않은 광경이었다. 이곳은 전처럼 여전히 북적였고, 그때처럼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라진 것이라고는 닭 날개 튀김을 나눠주는 등의 각종 활동을 했던 교파들 뿐이었다. 샐린저는 그것들이 좀 그리워졌다.
* * *
이 거리 끝에 술집 두 곳이 있었다.
샐린저가 그 술집들과 가까워진 그때, 갑자기 시끌벅적하게 들려온 소리에 그의 시선이 돌아갔다.
바로 전방에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박자를 세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둘, 셋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호기심이 동한 샐린저는 즉각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던 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샐린저는 남가관 입구에 모여 기이한 춤을 추는 사람들 한 무리를 보았다.
그들 앞에, 장신의 흑발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회색 카무플라주 제복을 입은 남자는 군무의 리더처럼 끊임없이 박자를 외치며 신나게 춤추고 있었다. 음악과 춤에 아주, 아주 심취한 상태였다.
샐린저는 여태껏 봐왔던 것들을 떠올리며 나름의 추측을 했다.
“식후 오락 활동⋯⋯.”
춤추는 무리를 보고 있으려니, 샐린저도 조금씩 몸이 들썩거렸다.
그때, 남가관 안에서 한 애쉬랜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마찬가지로 회색 제복 차림인데, 그 여자 역시 키가 상당히 컸고, 머리는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고 있었다.
여자는 웃으며 문 앞의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밥 먹자!”
춤을 선도하던 장신의 남자는 유일하게 남은 여덟 박자 동작까지 기어코 다 춘 후에야 환호했다.
“와, 돼지 잡을 시간이다!”
방금까지 춤추고 있던 이들이 분분히 남가관 안으로 몰려갔다.
샐린저는 이 광경을 보고 막 돌아서 술집으로 가려 했으나 문가에 서 있던 약 180센티미터 정도의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불러세웠다.
“같이 드세요. 자리는 많으니까.”
상대의 친절함과 돼지고기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린 샐린저는 결국 남가관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당과 전각엔 원형 테이블 서너 개가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 차려진 그릇 안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진하고 특이한 향기도 느껴졌다.
“……꿀꺽.”
샐린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다음 순간 그는 허리에 삼끈을 맨, 하얀 가운 차림의 주명희를 보았다. 남가관 관주는 오늘도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주 관주님.”
샐린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주명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한동안 살핀 후 입을 열었다.
“어느 세력에서 오셨죠?”
“임해 연맹 십방 상사입니다.”
주명희는 그제야 기쁘게 반겼다.
“아, 민스! 당신이군요. 오랜만이에요.”
흠칫 놀란 샐린저는 2초 정도 멍해져 있다가 대꾸했다.
“저는 민스 씨가 아니라 샐린저입니다. 전에도 여기 두세 번 왔었는데.”
그는 주 관주의 안면 인식 장애가 전보다 훨씬 심해졌다는 걸 알았다.
이내 주명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아~ 어쩐지 아무런 기억도 안 나더라니⋯⋯.”
그녀가 말을 다 맺기도 전, 원형 탁자 옆에서 한 사람이 외쳤다.
“주 관주님, 어서 오세요! 관주님 자리를 마련해놓았습니다!”
주명희는 대답과 동시에 그곳으로 향했다.
샐린저도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앉아 연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의 왼편으로는 두 사람이 나란하게 앉아 있었다. 남녀 한 쌍인데, 이들 역시 모두 회색 카무플라주 제복 차림이었다.
여자는 단발머리였고, 남자는 키가 175센티미터 정도 돼 보였다.
샐린저와 비슷한 키였다.
곧 각종 돼지고기 요리들이 속속 상에 올랐다.
샐린저는 젓가락을 들고 그 음식들을 능숙하게 먹기 시작했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육즙을 뿜는 고기 맛에 도무지 젓가락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배가 어느 정도 불렀을 무렵, 샐린저가 감탄했다.
“정말 맛있네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175센티미터의 남자가 동조했다.
샐린저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두 분은 부부십니까?”
