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85)
나 빼고 다 회귀자-185화(185/356)
나 빼고 다 회귀자 (185)
Chapter 35. 낙원 – 5
기준 일행은 경내에 있는 손님용 숙소를 빌려 머물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에서 무려 한 달간이나 머물러야 한다는 데 처음에는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어째 그리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르알타에 있어 봤자 사냥꾼들을 유인할 뿐일 텐데.”
“앞으로도 그런 자들과 지긋지긋하게 싸워야 할 거야, 준.”
한차례 수련을 마치고 씻은 후 툇마루에 앉아 있던 기준이 무심코 흘린 말에, 그의 뒤에서 다가오며 대꾸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기준과 살벌한 대련을 마치고 따로 목욕하러 갔던 틸라가 돌아온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잠시만이라도 그걸 잊고…… 틸라?”
“어때, 예뻐?”
기준의 시선을 받은 틸라가 양손으로 치맛단을 살포시 들어 올리며 그 자리에서 빙글 회전해 보였다.
바람을 타고 펄럭이는 붉은 하카마가 그녀의 붉은 머릿결과 무척이나 잘 어울려 아름다웠다.
“무녀들한테 빌려 입었어. 준이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어때?”
“예쁘네.”
“아―― 기뻐! 엄청!”
만면에 미소를 띤 틸라가 사뿐사뿐 다가와 기준의 옆에 앉았다.
“물어보니까 이 신전…… 아니지,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신은 풍요를 상징하기도 한대. 씨앗은 겨우내 땅속에 잠들어 있다가 봄이 되면 다시금 피어나는 생명이니까.”
“뜻은 가져다 붙이기 마련이지.”
“그래서 다산에도 효험이 있다고 하더라구, 이 땅이.”
기준을 바라보는 틸라의 시선이 묘하게 끈적끈적해졌다.
언젠가 그녀와 함께 술을 마셨던 때를 떠올리며 기준이 살짝 긴장한 그때, 어김없이 그녀의 손이 뻗어 나와 그의 손을 붙들었다.
“첫 아이는 베아트리체한테 양보하려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조건이 갖춰지니 조금 새치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네.”
“틸라 네 머릿속에선 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니.”
어렵지 않게 손을 빼낸 기준이 틸라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이전에 루시와 대화를 나누며 지나치게 매몰차게 대하지 말라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틸라가 이렇게 급발진을 한다면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이 이상 진지해져, 더 큰 상처를 입게 되기 전에 확실히 말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미안해, 틸라. 내겐 이미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네 마음을 받아 줄 수가 없어.”
“그건 새삼스럽지도 않고. 마음이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면 우선 몸이라도 받아 주지 않을래?”
“아니, 잠깐.”
여태껏 그녀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 고심했던 기준의 고뇌는 무엇이었는가 싶은 가벼운 반응이 돌아오고 말았다.
기준은 거절에도 개의치 않고 점점 간격을 좁혀 오는 틸라를 있는 힘껏 밀어내며 저항했다.
“네 연애관을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 틸라!”
“우선 몸을 겹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마음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준은 무리를 이끄는 강자인걸. 한 사람에게만 매달릴 필요는 없어. 오히려 그런 이상한 고집을 관철하는 게 이해가 안 갈 정도야.”
원래 그녀가 이렇듯 적극적으로 나올 때면 바로 루시가 그녀를 제압하곤 했지만, 안타깝게도 루시는 지금 기준의 부탁을 받아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아니, 틸라는 애초에 루시의 부재를 감지하고 대담하게 어프로치해 오는 것이 분명했다!
“준한테 부담 줄 생각은 없어. 준도 베아트리체가 없어서 쓸쓸하잖아? 나는 그저 그녀의 빈자리를 조금 메워 줄 수만 있으면 족해.”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불륜녀나 할 법한 소리 그만둬!”
“후, 정말 이 남자는 왜 이렇게 고집불통이람.”
간신히 틸라를 떼어 놓고는 헉헉 숨을 몰아쉬는 기준.
그녀는 한쪽으로 묶어 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더 좋은 거지만……. 베아트리체를 그만큼 깊이 생각하는 거구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기왕이면 자력으로 준을 쟁취하고 싶었는걸.”
“내가 무슨 에바 부인도 아니고…….”
위대한 문학가이자 예술가인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은 자신에게 사랑을 느끼는 소년 싱클레어의 마음을 눈치채고 그에게 말한다.
사랑은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듯 내미는 것 또한 아니고.
스스로 끌어당겨 쟁취하는 것이라고.
소설을 처음 읽은 당시엔 굉장히 깊은 감명을 받은 문구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주제 파악 좀 해, 꼬맹아.’라는 말을 그냥 빙빙 돌려서 말한 것뿐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안 되겠는걸. 준의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건 내 몫이 아닌가 봐.”
“순수한 사랑이라고 해 주면 좋겠는데.”
“처음 계획대로 베아트리체를 설득해야겠네.”
“엥.”
틸라가 간신히 납득하고 물러나 준 듯해 안도하는 기준 앞에서, 그녀가 문득 폭탄 발언을 했다.
