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24)
나 빼고 다 회귀자-124화(124/356)
나 빼고 다 회귀자 (124)
Chapter 24. 계획은 내다 버리는 것 – 3
기준은 틸라의 데이트 신청을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아니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어프로치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니,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틸라는 단지 기준과 둘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녀의 승급과 관련한 일이었다.
기준은 그녀와 두 사람만의 자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빨리 끝나는 일이지? 오랜만에 보는 애들이라 걔네가 오기 전에 환영 파티 준비하고 싶거든.”
“준, 나는 네 그 정 넘치는 성격이 너무 좋지만, 지금은 우리 둘뿐이니까 다른 사람 얘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네.”
“질투야?”
“맞아, 나는 사실 엄청 질투가 심하거든. 파티 멤버의 멘탈 케어라고 생각하고 협력해 줘.”
틸라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미 정신 상태가 문제가 되어 한 번 문제를 일으켰던 그녀가 멘탈 케어를 입에 담으면 기준 입장에선 도저히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대응이 곤란해진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그래서…… 이 안에서 승급하려는 거야?”
“맞아. 이래 봬도 엄청 비싼 거야. 내가 우리 문명의 유산을 전부 물려받지 않았으면 만드는 건 엄두도 못 냈겠지.”
“틸라, 아까부터 자꾸 대답하기 힘든 무거운 주제로 넘어가는 거 자제해 줬으면 하는데.”
두 사람은 지금 밀폐된 거대한 상자 같은 것 안에 들어와 있었다.
틸라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승급을 위해 준비해 두고 있던 것이었다.
그녀가 말하길 천문학적인 단위의 돈을 써서 구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기준은 두 사람이 들어가고도 공간이 남는 이 상자에 아까부터 굉장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루시가 먼저 그 기시감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이거 그거네, 계약자. 그 악마가 계약자를 진화시킬 때 썼던 박스.
“혹시 그게 대륙 승급 표준이었던 건가……?”
―하지만 그때 그것보다는 확실하게 뛰어난 물건이야. 악마가 샀던 박스도 꽤 비쌌던 것 같던데…… 이건 대체 얼마일지 물어보고 싶지도 않은걸.
사람들을 모아 놓고 종족 승급의 난해함에 대해 논하자면 눈물을 드럼통으로 받아 내도 넘칠 것이다.
비체의 도움을 받아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승급에 도전할 수 있었던 기준은 굉장히 축복받은 환경에 있었던 셈.
그렇다면 비체 같은 조력자 없이도 승급 조건을 맞추기 쉬운 경우에는 무엇이 있을까.
만약 문명 전체가 같은 종족이며, 승급의 길도 하나밖에 없다면.
나아가 서로를 무척 아끼는 거대한 가족 같은 관계에 있었다면.
그들은 동족 전체에 승급 조건을 공유하고, 나아가 동족의 승급을 돕기 위해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염인이 바로 그러했다.
“나 이전에 레전더리 등급에 도달한 분이 계셨거든. 그분은 무척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셔서, 나는 그런 고생하지 말라고 직접 방법을 생각해 주셨어.”
“너를 위해 생각해 주셨단 말이지. 역시 넌 옛날부터 뛰어났구나.”
“당연하지, 우리 문명의 제일가는 기대주였는걸.”
여기서 기준은 직감했다.
그녀가 말하는 ‘그분’이 누군지 묻는 것은 좋지 않다.
필시 틸라와 깊은 관계였을 터, 가뜩이나 과거가 지뢰투성이인 그녀의 정신을 자신이 직접 공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준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누군지 궁금하지? 후후, 내 아버지였어.”
“아아아, 미안해.”
기준은 절망했다.
이제 생각조차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틸라는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기준의 모습을 보곤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내 불행을 자랑하듯 늘어놓으며 네 애정을 요구할 생각은 없으니 너무 그렇게 초조해하지 마, 준. 지금 난 충분히 행복한걸? 그래서 옛날 얘기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야.”
“으음, 그래…….”
“만약 내가 불행했다면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슬퍼졌겠지. 하지만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안다면 아버지도 분명 기뻐하실 거야. 그러니 그분을 떠올려도 슬프지 않아.”
