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18)
나 빼고 다 회귀자-218화(218/356)
나 빼고 다 회귀자 (218)
Chapter 41. 배신의 이유 – 3
언제나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 주었던 고유 스킬을, 오늘 기준은 처음으로 원망했다.
스킬을 제어하면 취기가 오르도록 하는 것까지는 가능했지만― 기준이 자신의 신체를 통제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면 톱니바퀴가 어김없이 구르며 그의 육체와 정신을 온전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미안해, 계약자. 정말 미안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술로라도 달래 보려다 끝내 포기하고 병을 내려놓는 기준에게 루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늘 기준을 최우선으로 두고 행동해 왔던 것이 그녀다.
그녀의 행동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기준이 그녀를 탓할 일은 없었다.
물론― 그를 위한 일 모두가, 그가 바랐던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다 느껴지니까 굳이 말로 할 필요도 없어, 루시. 하지만 네가 미안해하는 건 형을…… 죽여서가 아니지?”
―응. 보다 확실하게 그 남자가 나쁘다는 증거를 계약자의 눈앞에 들이대서, 가능하면 계약자가 최대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는 쪽으로 정리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너무 안타까워.
시원하게 속내를 까발리는 루시의 모습에 기준은 화가 나기보다도 차라리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쁘다는 증거라,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목수와 연결 지을 생각도 못 했던 말인데― 그가 죽기 직전에 했다는 얘기들을 들어 보면 마냥 그걸 부정할 수도 없어서.
기준은 그저 허탈하기만 했다.
목수의 속내도 속내지만, 자신이 여태 목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니 속이 너무 쓰렸던 것이다.
“조금 더 대화를 해 봤어야 했어. 어쩌면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을지도…….”
―그 과정에서 그 남자도 계약자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겠지. 그럼 계약자를 더 치명적인 함정에 몰아넣을 수도 있었을 테고. 계약자, 후회하지 마. 이게 최선이었어. 스스로를 믿지 못하겠으면 나를 믿어.
“폼 잡기는.”
기준은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그를 달래려 애쓰는 루시를 붙들어 품에 끌어안았다.
평소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나, 루시는 마음이 약해진 기준에게서 받는 스킨십에 기뻐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못난 계약자 탓에 고생시켜서 미안해, 루시.”
―이 정돈 고생도 아니야, 계약자.
정령은 넘쳐흐를 듯한 자신의 욕망과 상처 입은 계약자에 대한 배려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모두 계약자 혼자서 끌어안을 필요는 없는걸. 힘들고 지쳤으면 짐도 나누어지고, 조금 쉬었다 갈 수도 있는 거야. 나는 언제나 계약자 곁에서 도와줄 테니까, 응?
“그래…….”
수도공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기준이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어, 결국 무수한 이전의 용사들이 그러했듯 스스로 무너져 내리게 만드는 것.
상처도 많이 입고 좌절도 했지만, 놈의 뜻대로 주저앉아 줄 수는 없었다.
목수와 끝장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미워진 것도, 다른 이를 믿을 수 없게 된 것도 아니다.
당장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하려 하는 루시가 그의 눈앞에 있지 않은가.
……다만 기준이 루시를 탓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민이는 왜 끌어들인 거야?”
―계약자를 속이고 그 남자를 죽이러 가는데, 그래도 계약자의 파티에 속한 사람 한 명은 있어야겠다 싶었어. 바로 죽여 버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파티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게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은신은 자세한 사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 동료였던 사람을 향해 스스럼없이 칼날을 들이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목수에게 마음이 있는 지혜는 애초에 논외.
그렇게 되니 자연히 남는 사람은 예민 한 명밖엔 없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뿐?”
―실은 계약자가 화를 내면 그 분노를 나눠서 감당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 미안해……!
어쩜 이리도 제 속내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예민에게 끔찍한 부담을 지게 했다는 면에서 루시에게 화가 났지만 이렇게 모두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보면 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뭣보다 그녀의 행동 자체는 어디까지나 기준을 위했던 것이고, 기준의 생각대로만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면 자칫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니…… 감사함과 괘씸함이 상쇄되어 감사함이 약간 더 많이 남은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민이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됐네…….”
―지금 찾아가는 건 별로 추천하지 않아. 서로에게 좋지 않을 거야.
기준이 조금만 더 뻔뻔한 사람이었더라면 예민에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예민이 조금만 더 양심이 없었더라면 이걸 빌미로 기준에게 달라붙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루시에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 민이도 혼자 마음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앞으로 더 잘해 줘야겠네…….”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다 말고 헛웃음이 나왔다.
잘해 주다니, 이 얼마나 오만한 말이란 말인가.
예민은 기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루시의 무리한 요구까지 받아들였는데, 정작 기준은 무슨 신하에게 포상하는 임금이라도 된 것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투로 말하고 있으니.
“안 되겠다. 계속 부정적인 생각밖에 안 들어.”
―푹 자, 계약자. 자면 조금 나아질 거야. 애들한테는 우선 내가 적당히 말해 둘 테니까, 모두 진정한 다음에 얘기하는 게 좋아.
루시의 잔잔한 목소리는 마치 자장가와 같았다.
지금은 태평하게 잘 때가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기준은 그녀의 말을 거스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맡에 엎드려 그의 눈치를 보고 있던 우르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천천히 다가와 그의 이마를 핥았다.
