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91)
나 빼고 다 회귀자-191화(191/356)
나 빼고 다 회귀자 (191)
Chapter 36. 붕괴 – 6
“지금부터 코레 님께 제물을 공양하고, 결계를 임시로 개방하는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식은 여신의 신체(神體)를 모시는 본전의 최심부에서 거행되었다.
그 중앙 제단에 놓인 것은 지금이라도 뜯어먹을 수 있을 듯이 싱싱한 빛을 발하는 석류, 덤으로 기준이 굉장한 갈등 ― 처럼 보이는 연기 끝에 내놓은 메달이다.
20일 전과 똑같은…… 단 두 가지를 빼놓고는 똑같은 풍경이 그곳에 펼쳐지고 있었다.
시한이 단축된 이유는, 아마도 그만큼 쿠레나이가 기준을 경계해 최대한 빨리 그를 없애고 싶었던 까닭이리라.
“……렌카.”
은신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 이전 의식과 비교해 다른 점은 두 가지.
하나는 물론 제단 위에 놓인 성유물이 둘로 늘었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저번에 제물로 바쳐진 무라사키를 대신해 쿠레나이의 가까이에서 수행하고 있는 무녀가 렌카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렌카는 여태까지의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놀랄 만큼 텅 빈 표정을 짓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인생 첫 실연― 어쩌면 마지막 실연일 테니 그야 충격을 먹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묘한 불길함을 느끼게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루시, 기분 탓일까? 나 지금 엄청 불안한데.’
―실은 내 생각도 그래. 그렇다고 지금 나서면 쿠레나이도 눈치를 채겠지. 만약에, 만약에 우리가 렌카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들키면 더 곤란해질지도.
가뜩이나 골치가 아팠는데 여기에 골칫거리를 하나 더 얹어 주다니.
기준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자니 그의 시선을 오인한 쿠레나이가 미약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후후,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성유물의 힘을 잠시 빌릴 뿐, 소모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다행이고.”
“정말 뜨거운 기운이 담긴 성유물이군요. 저는 알지 못하나 필시 터무니없는 신격이 담긴 물건일 터…….”
―에헴! 들었지, 계약자? 제대로 들었지?
제단에 놓인 채 희미한 금빛을 발하는 메달을 지그시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쿠레나이.
이제 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지금 메달에는 루시가 깃들어 있었기에 쿠레나이가 메달을 고평가하면 할수록 루시가 한껏 잘난 척을 했다.
그야 정말로 페르세포네의 권능이 담긴 석류와 나란히 놓고도 분간을 못하고 있으니 루시가 뻐기는 것도 알만하다.
“그럼 시작하지.”
“물론이죠.”
쿠레나이가 잇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의식을 시작했다.
“아아, 겨울과 같이 지고 봄과 같이 피어나는 영원이시여.”
명계의 여신에게 바치는 카구라를 추며, 노래했다.
모든 것이 한 달 전과 같다.
무라사키의 자리를 메우고 있는 렌카 또한 무녀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무가(巫歌)에 어울리고 있었다.
정확히 합이 맞아떨어지는 움직임과 아름다운 선율, 그와 함께 피어나는 무시무시한 마력.
기준은 그것을 바라보며 루시에게 상담했다.
‘렌카가 돌발 행동을 하면 어쩌지?’
―뭘 어째, 글렀다 싶으면 악령도 포기하고 그냥 결계 부숴야지. 난 지금부터 집중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마, 계약자.
이럴 때만 냉정하게 굴기는.
“형, 어떡하죠? 렌카가…… 어쩌면.”
“불길한 생각하지 마.”
렌카와 인연이 깊은 은신에게도 뭔가 깨닫는 점이 있었던 걸까,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진정시키며 의식에 집중했다.
석류가 놓인 제단을 가리듯이 시커먼 기운이 감도는 운무가 일어났다.
이윽고 메달의 기운이 그것과 공명하는 듯싶더니, 황금빛 기운이 그와 자연스럽게 섞이며 원형의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실로 섬뜩한 음의 마력과, 빛 그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마력이 한데 섞이며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를 압도하는 파장을 발산했다.
“이건.”
순간 헛숨을 들이켠 쿠레나이였으나― 이미 기호지세임을 깨닫곤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명계의 여신께 이렇듯 많은 공물을 바치나니, 우리에게 새로운 봄의 순환을 허락하소서!”
