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38)
나 빼고 다 회귀자-138화(138/356)
나 빼고 다 회귀자 (138)
Chapter 27. 흡혈귀가 된 날 – 3
가시공의 성은 막대한 양의 성유물을 혈력과 엮어 만들어 낸 일종의 고유 영역이다.
그런데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손해는 얼마나 막심할 것인가.
고유 영역의 지원 없이도 침입자들을 흩어 놓고 그들의 능력을 저하시키는 가시공의 혈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익히 짐작할 수 있을 터다.
다만 로라가 앞장서서 이끄는 파티에게는 그것이 거의 통용되지 않았다.
가시공이 직접 로라와 맞상대를 하면 모르겠으나, 성내에 흩뿌려진 마력 정도로는 그녀의 혈력을 뚫고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큭.”
세 명 째의 결사대원을 구출했을 즈음, 여태껏 일행의 선두에서 길 안내를 하던 로라가 돌연 제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로라 양!”
“오지 마세요!”
“힉!”
긴이 당황하며 그녀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그 전에 로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를 멈추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성법을 영창해 제 머리를 빛의 고리로 감싼 로라가 치미는 충동을 애써 몰아 내는 데 성공하곤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 성의 꼭대기에 있는 자가…… 부르고 있어요. 흡혈귀들을 전부……!”
로라는 종족적으로는 흡혈귀가 아니었으나― 고위 흡혈귀인 카르밀라의 직속 혈족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보다도 순수한 흡혈귀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지금 이 성의 지배자, 가시공이 발하는 동요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겁을 먹고 있어요. 여태껏 우리를 얕보고 있던 그가 비로소 우리를 위험한 적으로 인식한 거예요. 평소의 명령 체계를 무시하고 제 목소리가 닿는 곳에 있는 모든 흡혈귀를 모조리 부른 것만 봐도 분명해요.”
“준이구나.”
틸라가 확신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로라 역시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짓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의 힘에는 대비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준 님은 보이는 것과 실제 능력이 가장 크게 차이 나는 분이니 분명― 아마도 드래곤 기사단의 일원이 죽은 것 같아요. 둘, 아니 셋…….”
로라는 자신이 입 밖으로 내뱉어 놓고도 ‘드래곤 기사단’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성을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기억과 감정들이 스며들어 와 로라를 괴롭게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그렇게 전염된 기억에서 건져 낸 정보들이 일행을 돕고 있었다.
다행히 드래곤 기사단에 대해 아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방금 그들이 구출한 결사대원이었다.
“드래곤 기사단이라면 쿠드라크의 최정예로만 이루어져 오직 가시공의 명령만을 따르는 집단, 전원이 레전더리 등급이라는 소문도 있는데……!”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다른 결사대원의 부축을 뿌리치고는 외쳤다.
“낭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바로 전하와 합류하지 않으면! 구해 준 것은 감사하나 난 전하께 가야겠소!”
“네? 하지만 아직 따로 떨어진 사람이.”
“낙오한 자들보다 전하의 안위가 더욱 중요해!”
“그렇게 말한다면 이쪽도 마찬가지. 소국의 왕자보다 대륙의 운명을 짊어진 용사님이 더욱 중요하다. 협력할 생각이 없다면 나도 용사님을 찾아 떠나겠어!”
“하, 갑시다!”
일행이 구출한 셋 가운데 둘은 렉투스가 이끌던 파티에 속한 기사들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파툼이 이끌던 용사 파티에 속한 이였다.
그런데 한 명이 돌발 행동을 하자 마치 감정이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그들 모두 갑자기 화를 내며 몇 마디씩 내뱉더니, 일행에겐 뭐라 말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닌가.
복도 너머로 뻗는 걸음걸이는 정말로 렉투스와 파툼의 위치를 아는 것처럼 당당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
보나마나 이대로 성 안을 헤매다, 운이 나쁘면 또 강한 흡혈귀를 만나 당하겠지.
기껏 죽기 직전의 상황에 처한 사람을 살려 놓고 치료까지 해 줬더니 제 발로 죽을 길을 찾아 들어가는 것을 보며 긴은 아연해졌지만, 틸라와 로라는 어느 정도 그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쯧, 가시공의 영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나 봐.”
“이래서 서둘렀던 건데…… 늦었네요.”
“아, 혈 마법 탓이군요.”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처럼 보였는데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틸라가 로라의 얼굴을 힐끗하며 물었다.
“성법은?”