―고생 많았어, 계약자. 앞으로는 괜찮을 거야, 무조건.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우르를 끌어당겨 안고, 루시의 말에 힘없이 대꾸하며 눈을 감는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땐 털어 낼 것을 모두 털어 내고, 다시 믿음직한 리더의 모습으로 돌아오리라 다짐하며.
가볍게 털어 낼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지만, 그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언제까지고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당장 콘클라베도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 그의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고 그걸 미루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법 아니겠는가.
‘두고 가서 미안해요, 형. 먼저 쉬고 있어요…….’
기준은 곧 잠들었다.
잠시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시는 그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는, 우르와 한 차례 눈빛을 교환하고는 날개를 펴 날아올랐다.
옆방에는 이미 기준의 파티원들이 모여 있었다.
레타 대륙으로 넘어와 함께하게 된 로라와 틸라, 칠현자인 율영과 렌카.
튜토리얼 시절부터 함께했던 은신과 지혜, 그리고 예민이다.
―계약자는 잠들었어.
“지쳤을 거야. 내내 싸우고 우리랑 입씨름하고, 고생했으니까.”
루시의 말에 틸라가 당장에라도 일어나 그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대꾸했다.
한편 그 옆에 있는 로라는 그녀보다 더 지친 표정으로, 입에 술병을 물고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것이 도저히 한때 사제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기준 앞에서는 보여 줄 수 없는 모습.
틸라와 함께 둘이서 기준이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으니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지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정말…… 정말이야? 아니, 정말이겠지. 오빠가 우리를 전투에 참가시키지 않은 것도 그렇고, 그러지 않고서야 민이 네가 아저씨를…… 아, 그러니까.”
루시가 없는 사이 예민에게 얘기를 들었을 지혜는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짜고짜 예민과 루시를 욕하며 몰아붙이지 않는 것만으로 그녀의 정신력을 평가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손을 뻗어 은신의 옷자락을 잡으려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어들이는 모습이 마치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누나는 어떻게 그렇게…… 아니, 아니에요. 저도 조금, 너무 당황스럽네요. 아저씨가 불안해 보인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 군…….”
본인도 큰 충격을 받은 탓에 그런 지혜의 모습까지 살펴줄 겨를이 없는 은신을, 오직 그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렌카가 상냥하게 끌어안았다.
예민은 지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고는 가만히 입을 열어 말했다.
“다들…… 납득하기 힘든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사실이야. 치명적인 배신이었고, 많은 정보가 빠져나갔어. 오빠가 조금이라도 약했으면, 혹시 방패가 제때 완성되지 않았으면…… 위험했을지도 몰라.”
물론 이쪽에는 루시가 버티고 있는 만큼 아무리 위험해져도 기준이 죽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얼마든지 죽을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황녀가 죽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을 터.
목수의 배신은 기준과 동료들의 목숨을 정조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까 괜찮다고, 그냥 없었던 일로 넘기자고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목수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는 더욱 심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고.
“그러니까 이걸로 끝냈으면 좋겠어. 가능하면…… 오빠 앞에서는 더더욱, 참아 주면 좋겠고. 그래 줄 수 있을까?”
당연하지만 예민이 목수와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그가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은 기준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혜가 그것을 알게 된다면 적잖이 상처를 받을 테고, 이미 죽은 사람 탓에 상처를 받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지혜 역시 예민이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짐작한 듯했지만 굳이 더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단지, 이대로 덮는 게 좋다는 얘기를 듣고 알겠습니다, 하고 쉬이 넘길 만큼 그들이 요령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뭔가 너무…… 허무하네. 슬프기 이전에, 좀.”
“길었는데……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요.”
답답한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지 못해 한두 마디 튀어나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
“미안해, 민아. 너한테 뭐라고 하려던 게 아니라.”
“괜찮아.”
사실 예민은 두 사람처럼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목수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이며 머릿속이 많이 복잡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이 일에 대해 더 얘기를 하다 자신의 추한 속마음을 드러내기도 싫었기에, 이대로 끝낼 수 있다면 끝내고 싶었다.
―너희는 계약자 배신하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
인간의 눈치를 보지 않는 빛의 정령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계약자가 이런 일로 더 힘들어하는 것 보고 싶지 않으니까.
“루시 넌 이런 때에도…… 하, 됐어.”
그들의 마음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루시의 태도에 질린 지혜가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품은 감정을 루시를 상대로 토해 내는 것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실수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순간 은신을 돌아보았으나, 렌카에게 몸을 기대고 있는 모습에 그만 황급히 눈을 떼고 말았다.
“언니, 먼저 쉬러 가 볼게요. 언니도 힘드실 텐데 죄송해요.”
“아냐. 이해할 수 있어, 괜찮아.”
쓴웃음을 지으며 지혜를 전송한 율영이 짙은 한숨을 토해 내는데, 그런 그를 가만히 보던 루시가 말했다.
―콘클라베, 어떻게 될 것 같아?
“개판이겠지.”
즉답한 율영이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지금까진 준이 노력해 줬잖아. 이젠 내가 힘내야지. ……황녀의 뜻이 무엇이건 간에, 이대로 휘둘려 줄 생각은 없으니까.”
그로부터 이틀 후, 콘클라베가 열렸다.
칠현자 가운데 배신자 셋이 처단되어, 오직 넷밖에 남지 않은 현자들과 47명의 탑주들이 열리지 않는 방에 들어서고.
거대한 석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