“그 양심 없는 여자는 자신이 계속 옆에 붙어 있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준을 꼼짝도 못 하게 붙들고 있어.”
“날 배려하는 척하지 마. 그냥 네 욕망을 분출하고 싶을 뿐이잖아.”
“힛, 어떻게 알았지?”
킥킥 웃은 틸라가 그대로 기준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무너트렸다.
받아 주지 않으면 바닥에 머리를 찧을 판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아 주었더니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준의 무릎을 베고 누우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날 싫어하지 않고 받아 주는 준이 너무 좋아.”
“콩깍지가 단단히 씐 것 같은데, 틸라. 파티 리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세상은 넓고 좋은 남자는 많아.”
“준, 지금 누구 앞에서 세상을 논하는 거야?”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하는 틸라.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던 기준은 끙, 소리를 내며 항복했다.
“그래, 내가 말실수했어.”
“응, 알면 됐어. 준은 내가 간신히 찾아낸 최고의 남자야. 난 네게 정착할 거야. 내 힘을 볼모로 삼아서라도.”
“그만하면 귀여운 인질범이네.”
두 사람은 그렇게 당분간 가만히 툇마루에 앉아 불어 오는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즐겼다.
그러다 문득 틸라가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있어.”
“그야 뭔가 있겠지, 이만한 결계가 평범한 것도 아니고.”
“응, 전부 수상하지만 제일 수상한 건 그거야. 결계의 능력.”
“야, 간지러워.”
틸라는 기준의 탄탄한 복부로 손을 뻗어 괜히 그의 복근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성능이 말도 안 되게 뛰어나단 말이야. 일정한 공간을 레타 대륙에서 완전히 격리하는 것만도 대단한데, 심지어 그걸 오래 유지하기까지. 아무리 대단한 성유물이라도 그건 말이 안 돼.”
“그냥 발라히아의 열화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냐?”
“발라히아는 규모가 대단하긴 하지만 이곳만큼 폐쇄적이진 않아. 외부에서 침입할 방법도 있고. 그런데 이곳은…… 준도 눈치챘겠지만, 아마 시간의 흐름도 외부와는 달라.”
시간의 흐름.
루시도 언급했던 얘기였다.
“결계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 그 답만 알아낸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준.”
“결과적으로 결계를 부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되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은 섣불리 성유물에 접근할 수 없지만 말이야.”
그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이라고 말했던 사람은 어디에 갔단 말인가.
하지만 그를 올려다보는 틸라의 진지한 눈빛이 기준에게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게끔 했다.
“쿠레나이라는 사람, 믿지 마.”
“그녀를 속이려고 일부러 맹목적으로 내 말에 따르는 척했던 거야?”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 틸라가 짓씹듯 내뱉었다.
“준에게 보내는 눈빛이 기분 나빴어.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냥꾼의 눈빛.”
“그건 네가 날 바라보는 시선하고 비슷…….”
“내가 많이 받아 봤던 시선이야.”
기준의 농담을 끊어 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문명 사냥꾼의 시선 말이야.”
“걔 나보다 약해.”
“하지만 이 결계의 주인은 그녀야.”
“무슨 술수를 부릴지 모른다는 거지?”
“물론 그게 준에게 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가시공의 권능도 그냥 튕겨 냈던 게 준인걸, 다만.”
양손을 그의 허리에 둘러 그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묻은 그녀가 가만히 속삭였다.
“쿠레나이를 포함해서…… 이들에게 너무 마음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배신당하면 마음이 아프니까.”
“저런 이들?”
“응?”
기준의 품에서 떨어진 틸라가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 시선을 주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 빗자루를 들고 있는 무녀 한 명이 토마토와 자매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달아오른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 익숙한 얼굴이다 싶었는데― 역시나, 처음 마을에서 그에게 말을 걸어 왔던 무녀인 렌카였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하시던 거 계속 하세요!”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녀는 얼마나 당황했으면 빗자루마저 내던지고 뒷걸음질 치며 외치더니 아예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기준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서 작은 종이 인형 하나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저것도 어디서 많이 본 건데…… 그래, 음양사가 다룬다는 식신이다.
그게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무녀가 일본도도 다루는데 식신이라고 못 다룰까.’
은신이 저걸 보면 좋아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는 곧 식신이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잎 사이로 모습을 감추곤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모습에, 소녀가 아직 둘을 훔쳐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후, 관객도 있는 마당에 좀 더 과격한 스킨십을, 아야.”
“거기까지.”
기준에게 입술을 내밀다 결국 입술이 아닌 이마로 박치기를 당한 틸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뽀뽀 한 번 한다고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뽀뽀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돼요?”
“틸라, 존댓말 진짜 안 어울려.”
사실 평소의 그녀와는 다른 말투가 상당히 귀여워서 그대로 넘어갈 뻔했지만.
앞으로도 그녀가 그런 위험한 기술을 남용하게 놔둘 수 없었기에 다급히 봉인을 시도했다.