그 남자와 옆에 있는 아담한 단발머리 여성을 보고 물은 말이었다.
“예, 예.”
175센티미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를 먹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타르난 현지인이 아니라 외지인 같은데, 이곳에서 머무실 생각인가요?”
샐린저는 평소 남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남자가 웃었다.
“타르난에 진정한 현지인이 몇이나 된다고요, 저희도 북쪽에서 오기는 했습니다. 여긴 치안도 좋고 물자도 비교적 풍족해서 여생을 지내기 적합하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식들이 평안하게 커 가는 걸 보는 게 인생의 가장 큰 행복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그는 곁의 단발머리 여자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부인께서 임신하셨나요?”
샐린저가 본인 일처럼 기쁘게 물었다.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딸인지 아들인지는 모릅니다.”
“이름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샐린저가 물었다.
남자는 아내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둔 게 있기는 한데 그래도 아내 의견을 따라야죠.”
그러자 단발머리 여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이름은 상관없어. 근데 아이의 선생님 역할을 할 평범한 지능 로봇은 한 대 준비해야 해. 아이 형태를 한 로봇으로.”
“응, 그래.”
남자가 답했다.
샐린저도 이젠 부부의 사담에 끼어드는 대신 맛있는 음식에 집중했다.
* * *
뜨끈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연회가 끝나고, 사람들은 그릇과 젓가락을 치우기 시작했다. 샐린저 역시 그 행렬에 동참했다.
정리를 마쳤을 무렵, 샐린저는 자신을 이 자리까지 초대했던 키 큰 여자를 보았아. 리클라이너를 끌고 나온 그녀는 전각 지붕 밑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위로 높은 곳에 달린 등불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샐린저는 감사의 뜻을 표하려 그녀에게 다가가 한담하듯 말을 건넸다.
“무슨 책입니까?”
여자는 웃으며 책을 들어 보였다.
“구세계의 ‘골드코스트 민속 연구’요.”
“아⋯⋯.”
딱히 관심 없는 주제였다.
이에 샐린저는 알아서 화제를 전환했다.
“최근 타르난에 어떤 변화라도 있었습니까?”
여자가 웃었다.
“외부에서 온 로봇을 철저히 조사 중이죠. 첩자의 침입도 막을 겸.”
“로봇 첩자?”
샐린저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걸렸다.
바로 그때, 아까 춤을 리드하던 키 큰 남자가 남가관 문 앞으로 와 밖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오늘은 낭송 경연 대회가 있는 날이에요!”
“낭송 경연 대회?”
샐린저는 물음표를 달고 다시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자 역시 문 쪽의 남자를 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하하, 당연한 거 아니에요?”
여자가 실소했다.
다시 샐린저가 물었다.
“지금 저분은 뭘 하는 겁니까?”
“오락 활동을 조직하고 있죠. 얼마 전에는 노래 경연 대회를 열었고, 또 그전엔 춤 대회, 최근에는 방송 체조와 낭송 연습⋯⋯.”
여자는 한 손에 책을 쥔 채 다른 손으로 손가락을 꼽았다. 손가락을 꼽을 때마다, 그녀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 사이, 문가에 낭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시 낭송을 듣던 샐린저는 여자에게 초대해줘서 고맙다는 뜻을 전한 뒤 전각으로 들어갔다.
* * *
많은 신도가 의자에 바로 앉아 깨진 거울 조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의 상징 앞에 기도하고 있었다.
흰 가운을 입고 삼끈을 허리에 맨 검은 머리의 주명희는 속세의 티끌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듯했다.
샐린저는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책 읽는 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주 관주님, 저 여자분은 남가관에서 머무는 겁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리클라이너까지 갖다 놓고 한가롭게 책을 읽을까.
역시 주명희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샐린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 남가관에 사람이 많이 늘었군요. 전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심지어 신도도 얼마 되지 않았었다.
주명희는 작은 탄성을 뱉고는, 두 팔을 들고 몸을 살짝 젖혀 위쪽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를 읽어주신 모든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