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19)
나 빼고 다 회귀자-219화(219/356)
나 빼고 다 회귀자 (219)
Chapter 41. 배신의 이유 – 4
율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콘클라베가 개최되는 이곳은 중앙탑에 위치한 ‘열리지 않는 방’.
본래 칠현자를 포함한 54명의 탑주가 거대한 원탁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는 것이 콘클라베의 시작이었는데…… 지금은 그중에 세 명이 죽었을 뿐더러, 테이블 앞에 마련된 의자도 딱 보아도 마흔 개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앉을 자리가 부족한데.”
소환자들의 왕국, 프런티어의 마탑주 세스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구릿빛 피부가 돋보이는 그는 특이하게도 몸 곳곳에 보석과 비슷한 광택을 발하는 각질이 돋아나 있었는데, 그 각질들 하나하나가 강력한 마도구처럼 그의 짙은 마력을 담고 있었다.
“누가 준비했는지 몰라도 눈이 썩 좋은 사람은 아닌가 보지?”
“아니, 서른하나로 정확히 맞다.”
거기에 대답한 이는 물론 칠현자의 대표격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남자인 법천.
오늘도 눈부시게 빛나는 머리를 자랑하는 그는 바로 얼마 전 있었던 칠현자 내분의 여파인지 몰라도 참혹하게 인상이 구겨져 있었다.
“콘클라베에 참가할 자격조차 없는 자들이 이 자리에 열여섯 명이나 있기 때문이지.”
“…….”
세스와 법천의 눈빛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법천의 말뜻을 알아들은 다른 탑주들도 서로를 견제하며 조금씩 간격을 벌리기 시작했다.
한없이 진중한 표정의 법천을 쏘아보던 세스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흑마법사랑 손을 잡았다는 머저리들을 얘기하는 거지? 사흘 전 그건 정말 장관이었는데. 설마 칠현자들끼리 치고받는 모습을 살아생전 보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뭐, 그래 봤자 칠현자라는 이름에 썩 어울리지 않는 졸전이었지만.”
“졸전?”
“그렇잖아, 흡혈귀가 만든 결계 하나도 못 뚫어서 쩔쩔매는 등신들끼리 얼결에 서로 붙은 거잖아? 여태껏 잘 감춰 온 정체를 그런 식으로 들키는 것도 그렇고, 애초에 그 끝이 명백한 절망에 조준되어 있는 어둠의 마도에 심취하는 것도 그렇고…… 그런 머저리들에게 ‘현자’라는 칭호를 수여할 자격이나 있을까?”
아아, 최악이다.
율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얕은 한숨을 토했다.
적어도 역대 콘클라베는 전원이 자리에 착석해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시간 정도는 있었을 터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모두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패를 가르고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가장 최악인 것은, 칠현자 가운데 어둠의 진영과 손을 잡은 이가 있었다는 사실이 콘클라베 이전에 드러나 세스가 트집을 잡을 빌미를 주었다는 점이다.
“야.”
“음?”
칠현자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마탑의 탑주라는 인간이 칠현자를 깔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뭣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칠현자는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그들 사이에 있던 배신자를 처단하고도 전원 무사히 남은 이들이 아닌가.
“마치 너라면 결계를 부수고 들어올 수 있었을 것처럼 말하는데, 칠현자에게 전문 분야라는 게 있다는 건 알아?”
눈을 희번덕거리며 따지고 드는 율영에게 세스는 여유를 부리며 대꾸했다.
“그야 내 능력이라면 당연히 부술 수 있었지……. 전문 분야? 네가 칠현자 중에 제일 약하다는 건 아는데.”
“입으로는 결계가 아니라 태양이라도 부술 수 있겠지, 그래. 그래서…… 외부인인 너도 알고 있을 만큼 약한 내가 왜 칠현자라는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 그건 내가 공간 마법을 다루기 때문이야. 내가 밖에 있었으면 고유 영역 따윈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었다고.”
“오, 밖에서 들어가는 건 되는데 안에서 결계를 부수지는 못했나 보지?”
“부숴? 왜?”
물론 부수지 못한 것이 맞지만 율영은 세스를 따라 하기라도 하듯 여유를 가장하며 말했다.
“그대로 싸우면 이길 수 있는데 결계를 왜 부수지? 넌 착각하고 있어, 애송이. 그 결계는 내외의 출입을 완전히 금지하는 결계였지. 적들이 알아서 자신들을 가둘 새장을 마련해 줬는데 뭐 하러 그걸 부숴?”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 싸운다는 소식은 들어 놓고 결과는 못 들었나 보지? 전멸이야. 적이 모두 죽었다고. 우리는 사상자 제로. 결계를 부수지 않는다는 내 선택이 옳았다는 증거지.”
실제로 가면을 쓰고 있는 기준이라도 지금의 율영처럼 뻔뻔하게 허세를 부리지는 못할 것이다.
호가호위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주는 율영의 입담에 비단 세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탑주들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흘 전에 있었던 격전.
흡혈귀 중에서도 가장 큰 세를 자랑하던 쿠드라크의 잔존 세력, 그것도 가시공과 비견되는 존재인 수도공이 이끄는 무지막지한 정예병들.