그 순간, 소용돌이가 크게 확장되며 그 너머의 어둠으로 가득한 세계를 드러냈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무슨 대비를 했든 이미 늦었어! 이번엔― 이번엔 막을 수 없어!”
쿠레나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소용돌이가 일으킨 바람 소리에 섞여 뾰족하게 날뛰었다.
기준이 그녀를 막을 방법을 강구했듯 그녀 또한 기존의 의식에 더해 무슨 수를 쓴 것이겠지, 저번 의식과 비교해 훨씬 압도적인 인력이 기준과 그 파티원들을 모조리 끌어당기고 있었다!
“루시!”
―제대로 연결했어! 악령을 찾는 중이야…… 그때까지만 버텨 줘!
―키이이이이!
성유물을 컨트롤하고 있는 루시를 대신해 우르가 거대화해 앞으로 나서며 바닥을 짓눌렀다.
카구라를 추던 무녀들이 일제히 바닥에 쓰러지고― 한 손에 의식에 쓰이는 방울을 쥐고 있던 쿠레나이가 눈을 부릅뜨며 그것을 흔들었다.
“정령! 명계의 여신 앞에서 건방지게 영의 힘을 다루다니!”
“진짜 건방진 건 문명 대표도 아닌 주제에 뻔뻔히 성유물을 점유한 너겠지.”
“하!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원래 문명 대표로 낙점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날! 그날 그렇게 무참히 키쿄우 님께서 돌아가시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끅―― 준, 들었던 것보다 더하잖아! 우린 괜찮아도 무녀들이!”
소용돌이가 발하는 인력은 처음엔 기준 일행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루시에 의해 신력이 뒤틀리고, 그들이 완강히 버티자 이윽고 변질되어 폭주했다.
당장 성유물을 컨트롤하고 있는 쿠레나이를 제외한 모든 이가 소용돌이 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잠깐…… 렌카!”
쿠레나이를 제외하고 소용돌이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것은 당연히 렌카.
당장에라도 그녀가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보이자 은신이 본능적으로 그녀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에 질겁한 기준이 은신을 말리려 들고, 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음을 파악한 쿠레나이가 곧장 방울을 렌카 쪽으로 향한 다음 순간.
렌카가 먼저 소용돌이로 제 몸을 던졌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은신을 돌아보며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크게 상심한 은신을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너희가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되냐고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기준은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세상은 되감기지도, 무너지지도 않았다.
“하, 고작 한 명 바치는 걸로 의식이 끝날 줄 알았니? 끝까지도 참으로 어리석은 아이…….”
당장 그 렌카를 이용해 먹을 셈이었던 주제에 쿠레나이가 뻔뻔하게 그런 말을 지껄이며 재차 방울을 흔들었다.
“그렇게 저 아이가 좋거든 너도 그 뒤를 이으면 되겠구나! 코레 님께서 이끄시는 순환에 제 몸 바쳐 기여하거라!”
“…….”
은신이 아무 말 없이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일대의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요동치는 와중에 흔들림 없이 쿠레나이를 향해 걷는 그 모습에, 기준은 은신이 여기서 식신술만 배운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루시, 지금 저 여자를 죽여도 되는 거야?”
―아직, 아직 안 돼―― 아직― 돼! 찾았어!
루시가 환호성을 내지른 그 순간, 눈부신 황금빛을 발하던 메달이 제단에서 튕겨 나와 기준의 손으로 복귀했다.
자연히 소용돌이도 크게 수축하며 재차 비틀림을 더했다.
“뭣?!”
이미 자신이 기준의 성유물을 차지했다고 여기던 쿠레나이의 입장에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찌?! 이미 코레 님의 권능으로 완벽히 장악했거늘!”
―코레는 무슨, 내게 대적하려거든 명계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절반을 뒤덮는 어둠이라도 끌고 오란 말씀이야!
루시가 으스대는 것도 잠시, 이번엔 소용돌이 너머로부터 보다 으스스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멓게 물들어 나풀거리는 레이스.
창백하지만 아름답게 반짝이는 피부.
밤하늘처럼 휘날리는 기다란 머리카락과 요요히 빛나는 두 눈동자.
생전의 미모를 완벽히 되찾은 악령이, 한 손에 날카로운 에스터크를 쥔 채 빠져나오고 있었다.