아무리 그녀가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기준은 충분히 무겁고 불편한 기분이었지만 틸라가 정말로 환하게 웃고 있었던 탓에, 그도 곧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래, 만약 그녀가 과거를 떠올리며 우울해했더라면 이렇듯 기준에게 자신의 가족 얘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을 리는 없을 터였다.
“네 애정을 원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누구든 알아, 이 불여우야!
“네 마음을 얻는 건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넌 내 과거에 동정하지 말고 지금의 나만 봐 줬으면 해.”
“넌 정말 숨기는 것 하나도 없이 솔직하구나.”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를 여과 없이 순수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굉장한 재능이다.
루시도 그렇고 틸라도 그렇고, 기준은 아직 꿈도 꾸지 못하는 초인의 경지에 가까운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럼 이제 내 승급에 대한 얘기를 할까?”
“덤으로 나를 이 안으로 끌고 들어온 이유도 얘기해 줬으면 하는데.”
“그건 간단해. 어차피 내 승급에 한 번 쓰면 물건이 사라지니까, 기왕이면 나와 비슷한 능력을 갖춘 준도 혜택을 나눠 받았으면 해서야. 내가 보기엔 너도 지금 모종의 한계에 부딪친 상황 같은데…… 아니야?”
“……정확해.”
“후후, 역시.”
역시나 아까 퀘스트의 보상을 받을 때 기준과 틸라의 시선이 맞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틸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곤 말했다.
“염인이 불을 다루는 원리는 알고 있어, 준?”
“솔직히 하나도 몰라.”
“중요한 건 아니니 간단히 설명할게. 염인의 마력은 두 가지 선천적인 성질을 갖고 있어. 하나는 알고 있다시피 불을 일으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주위로부터 열을 빼앗는 거야.”
“틸라, 혹시 알고 있어? 불은 빛과 열을 방출하는 현상이야. 열을 빼앗는 불은 이미 불이 아니야.”
물론 기준은 마력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자신이 알고 있던 과학적 상식을 모조리 쓰레기처럼 내던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선을 넘었다.
열을 빼앗는 불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치자, 그럼 그것에 닿아도 전혀 뜨겁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열기를 빼앗겨 동상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겠지.
‘하지만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내가 다루는 빛도 마찬가지니까…….’
빛은 전자기파다.
그러면 왜 빛을 마음대로 조작하는데 전기는 다루지 못하는 것이며, 방사선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차례로 솟구치는데…….
애초에 이 세계는 빛의 힘과 어둠의 힘이 따로 있고, 태양빛과 달빛을 따로 구분하는 세계라는 점을 떠올리면 모든 의문이 깔끔하게 해결된다.
이전에도 이 문제에 대해 루시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가 다루는 빛의 공격력에는 빛이 발생시키는 복사열도 포함되지만, 사실 주력은 열이 아니라 빛의 형태로 빚어져 빠르게 발산되는 공격적인 마력 그 자체라고.
“그러니 분명 이 모든 게 마력 때문이겠지. 좋아, 납득했으니까 이제 설명 계속해.”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네. 우리의 마력은 우선 주위로부터 열을 빼앗은 다음 발화해. 주위에 열이 없을 땐 마력만을 소모해서 열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에 다소 효율이 떨어지는 편이지.”
“흠…… 혹시 주위에 얼음이 가득하면 약해지는 것도 그래서야?”
“맞아! 이제 이야기가 통하는구나!”
물론 제법 그럴듯한 설명을 덧붙였다고 해서 틸라의 말에 과학적인 설득력이 추가된 것은 아니다.
열은 기본적으로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달되는 성질을 갖고 있기에, 무턱대고 주위의 열을 흡수하는 염인의 마력은 존재부터가 신비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게 그런 염인의 마력이 극도로 농축된…… 우리 아버지의 심장이야.”
“아니.”
돌연 품에서 뭘 꺼내나 했더니, 굉장히 작게 응축된 붉은 보석이었다.
그것을 대뜸 아버지의 심장이라고 설명하는 틸라에게 대체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곤란해하고 있자니…….
―우르르르.
그녀의 품에서 그것과 비슷한 보석이 동시에 수십, 수백 개 이상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 동족의 심장이야. 다들 죽어 가면서 내게 맡겼어. 성장하는 데 써 달라고 말이야.”
“잠깐, 잠깐만.”
방심할 틈도 없다.
하지만 틸라는 그저 빙긋이 웃어 보인 후 설명을 이었다.