그들이 흑마법사 외의 사망자를 내지 않고 전멸한 것은 아직 정식으로 임명을 받지 않았음에도 이미 빛의 용사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빛을 발하는 존재, 드래곤 슬레이어 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나가 알고 있는데.
그러나 그것이 기준의 무력까지 감안해서 냉정히 상황 판단을 내린 결과라고 하면 또 뭐라 따질 수도 없었으니, 그녀의 말에 당장 세스조차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율영의 말이 맞다. 마도사는 홀로 궁구할 때는 누구보다 과정에 집착하나, 그것을 타인에게 내보일 땐 오직 결과만을 중시하는 법.”
그리고 율영이 만들어 낸 흐름에 법천이 냉큼 올라탔다.
“토벌은 성공적이었고, 칠현자 가운데 존재하던 배신자들은 이미 모두 완벽하게 처리되었다. 칠현자 가운데 셋이나 어리석은 과오를 범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그것을 수습하며 다른 현자는 누구 한 명 크게 상처를 입은 자조차 없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의 선택은 잘못되었음이 드러났고 칠현자의 권위는 다소 상처 입었을지언정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이다.”
“무려 과반에 가까운 숫자가 길을 잘못 들었는데, 슬슬 칠현자라는 권위를 내려놓을 때가 된 건 아니고?”
“그렇지 않음을 지금부터 증명한다.”
법천이 손을 휘두르자 테이블 중앙에서 갑자기 종이가 산더미같이 솟아나 마구 휘날리기 시작했다.
율영이 그중에 하나를 끌어당겨 잡아 보니 그것은 조사 자료였다.
탑주들이 흑마법사들과 결탁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로, 그 가운데 일부는 법천이 이전에 율영에게 협력하겠다며 알려 주었던 내용도 적혀 있었으나 아예 새로운 정보도 많았다.
만약 여기에 적힌 정보가 사실이라면…… 정말로 레타 대륙은, 조만간 용사 비체가 있을 때 벌어졌던 대혼란을 앞두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것에 적힌 모든 정보가 사실임을 내 모든 마나와 영혼을 걸고 맹세하겠다.”
마도사에게 허락된 가장 강력한 제약을 스스로에게 걸면서까지 맹세하는 법천.
물론 이 자료를 통해 ‘고발’당한 스무 명의 탑주가 그런다고 순순히 자신의 죄목을 인정할 리 없었으나, 애초에 법천은 정말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맹세를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에 불복하는 이는 내게 직접 따지면 된다. 세스, 너는 어떻지?”
“…….”
그는 이 대담한 수로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단번에 편 가르기를 시도한 것이다.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부정한 이들의 존재를 밝혔으니, 그들과 적대하겠다는 이는 모두 내 편으로 붙어라, 라는 선언인 것.
콘클라베가 열리기까지 여유가 있었음에도 미리 움직이지 않고 탑주들을 방치했던 것은 아마도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 터였다.
‘흐름이…… 묘해졌어.’
물론 여기서 중립을 표할 수도 있겠지.
법천 한 명의 마나와 영혼을 걸었다고 스무 명의 탑주를 다짜고짜 배신자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보편적으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그렇게 뒤로 물러난다고 쳐도, 만약 법천이 적으로 돌아선 탑주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마도왕의 좌에 오른다면?
그때가 되어도 중립을 선택한 이들이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 있을까.
아니, 그땐 칠현자와 탑주들 사이에 격의 차이가 있듯, 법천의 편을 든 이들과 들지 않은 이들 사이에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격의 차이가 생겨날 터였다.
그렇다고 지적된 탑주들 편에 붙는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칠현자의 수뇌인 법천이 자신의 마나와 영혼을 걸고 맹세한 것이다.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와는 별개로, 이 자료가 진실이라는 것은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율영, 너는 무엇이 중요한지 알 것이다. 부디 힘을 보태 줬으면 좋겠군.”
법천의 시선이 율영에게 와 닿았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걸까, 침음을 흘리면서도―― 끝내 율영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말았다.
여기서 법천의 편을 들면 그가 마도왕이 되는 데에 찬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
율영은 애초에 마도왕 같은 촌스러운 직함을 달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능력적으로도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나마 자신에게 옹호적인, 마도 왕국을 위해 헌신하고 있음이 분명한 법천에게 협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어둠의 진영과 손을 잡은 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해. 하지만 알고 있겠지, 법천? 계산은 똑바로 해야 해. 내가 지금 여기서 네 손을 들어 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있다면――.”
“물론.”
법천은 그녀의 말을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투로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언제나처럼 네가 원하는 것만을 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면 된다. 나는 언제고 너를 지지할 것이다. 이 또한 맹세하지.”
“그럼 됐어.”
율영이 법천에게 붙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남은 두 명의 칠현자도 대뜸 법천의 편을 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율영이 지닌바 무력과는 별개로 칠현자 가운데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취급되는지를 단박에 증명한 셈이었다.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흑마법사 세력이 가장 먼저 그녀를 어떻게 해 보고자 수작을 벌일 이유가 없겠지.