“신이 애교를 부릴 땐 존댓말을 써 보라고 조언해 줬는데.”
“알았어, 걔를 족치라는 거지.”
―불덩이! 너 우리 계약자한테서 당장 떨어져!
“칫.”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루시가 기준의 곁으로 돌아왔다.
좋은 시절 다 갔다며 한숨을 내쉬는 틸라를 다소 억지로 밀어낸 루시가 기준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으며 보고했다.
―계약자, 확실해. 외부에는 사람의 흔적이 일절 없어. 몬스터도 없고, 그나마 멧돼지 같은 동물이 얼마간 있기는 하지만 이 마을에서 가장 약한 무녀라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준이야. 당연히 실족할 만큼 위험한 산도 보이지 않고.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그래.”
―사쿠라라는 무녀가 정말로 사라진 거라면, 답은 둘 중 하나야. 자력으로 결계를 나갔든가.
“이 안에서 죽었거나.”
답을 얻은 기준이 깊은 한숨을 토했다.
아니길 바랐지만 역시나 이 신사는 상당히 구린 구석이 많은 모양이다.
그럼 어쩐다, 당장 무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 정보를 가지고 쿠레나이를 추궁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테고.
―당장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진 않아. 어차피 급할 건 없으니까, 저쪽이 제시한 대로 한 달을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 그사이 저것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을 내가 최대한 털어 볼게.
“그래, 급할 건 없으니까…….”
우르알타에서 보냈을 휴가가 신사에서 보내는 휴가로 다소 바뀌었을 뿐이다.
이 뒤에 정체 모를 찝찝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이곳은 평화로운 시골 마을, 레타에선 쉬이 찾아보기 힘든 낙원 그 자체였다.
휴식도 이만하면 충분하고, 다시 대련이나 할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던 기준이 문득 드는 위화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로라랑 신이는 어디 갔어?”
“로라는 무녀들이 다루는 검술이 궁금하다며 수련을 같이 하려는 것 같던데.”
―그 머저리는 무녀들 뒤꽁무니나 쫓고 있던걸.
“……둘 다 휴가를 만끽하고 있구나.”
확 지혜한테 은신이 하고 있는 짓들을 알려 줄까 하는 충동이 솟았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녀석의 짝사랑이 끝장날 것 같다는 생각에 충동을 억눌렀다.
그래도 생각이 난 김에 예민을 비롯해 바깥에서 그들을 걱정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무사하다며 연락을 보내기로 했다.
“준, 혹시 레톡하려는 거야? 아까 신이 외부와 통신이 안 된다며 절망하던데.”
“이 결계가 그것까지 막는 건가? 정말 엄청난…….”
레타폰을 꺼내 들어 레톡을 하려던 중 날아든 틸라의 말에 납득해 고개를 끄덕이던 기준이 곧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럼 여기서 한가롭게 휴가나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우니카를 비롯해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 응?”
“왜 그래, 준? 역시 지금 바로 죽이러 가려고?”
“레톡 되는데?”
“……응?”
* * *
[비체♥(차원 대기실): 뭐어? 레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공간?] [비체♥(차원 대기실): 넌 대체 어떻게 매번 소환자가 한 번 겪기도 힘든 일들만 골라서 겪는 거니?] [비체♥(차원 대기실): 잠깐만, 그럼 내 밥도 못 보내 주는 거야?] [비체♥(차원 대기실): 그게 내 삶의 희망인데! 당장 결계 찢어 버리고 나와!] [비체♥(차원 대기실): ……그 여자가 예뻐서 봐주는 거 아냐? 너 똑바로 말해.] [비체♥(차원 대기실): 잠만, 레톡은 또 어떻게 보내고 있는 건데?] [비체♥(차원 대기실): 아, 응. 네 고유 스킬에 놀라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비체♥(차원 대기실): 못 나올 걱정은 없겠네. 여차하면 성유물에 마력을 풀차지해서 고유 영역을 만들어. 그럼 아마 그 결계랑 충돌하면서 부숴 버릴 수 있을 거야. 상성상 네가 압도적인 우위인걸.] [비체♥(차원 대기실): 아항, 그래서 최대 한 달이라고.] [비체♥(차원 대기실): 쭌, 그 무녀복이란 거 나한테도 한 벌 보내.] [비체♥(차원 대기실): 보내라면 보내! 입어 준다고 할 때 보내란 말이야!] [비체♥(차원 대기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비체♥(차원의 틈): 그래도 걔네 진짜 이상하다.] [비체♥(차원의 틈): 정 패배할 것 같으면…… 최악의 수단이지만, NPC가 되어 망명하면 되는데.] [비체♥(차원의 틈): 아하하, 그때의 선택 탓에 한껏 시달리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비체♥(차원의 틈): 그래도 뭐, 그 덕에 얻은 것도 있으니까.] [비체♥(차원의 틈): 너랑도 만났고.] [비체♥(차원의 틈): 오해하지 마.] [비체♥(차원의 틈): 순수하게, 네가 내게 와 줘서 기쁘다는 얘기를 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