“염인은 유니크 등급에 이르기 위해선 오직 자신의 불꽃을 보다 강대하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면 돼. 애초에 레어 등급으로 타고난 축복받은 종족이고, 유니크 등급으로 성장하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 않지.”
“레전더리 등급으로의 승급은…… 다른 모양이네.”
“맞아. 전설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 염인은, 몸에 지닌 열을 뺏기지 않는 법을 터득해야만 해.”
“아.”
당장 염인이 멸족 위기에 몰렸던 원인을 떠올려 보며 기준은 절로 납득하고 말았다.
열을 뺏기지 않는다는 것은 추위에 강해진다는 것이고, 그런 염인에게 냉기를 쏟아붓는다 한들 쉬이 약화되지 않을 터.
우습게도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서 말하는 적자생존의 논리와 비슷했다.
물론 열기를 빼앗기지 않는 성장을 이룩한다면 결과적으로 보다 강한 열기를 다룰 수 있게 되겠지.
요는 방향성의 문제였다.
나아가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옳은 방향을 정하는 것은 늘 어려운 법.
“그래서…… 이 심장들이 지닌 마력을 동시에 폭주시킬 거야.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우린 확실하게 성장할 수 있겠지.”
“이거 정말 옳은 방향 맞아……?”
하지만 내구를 비체의 도움도 없이 전설의 영역에 올려놓기 위해선 확실히 이 정도 고난은 겪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아, 그러고 보면 이것 때문에 처음 신수 고기를 먹고 그런 말을 했던 거야?”
틸라가 처음 신수의 고기를 먹었을 때, 그녀는 기쁨에 차 기준을 껴안으며 ‘다음 경지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리고 신수의 고기는 스테이터스의 영구적인 성장 외에도 ‘냉기로부터 몸을 보호한다’는 효과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맞아, 준. 요리의 도움을 받더라도 업을 이룩하는 덴 큰 방해가 되지 않으니까. 사실 그게 없었으면 오늘 도전할 생각도 못 했을 거야.”
참고로 그들은 꾸준히 하티의 고기를 먹고 있었으며, 스테이터스 영구 성장은 단발로 그쳤지만 냉기로부터 몸을 보호해 주는 효과는 꾸준히 갱신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요리의 효과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린 기준은 각오를 굳혔다.
“좋아, 해 보자.”
“너무 걱정하지 마, 준. 죽게 되더라도 내가 먼저 죽을 테니까.”
굉장히 불길하게 들리는 말을 내뱉은 틸라가, 직후 그의 위아래를 훑으며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럼 이제 벗을까.”
“응?”
당황하는 기준에게 틸라가 당당하게 말했다.
“이 많은 염인의 심장을 동시에 폭주시키는 데 장비가 남아날 수 있겠어? 괜히 아까운 장비 날리지 말고 모조리 벗어서 인벤토리 안에 넣어 둬.”
“……틸라, 솔직하게 말해 줘.”
유니크 등급 장비를 날려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단 급하게 갑옷과 두 방패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기준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내 수련을 돕는다는 건 핑계고 사실은 그냥 내 알몸을 보고 싶었던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 ……20% 정도는!”
이런 상황에마저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마는 틸라의 태도는 무척 존경스러웠지만, 태도를 제외한 나머지는 최악이었다.
‘네 마음을 얻는 건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는 무슨, 순 기회주의자에 사기꾼이 아닌가.
―계약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계약자의 순정을 능멸한 이 버르장머리 없는 불여우를 빛으로 태워 버릴 때야!
‘아니, 그래도 이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더구나 막상 폭주가 시작되면 냉기를 버티느라 서로 알몸을 신경 쓸 여유도 없을걸.’
―큭, 이게 바로 악법도 법이라는 건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계약자의 행동을 강제하다니 이런 영리한!
‘미안한데 그 예시는 완전히 틀렸어, 루시.’
차마 자신을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는 여자 앞에서 다 벗을 자신은 없었던 기준은 얼어붙어 바스러져도 별 타격이 없는 속옷만 남겨 두고 나머지 옷을 모조리 벗어 인벤토리에 넣었다.
막상 기준을 힐끔거리던 틸라도 그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웠는지 속옷까지는 차마 벗지 못하는 것이 귀여웠다.