―은인께 실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소용돌이 밖으로 뛰쳐나오자마자 기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고개를 숙여 보이는 악령의 기세는― 확신할 수 있다, 완숙한 레전더리 등급에 이르러 있었다.
우연이었다고는 하나 그녀와 완벽히 파장이 일치하는 명계로 빨려 들어가 그곳의 기운을 잔뜩 흡수한 덕분이리라.
―크나큰 실례를 저지르고 귀찮게 해드렸으나, 다행히도 번거로운 수고를 보충할 만큼의 힘을 얻었으니. 앞으로는 그것으로 하여금 당신께 봉사하겠습니다.
―쟤는 진짜 재수가 좋단 말이야. 어떻게 가는 곳마다 딱 타이밍 좋게 업그레이드를 받는 거지? 혹시 무슨 게임 주인공이라도 되나?
명계에 갇혀 있던 악령을 이쪽으로 끌어낸 장본인인 루시가 불평등하다며 투덜거렸다.
그도 맞는 말인 것이, 원래는 레어 등급이나 되었나 의심스러운 수준에 불과했던 인간이 기준과 얽혀 몇 번인가의 변화를 거쳐 지금은 완전한 전설의 경지에 이른 존재가 되어 나타났으니.
“이…… 이게 무슨. 어찌 코레 님의 권능을, 어찌.”
악령의 힘을 알아본 쿠레나이가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어느덧 소용돌이가 천천히 수축하기 시작했다.
주위 모든 것을 끌어당기던 인력도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악령이 성유물에 담겨 있던 신력을 빨아먹은 탓에 명계와의 연결 고리가 희미해져 버린 탓이었다.
“이럴 수는 없어…… 안 돼!”
그리고 성유물에 담긴 힘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이 결계가 더는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쿠레나이가 발악하며 제단으로 달려가 석류를 집었으나 그 순간 몇 개인가의 석류알이 굴러떨어졌다.
다급히 그것을 주워 봤자 손바닥에서 스르륵 흘러내려 소멸할 따름.
오래도록 힘을 발휘해 온 성유물이 비로소 그 역할을 끝마치고 결계와 함께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아니, 진짜 화나네. 저 성유물도 원래는 온전히 확보하려고 했거든!
―제가 저것을 뛰어넘는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욕심에 가득 찬 돼지처럼 꽥꽥거리는 소리가 은인의 귀를 더럽히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야, 너 따라 나와.
기준이 루시와 악령이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어딘가 안도감마저 느끼던 그때.
―콰직.
성유물을 쥐고 있던 쿠레나이의 가슴팍에 단검이 깊숙이 꽂혔다.
그 단검이 누구의 것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으리라.
은신은 그 자리에 무너지는 쿠레나이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려, 한순간 기준을 돌아보았다.
“네 맘대로 해.”
“고마워요, 형.”
원하는 것은 다 이루었다.
결계도 곧 무너질 것이다.
은신은 기준의 허가를 받자마자 쿠레나이를 들어 올려, 이제 마악 닫히려고 하는 소용돌이 너머로 던져 버렸다.
쿠레나이는 끝까지 스러져 가는 성유물을 쥐고 있었으나― 이미 시체가 된 그녀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터였다.
“……아니, 진짜 최악이네.”
고개를 드니 그곳에 보이는 것은 신사의 천장이 아닌 동굴 벽이었다.
공간 전체가 녹아내리며 그 안에 있던 이들을 원래 있어야 할 장소로…… 우르알타의 화산 동굴로 연결한 것이다.
사소한 오산이 있다면 마을 안에 있던 무녀들까지 통째로 화산 동굴로 내동댕이쳐졌다는 정도.
의식을 치르고 있던 무녀들은 물론, 마을 전체에 흩어져 제 할 일을 하던 무녀들은 한순간 일어난 일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곧 제 머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털썩 쓰러져 버렸다.
“……큭.”
“아, 아아아.”
쓰러지진 않았지만,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기 시작한 것은 기준의 파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결계의 영향에서 벗어나며…… 그간 결계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기억해 내게 된 것이겠지.
“결국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네.”
―무슨 소리야, 계약자. 결계도 빠져나왔고, 파티원들도 강해졌고, 악령도 강해졌잖아.
기준은 가끔 루시가 무섭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살리고 싶었던 애도 무사히 살아난 것 같고.
하지만 그녀가 덧붙인 말에 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던 소용돌이 너머로.
가녀린 여자의 손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 손에는 반절 남은 석류가 쥐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