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90)
나 빼고 다 회귀자-190화(190/356)
나 빼고 다 회귀자 (190)
Chapter 36. 붕괴 – 5
문명의 멸망.
이는 문명 전쟁에 참가하는 모든 문명이 두려워하는 결말이었다.
레타인으로 전향하는 NPC가 나오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잘 알지만 저희에겐 선택의 여지도 없었어요. 문명 전쟁에서 패배하면 마지막으로 문명 대표를 죽인 문명의 노예가 되거나, 시스템의 판단하에 노역을 수행하게 돼요. 레타인으로 전향하고 싶어도…… 마지막 대표가 죽기 전에 해야 했어요.”
“그래서? 쿠레나이는 문명 전체가 노예 신세가 되는 걸 면하기 위해서 이런 번거로운 짓을 벌인 거냐?”
“맞아요. 적어도 이 결계가 뚫리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안에서나마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
“자유?”
핵심을 찌르는 기준의 지적에 렌카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은신은 여전히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채 눈만 깜박이다가…… 두 사람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것을 눈치챈 렌카가 그의 손을 꽉 붙드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어, 그게.”
“신아, 그냥 가만히 있어.”
“맞아요, 제 곁에 있어 주세요.”
“넵.”
그렇게 토템을 확보한 렌카는 한결 안색이 나아졌다.
기준은 그런 그녀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결계가 사라지고 그녀가 어딘가 다른 문명의 노예가 되어 은신과 헤어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썩 유쾌한 상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기준은 두 사람에게 차를 내어 주곤 말을 이었다.
이쯤에서 루시가 친절하게도 은신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대강 설명해 주어, 그는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사고를 정지한 채 그저 토템의 역할을 수행할 따름이었다.
“네가 여태껏 우리를 관찰하고 있었던 이유는 이해했어.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걸 당최 알 수가 없네. 결계가 사라지면 노예 신세가 된다면서? 그런데도 결계를 풀어 달라?”
“이대로 새장 속에 갇혀 살아가다 한 명, 한 명씩 죽는 것보단 그게 나으니까요.”
렌카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애초에 저흰 결계를 만드는 걸 반대했어요. 결계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느니 노예로 살아가며 그 신세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리겠다고. 하지만 쿠레나이 님은 저흴 풀어 주지 않으셨어요. 매번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저희가 매번 모든 기억을 잊고, 순순히 결계를 유지하는 제물로 바쳐질 수 있게끔…….”
“그러다 가끔 외부인이 휘말리면 그들을 대신 바치고?”
“맞아요. 결계에 일부러 결함을 내서, 공간 마법으로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게끔 좌표를 노출한 거예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지만 새삼 관계자의 입으로 들으니 기가 막혔다.
렌카는 그 부분에서 기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의외였던 건, 쿠레나이 님보다 약한 이들만 끌어들인다는 조건을 걸었음에도 신령님이 이 결계 안으로 끌려오셨다는 거예요. 저는 지난번의 마지막에 일어난 일을 잘 모르지만, 여러분이 모두 살아남고 무라사키 님이 대신 바쳐지셨다는 건.”
“대충 네가 상상하는 대로야. 우릴 함정으로 끌어들인 쿠레나이가, 망할 것 같으니까 다급히 무라사키를 제물로 바쳐서 시간을 되돌려 버린 거지.”
“역시…….”
―알았다.
거기서 루시가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계약자는 공간 이동 자체에 저항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결계에 들어오는 사람을 거른다는 조건 자체는 저항한 거야. 그래서 부분 저항이었던 거지!
‘과연.’
처음에 이 결계 안으로 끌려올 때 나타났던 메시지를 떠올리며 기준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초엔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보였던 이번 일은 사실 촘촘하게 짜인 덫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연으로 일어난 일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단지 기준의 고유 스킬이 규격 외였던 것만이 쿠레나이의 덫이 파훼된 이유였다.
“아니지, 나뿐만이 아닌가. 네가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건 아마도 고유 스킬 덕분이겠지?”
“……네. 청정연화(淸淨蓮花)라고 해서,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으로부터 빠르게 벗어나게 해 주는 능력이 있어요. 원래 우리 문명의 대표셨던 분께만 말씀드려서, 쿠레나이 님은 제 고유 스킬에 대해 자세히 모르시거든요.”
그렇게만 들으면 기준의 고유 스킬을 열화시켜 놓은 느낌이지만 뭔가 다른 공능이 있겠지.
기준은 긴 한숨을 불어 내곤 차를 마셨다.
물론 그도 처음부터 결계를 해제할 생각이긴 했지만.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새장 안에서 다가올 죽음만 기다리는 신세가 된 무녀들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오히려 이대로 결계를 없애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지금 그런 것까지 생각해 줄 상황은 아니잖아?