“저들을 지키려 성법을 남발하다 보면 신성력이 금방 다 소진되고 말 거예요. 최소한의 치료는 해 줬으니, 살아남아 합류할 수 있기를 바라야겠죠.”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으나 틸라는 어째서 로라가 성법을 추가로 써 가며 그들을 진정시키지 않았는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성 안을 가득 채운 가시공의 혈력이 사람들의 정신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겠으나, 그들의 행동을 촉발시킨 것은 조금 전 있었던 로라의 발작이었다.
그들은 로라의 능력에 도움을 받고도, 그녀가 가시공의 영향을 받는 것을 보곤 겁을 먹어 적당한 이유를 대고 이 자리를 피한 것이다.
잔인한 일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불안해할 만한 모습을 보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로라도 체념하고 있었다.
“어쩌면 준 님과 떨어지지 않는 게 정답이었을지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긴이 결사대원들이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지만 틸라는 픽 웃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그건 아니지. 그랬으면 확실하게 죽는 사람이 나왔을지도 모르잖아?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서두르자. 가시공이 흡혈귀를 소집하려고 하는 건 어쨌든 준이 가진 송곳니가 놈에게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진다는 얘기야.”
“우릴 흩어 놓고 각개격파 하려다 되레 죽어 나간 흡혈귀의 숫자가 많아요. 그러니 성 안에 있는 흡혈귀들이 모이는 건 차라리 좋은 일일 수 있어요. 하지만…….”
로라는 불안한 표정으로 복도 너머, 보이지 않는 성벽 너머를 째려보며 중얼거렸다.
“쿠드라크의 전력은 결코 이 정도가 아냐. 만약 저들이 모조리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더더욱 서둘러야겠네. 어찌됐든 가시공의 목만 꺾으면 모두 끝나겠지.”
“그것만으론…… 끝나지 않아요. 심장에 축성한 말뚝을 박아서…… 피를 모조리 뽑아내고, 머리를 잘라, 강력한 성법으로 정화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리는 목소리로 가시공을 죽이기 위한 절차를 논하는 로라의 모습에선 섬뜩한 귀기마저 느껴졌다.
“까다로운걸. 루시가 제때 복귀하면 될 것도 같지만 만약 안 되면 그땐…… 로라, 네 신성력으로 가능하겠니?”
“할 수 있어요. ……아마도요.”
아니, 사실은 자신이 없었다.
성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심해져 가는 충동에 그녀는 자신이 원래 누구였는지도 문득문득 까먹을 때가 있었다.
그녀가 버틸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 카르밀라에 대한 복수심과 기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덕분이었다.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은 극한에 치달아, 때론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괜찮아…… 난 잘하고 있어. 흡혈귀도 많이 죽였고, 더 죽일 거야. 카르밀라……. 카르밀라를 죽이면 편해질 거야. 그래. 그러면 준 님을 물지 않아도 괜찮아.’
로라가 앞으로 나섰다.
“가죠. 준 님은 위에 계세요.”
“그래, 가자.”
틸라가 차분히 대꾸하며 로라의 곁을 걸었다.
긴은 로라를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셋은 기준의 곁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전에 카르밀라가 로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 * *
예민은 처음부터 원정대의 퇴각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뭉쳐 폭발한 사람의 욕망에는 끝이 없어서,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보지 않고는 수습할 수 없음을 다년간의 경험으로 익히 학습했기 때문이다.
수뇌부가 흡혈귀라는 것을 다른 이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가정 하에, 당연히 그들을 예민과 루시, 은신이 전멸시켰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할 때.
원정대가 눈치채지도 못한 틈을 타 수뇌부가 전멸당할 만큼 흡혈귀가 무시무시한 상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군을 계속하는 것은 바보 같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원정대라는 집단은 이미 제시된 목표에 매몰되어, 그 이외의 행동을 취하는 데 엄청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원정을 그만두는 것보다, 다른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원정을 계속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 가치판단에서 지성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지만― 설령 원정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는 목소리를 낼 수 없을 것이다.
집단을 상대로 개개인의 목소리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흡혈귀 놈들이 우리 원정대를 두려워하고 있어!”
“지금 물러나면 아무런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사람들의 빈축을 사겠지. 왕실이 우리에게 트집을 잡으려 들지도 몰라.”
“물러나? 물러나면 더는 기회가 없다고! 밑바닥에서만 구르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어차피 습격해 온 흡혈귀 놈들은 다 죽인 거지? 그럼 된 거 아냐? 계속 머무르는 것보단 나아가는 게 더 안전할 거야.”
“하지만 그…… 그럼 원정대는 누가 이끌지?”