“그, 그럼 시작할게?”
속옷만 입은 모습도 보여 주기 부끄러운지,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고 수줍어하며 말하는 틸라.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잠시 굳어 버린 기준은 다급히 제정신을 되찾곤 그녀에게 제안했다.
“잠깐만. 시련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서로 등을 돌리고 서자.”
“알았어. ……쳇.”
성정이 온후하고 상냥해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틸라가 혀를 찰 리가 없으니, 방금 그것은 분명히 환청이겠지.
기준이 잽싸게 그녀로부터 등을 돌리고 서는 옆에서 루시가 조용히 말했다.
―이거 밖에서 보면 완전히 오해할 텐데.
“그런 재수 없는 말 하지 말아 줄래, 루시?”
루시의 입단속을 하고, 이번에야말로 시련을 시작하려던 그때.
―키이이.
―응? 우르?
평소엔 얌전한 우르가 웬일로 자기주장을 했다.
잠시 녀석과 대화를 나누던 루시가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계약자, 이번엔 이 녀석이랑 해 보는 게 어때. 가뜩이나 계약자는 고유 스킬이 있어서 상태 이상에는 강하잖아? 거기에 내 방어 능력까지 더해지면 솔직히 여기서 버티는 게 너무 쉬워지거든.
“…….”
기준은 루시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발밑에서 자신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는 불 고양이와 눈을 맞추었다.
녀석이 루시에게 호승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등급이 유니크로 성장한 지금도 루시에게 상대가 되지 않으니, 녀석으로선 내심 기준이 자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기용해 줬으면 하는 마음일 터.
루시의 능력을 활용해도 ‘업’을 달성한다는 면에서는 손해 보지 않을 터이나.
그의 목적은 순수한 내구의 단련이기도 하고, 우르의 의지를 무시할 수가 없었던 탓에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틸라와 비슷한 조건을 갖추는 게 더 좋겠지. 그렇게 하자, 우르.”
―키잇, 킷킷!
루시가 상자를 빠져나가고, 그렇게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 말한 것도 아닌데 서로 등을 맞대고 섰다.
틸라가 내심 원하던 에로틱한 상황에선 많이 멀어졌지만― 그녀는 서로의 심장 고동을 피부를 맞대고 직접 느낄 수 있는 지금 상황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제 진짜 시작할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질문하자.”
“응. 뭔데?”
“문 잠갔지? 여기 아무도 못 들어오지?”
“그야 당연하지. 내 알몸을 준 이외의 사람에게 보일 생각은 없으니까.”
루시의 불길한 예언을 짓눌러 부수는 데 성공한 기준은 안심하며 말했다.
“그럼 시작해 줘.”
“좋아.”
틸라가 제 마력을 뻗어 아버지의 심장을 자극했다.
그것이 그녀의 마력에 반응해 폭주하며 주위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에 영향을 받은 다른 염인의 심장도 일제히 폭주를 일으켰다.
눈 깜짝할 사이 기온이 절대 영도에 가깝게 떨어지고, 폭주하는 염인의 마력이 두 사람의 열기를 빼앗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고 덤벼들었다.
‘하.’
입을 열면 내장이 얼어붙을까 두려워 감히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속옷도 금방 바스러져 사라졌다.
마력과 영력을 순환시키는 살루타리스, 신체를 초월시켜 주는 아다만트, 모든 상태 이상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는 고장 나지 않는 체내 시계, 마지막으로 불꽃과 열기를 다루는 우르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 자신에게서 열을 빼앗아 가려는 의지와 정면으로 맞붙었다.
세상 모든 것이 적으로 화한 것만 같은 압박감에 모든 감각이 일그러지는 와중에.
그와 맨살을 맞대고 선 틸라로부터 느껴지는 온기가 그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할 수 있겠는데.’
이대로 두 사람이 함께 버티는 게 너무 쉬워서 그녀가 승급에 실패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든든했다.
물론 그건 한없이 오만한 생각이었지만, 그와 온기를 공유하고 있는 틸라도 정확히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둘 다 입을 열지 않았으나, 마음은 하나로 통하고 있었다.
―키이이이잇!
―코옹, 코오옹!
영력과 마력으로 이루어져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우르와 로딤의 목소리만 높아져 가는 와중에.
염인의 마력이 본격적으로 두 사람을 물어뜯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