‘맞는 말이야. 설령 결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해도 결계를 유지하는 데 희생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일 테고.’
레타 대륙에 와서 마주한 많은 일들이 답답하고 또 찝찝했지만 이번 일은 그중에서도 가히 최고봉이었다.
그 망할 용암 지렁이 놈 탓에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아니, 그놈이 아니었으면 레타의 이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있었을 테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단…… 일단 알겠다. 똑같은 수작에 당해 줄 생각은 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쿠레나이와는 곧 결판을 낼 거야.”
사실 단순히 끝장을 내는 거라면 지금 당장도 가능하니까.
기준의 자신감 넘치는 대꾸에 렌카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성유물의 힘을 다루는 쿠레나이 님은 결코 만만하지 않아요. 자칫 잘못하다간 명계의 문을 열어 버리실지도 몰라요…….”
“괜찮아.”
기준은 굳어 버린 은신을 두드려 깨우며 대꾸했다.
“그게 내가 기다리던 일이야.”
“준이 형, 잠깐만.”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버리는 렌카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기준이 자리를 뜨려는데, 그제야 간신히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성공한 은신이 그를 붙들었다.
은신을 돌아보자, 그는 다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형, 앞으로는…… 이런 거 숨기지 말아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형이 고생하는데 저 혼자만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따돌려지는 건 싫어요.”
“……미안.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
“형 마음은 아니까 괜찮아요. 실제로 그동안 여기서 즐겁기도 했고.”
두 사람은 쓴웃음을 교환했다.
그 끝에, 여전히 자신의 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렌카를 힐끗한 은신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렌카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지킬 테니까.”
“지키긴 개뿔, 잡아먹히지나 않게 조심해라.”
“네?”
* * *
로라와 은신은 이곳에서 한 번 시간이 되돌려졌음을 알고도 각각 도술과 식신술의 수련에 매진했다.
스테이터스까지 한 달 전으로 되돌리는 것이 결계의 힘이었으나 어째설까, 두 사람의 진전은 한 달 전과 비교해 훨씬 빠른 듯이 보였다.
기분 탓이라는 말로는 얼버무릴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쩌면 계약자의 영향이 몸에 남아 있는 걸지도 모르지. 지난 한 달이 허사가 되지 않아 다행이네.
“혹시 고유 영역을 발동하면 이미 잊어버린 기억이 되돌아올 수도 있을까? 그럼 좋겠는데.”
직접적으로 티는 안 내도, 그의 파티원들은 한 달간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을 터.
기준은 로라와 은신이 땀 흘려 수련하는 모습을 보며 가만히 쿠레나이에 대한 적의를 불태웠다.
덤으로 ‘진전’이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쟤는 점점 적극적으로 구네.”
물론 렌카를 말하는 것이었다.
기준에게 사실을 털어놓은 뒤로 더는 망설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은신을 일대일로 밀착 마크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둔해 빠진 은신이라도 더는 모르는 척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는 바는 있었으나, 그녀의 행동 자체만 놓고 보면 솔직히 속이 뻥 뚫릴 만큼 시원했다.
그래, 그가 이전 파티원들에게 기대했던 것이 저런 적극성이란 말이다!
지혜나 은신이 저렇게 저돌적으로 행동했으면 진즉에 결판이 나고 누구든 달라붙지 않았겠는가.
―흐응, 어쩌면 저번에는 어차피 은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애써 자제했던 걸지도 모르겠네.
루시는 언제나처럼 예리한 지적을 했다.
―하지만 이젠 계약자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저 바보도 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적극적으로 구는 걸지도.
“그래도 루시, 그녀가 나를 믿는다는 건 신이가 죽지 않는 동시에…… 자신은 노예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잖아. 어떻게 되어도 결국 헤어지게 된다고.”
―응, 그러니까 더더욱 서두르는 거겠지.
자칭 사랑의 정령 루시가 그의 말에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노예가 되어 끌려갈 테니까, 그 전에 불타듯 화끈한 사랑을 하고 싶은 것 아니겠어?
“하지만 그건 신이를 무시한 처사잖아? 설령 정말 신이가 사랑에 빠진다 한들 바로 이별하게 되면 큰 상처를 받을 테고…….”
―언제부터 사랑이 상대방을 마냥 배려하는 관계라고 착각하고 있었어, 계약자?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기준에게 사과해 줬으면 하는 끔찍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이성은 감정을 거스르지 못하는 법이야. 더구나 모든 상황을 꼼꼼히 따져 가면서 대체 어느 세월에 연애를 하겠어, 계약자?
“큭……!”
하지만 모든 상황을 꼼꼼히 따지다가 결국 지금까지 연애를 못 한 기준의 심장에는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혀 드는 지적이기도 했다.