역시나, 예민의 예상대로 사람들은 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다른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아닌 누가 원정대의 대장이 되어, 흡혈귀들의 첫 번째 목표가 된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원정대를 이끌어 주길 바랐다.
원정대 전체가 터무니없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원정대의 수뇌가 몰살당했으니 수뇌부만 피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한데 모여 몸집을 불리면 불릴수록 다른 이를 믿고 겁이 없어지는 법.
이 자리에 ‘나만 안 죽으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족히 수백만 명이 모여 있다는 얘기다.
정확히 여기까지는 예민이 상상한 그대로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무수한 원정대원들이 혼란에 빠져 있던 찰나.
찬란한 미모를 빛내며 나선 예민에게 모든 이의 시선이 쏠렸다.
그녀가 타고난 미모는 정작 마음에 둔 사내를 유혹할 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주제에 이런 때만 도움이 되었다.
“당신은 보급을 담당했던…….”
“수뇌를 급습해 온 흡혈귀들을 물리친 게 저 여자라고. 상당한 실력자임에 분명해.”
“저 여자라면 아무도 불만 없겠지.”
“더구나 지금은…….”
나서 봤자 손해만 볼 뿐이지만 누군가 한 명은 반드시 대장을 맡아야 하는 이 상황.
수백만 명 사이에서 치열한 눈치 게임이 전개되던 중에 예민이 기꺼이 조장…… 아니, 원정대장을 하겠다고 나서자 모두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물며 그녀는 원정대 수뇌에 가까운 인물이며 보급을 담당했던, 하물며 수뇌를 전멸시킨 흡혈귀들을 물리친 사람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어차피 부러질 검이라면 조금이라도 날카롭게 갈아 흡혈귀 놈들의 배를 가른 후에 부러져야 해.’
예민은 지구인, 레타인, 다른 문명에서 온 소환자들까지 누구 한 명 빠짐없이 자신에게 한심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개중에는 예민이 곧 죽어 자빠지리라 믿고 안타까움, 혹은 비웃음이 담긴 시선을 보내오는 이들도 있었으나.
과연 예민이 죽을지 저들이 죽을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이번 일에 변수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 바로 지구인들의 존재였으나, 기준 덕에 지구인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역시 예민밖에 없어.”
“설마 우리 모두를 위해 그렇게까지.”
“쉿, 지나치게 떠들어 대면 그녀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그랬지, 맞아……! 배려해야 한다고, 배려.”
그들은 지금 한창 문명 스킬 뽕을 맞고 취해 있어 예민의 말이라면 정말로 여기서 철수를 하라고 해도 따를 듯한 상태가 되어 있었으니까.
더욱 훌륭한 것은 그들 또한 ‘문명 대표’라는 존재가 그 문명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비로소 깨닫고, 그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문명 대표니 스킬이니 하는 얘긴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중에 그들을 입막음할 필요는 없어졌으니 다행이지만…….
물론 여기서 지구인들만 이끌고 퇴각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므로, 예민은 즉석에서 원정대장 자리에 취임한 후 그들 모두를 이끌고 흡혈귀 왕국을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그래서? 흡혈귀들은 어디에 있어?”
―가까워. 습격을 예정하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루시 님한테는 저 더러운 마기로 가득한 함정 지대도 훤히 보인단 말씀. 함정 지대를 우회해서 놈들이 먼저 덤벼들게 만들자. 아마 우리가 위험 영역을 벗어나면 다시 그쪽으로 몰아넣으려 무슨 수가 됐든 쓸 테니까.
“좋아. 그렇게 할게.”
과연 200만에 가까운 이 원정대에서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흡혈귀 놈들은 인신 공양으로 오버플로를 불러오는 계획을 하고 있다던데, 과연 그것을 피해 흡혈귀들에게만 피해를 입힐 수 있을까.
불안한 점은 산더미 같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모든 불안을 억누르고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만한 공적도 세우지 못한다면 준이 오빠가 나한테 실망할 거야―.’
기준이 만든 파티의 면면을 볼 때마다.
기준에게서 자신이 모르는 다른 사람의 흔적이 느껴질 때마다.
예민은 생애 최초로 타인에게서 버려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실감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기준에게 헌신하려 했던 2회 차는 그녀의 공회전으로 끝나 버렸다.
더는― 그녀는 더는 실수할 수 없었다.
―응? 뭐야, 얘네 왜 돌아가려고 하지?
“……쫓는 수밖에.”
언제나 그렇듯, 사건은 그녀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서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