분위기를 인식한 세스 역시 칫,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예상했던 그대로 흘러가고 있구만…… 바보들 같으니.”
칠현자들이 뜻을 모은 시점에서 다른 탑주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나마 외부인이며 칠현자를 뛰어넘는 능력을 지닌 세스 정도가 변수가 될 수 있었겠지만 그 역시 네 명의 현자를 상대로 이겨 낼 방법은 없었으니.
탑주들은 빠르게 판단했고, 그건 ‘적’으로 지정된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읏……?! 정말로 싸워 보겠다는 건가!”
“흑마법사와 결탁한 이들이다! 봐주지 말고 밀어붙여!”
곧 콘클라베를 위해 준비되었던 테이블이 산산조각 나고 의자가 가루가 되었다.
누구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테이블에 아련한 감상을 품을 때쯤, 법천이 영창한 대마법이 남은 이를 모두 깨끗하게 밀어 버렸다.
사망자는 모두 배신한 이들뿐, 처음 법천이 예고했던 대로 오직 서른한 명의 탑주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날 믿어 줘서 고맙군.”
“자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목숨을 내걸고 타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리는 없으니까.”
“마도왕의 좌는 욕심이 났지만…… 어쩔 수 없지. 흐름을 읽지 못한 내 실책이다. 너를 인정하지, 법천.”
그리고 법천을 자연스럽게 마도왕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정 욕심을 내고 싶다면 법천과 싸우려들 수도 있겠지만 그건 누구도 반기지 않는 일일 터.
뭣보다 흑마법사들이 탑주는 물론이고 칠현자에게까지 영향을 끼칠 만큼 마도 왕국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이 시점에, 마도왕의 자리를 욕심내 가뜩이나 숫자가 줄어든 칠현자를 공격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다.
콘클라베가 이렇게 빠르고 깔끔하게 종식된 것은, 살아남은 탑주들 모두가 마탑의 전력을 온존하고 싶었던 까닭이 컸다는 것.
“뜻대로 되어 좋겠군, 법천.”
“생각보다 맥없이 물러나는데, 세스.”
“글쎄, 이번 일이 꼬이지만 않았으면 승산은 있었다고 본다만…….”
세스의 가소로운 말에 콧방귀를 뀌는 법천.
그는 여태껏 프런티어에 처박혀 있을 뿐 마도 왕국과는 전혀 연관이 없던 인물이다.
믿을 것은 오직 무력뿐인 남자가 이제 와 마도왕의 자리를 욕심낸다고 해도 코미디로밖엔 들리지 않았다.
“난 양측 다 많이 무너져 주리라 기대했거든. 그런데 뭐, 어디서 규격 외가 나타나는 바람에…….”
겉으로나마 마도 왕국에 적을 두고 있는 마탑주가 해서는 안 될 말에 법천을 비롯한 모든 탑주의 인상이 참혹하게 구겨졌다.
세스는 규격 외라는 말을 입에 담으며 율영에게 뱀처럼 끈적한 시선을 쏘아 보냈다.
“그 남자는 대체 어떻게 끌어들인 거지? 몸이라도 쓴 거야?”
“뭐, 뭐?!”
그 말을 이해한 율영이 화들짝 놀라 제 몸을 가렸다.
순간 머릿속을 흘러가는 광경에 그녀의 모든 사고 작용이 일시 정지한 결과, 그녀의 입에서는 사춘기 중학생이나 할 법한 말이 튀어나왔다.
“우, 우리가 그런 관계로 보여?! 말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하다못해 성희롱까지…… 모, 몸이라니! 죽여 버릴 거야, 너!”
“아니, 돌았나 진짜. 일단 네가 그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겠다.”
그녀의 순진한 반응에 본능적으로 욕설을 입에 담는 세스.
그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마도 왕국도 이젠 끝이구만. 차라리 깨끗하게 정리하고 다시 시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는 마도 왕국을 대표할 입장이 아니다, 세스. 내가 마도왕이 된다면, 너는 그 순간 제명이야.”
“마음대로 하시지. 하, 다 같이 여자 한 명에게 놀아나는 꼴이 정말 우스워.”
아직 정식으로 콘클라베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세스는 자신의 마력을 전방으로 내쏘아 문의 결계를 풀어 버렸다.
칠현자를 위시해 탑주들이 당장이라도 그를 죽여 버릴 듯이 눈을 번뜩이는 것을 모조리 깔끔하게 무시하며 문 밖으로 걸어 나가던 세스가 문득 율영을 돌아보곤 말했다.
“이만한 자료를 전부 칠현자 한 명의 힘으로 모을 수 있었을 것 같아?”
“뭐?”
“머리가 있으면 잘 생각해 보시지. 그럼 난 간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잘 해 봐. 뭐, 어차피 다 같이 무대 위에서 놀아나는 신세인 건 마찬가지지만.”
방문이 닫혔다.
율영은 그가 남긴 말을 곱씹어 보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곤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그땐 이미 모든 것이 늦은 상태여서, 법천이 정식으로 마도왕으로 인정을 받은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