“루시, 너 요즘 나한테 너무하지 않아?”
―이것도 다아― 계약자를 생각해서 친절한 내가 교정시켜 주려고 그러는 거라구. 스스로를 완벽히 통제하는 초인이 되는 것도 좋지만 인간이라면 역시 저렇게 어리석고 충동적인 면이 있어야지!
“얘는 대체 무슨 입장에서 평가하는 건지.”
그러나 저들의 새콤달콤한 관계는 기준이 쿠레나이와 결판을 내는 것보다 빠르게 파국을 맞이했다.
시간을 되돌린 지 스무 날 가까이 되었을 무렵, 아무런 전조도 없이 렌카가 돌연 모습을 감추고, 은신은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식신술 연습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하필이면 바로 그 타이밍에 쿠레나이로부터 의식 준비가 되었다는 전갈이 날아들어 기준의 심경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와, 적이지만 솔직히 감탄했어. 이렇게 극적인 타이밍에 결판을 내려고 하다니! 다음 화에서 일어날 반전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들다니……!
“루시, 너 지금 무슨 드라마라도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아냐?”
물론 기준이 ‘나도 당장 너를 죽이고 싶긴 한데 우리 애가 그쪽 애랑 연애하다가 사고 친 것 같아서 그거 수습할 때까지만 기다려 주지 않을래?’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순순히 그날 밤 의식을 치르는 데 동의했고.
파티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준비를 시키는 한편 은신과 둘만의 자리를 마련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기로 했다.
뭐,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게, 고백 비슷한 걸 받았는데요. ……혜 누나가 생각나서 도저히.”
“그럴 줄 알았다.”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확인하고 싶어 추궁했더니 실로 경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무려 은신의 잠자리를 렌카가 기습했다는 것이다.
어째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였다.
“혹시 이 결계에 사람의 행동을 유도하는 무슨 세뇌 장치 같은 게 있는 거 아냐?”
―그냥 렌카가 쟤들한테 배운 거 아닐까?
당연히 은신은 그녀를 부드럽게 거절했으나, 렌카는 은신과 헤어지기 전에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며 절실히 달라붙었다고.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음에도 하룻밤만으로 괜찮다며 다가오는 그녀를 다소 강하게 거절한 결과, 렌카가 크게 상처를 받고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에휴, 신이 너도 지구인 감성을 못 버렸구나.”
―할많하않.
“미안한데 루시, 그건 유행이 좀 지났어.”
확실히 비체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로라와 틸라의 끊임없는 어프로치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기준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은신은 기준보다 한술 더 떴다.
“실제로 절 좋아하는 것도 아닐 거예요. 이런 답답한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 어쩌다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 뿐인 저한테 다소 과하게 감정 이입을 하는 거죠. 결계 밖으로 나가면 저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릴걸요.”
―진짜 멍청이네.
루시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과 달리 기준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솔직히 그도 처음 비체와 감정을 교류하기 시작했을 즈음엔 어쩌다 우연히 튜토리얼 채널에 고립되지 않았더라면 비체처럼 멋지고 상냥하고 완벽한 미녀와는 만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신아, 네가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어.”
“……뭔데요?”
은신이 자신감 없는 표정으로 기준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가치를 한없이 낮잡아 보면서도, 누군가는 그걸 부정하고 자신을 인정해 주길 바라는 복잡한 마음이 담긴 시선임을 기준은 잘 알았다.
이게 그들의 문제다.
시간은 흘렀는데 어째 제대로 마음이 어른이 된 사람이 없다.
“넌 우연이라고 했지만 그게 바로 인연인 거야. 물론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괜찮았을지 모르지, 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있었던 건 너잖아.”
“형, 그거 어디 소설 같은 데서 읽은 말이죠.”
“응.”
솔직히 대꾸한 기준이 은신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그를 위로했다.
“게다가 막말로 결계 밖으로 나가게 되면 렌카가 한가롭게 연애나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잖아. 그걸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렌카가 너를 잊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거라고?”
“솔직히 그것도 문제잖아요. 제가 책임을 질 수도 없는 거고…….”
“다 집어치우고 순수하게 네 마음만 놓고 말해 봐.”
“전 혜 누나가 좋아요.”
“그건 나도 알아, 등신아.”
조금 세게 때렸다.
고장 났던 TV가 그제야 고쳐졌다.
“이대로 렌카랑 헤어지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렌카를 찾으러 가.”
“……네!”
은신이 벌떡 일어나 뛰는 모습에 기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상황은 청춘 드라마처럼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의식이 시작될 때까지 은신은 렌카를 찾지 못했고.
그녀의 모습은 의식이 치러지는 곳에서 찾을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