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82)
나 빼고 다 회귀자-282화(282/356)
나 빼고 다 회귀자 (282)
Chapter 54. 용사의 이름으로 – 2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껏 폼을 잡은 직후가 아니었으면 기준은 그 자리에서 100미터 정도 팔짝 뛰어오르며 환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아직까지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고 있으니까…….
―본래 약속했던 것은 너를 그 아이에게로 데려다주는 것이었지. 하지만 너는 이전에도 성역에 탄원할 권리를 얻은 바 있다.
분명 그랜드 퀘스트의 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땐 성역을 한 번 발을 들이면 돌아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마경 취급하며 바로 잊어버렸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물론 마경이라는 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처음 생각했던 대로 모든 신들이 자유로이 모습을 드러내 활보하거나 권능을 발하는 곳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그 아이의 예상치 못한 분투로 차원의 틈도 조금은 여유를 찾았지. 하여, 내 권능으로 그 아이를 다시금 레타로 불러들일 조건이 갖춰졌다.
그녀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제단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비석들이 일제히 크게 흔들거리며 굉음을 일으켰다.
희뿌연 빛이 뭉친 형상이 사방에서 치솟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프런티어로부터 성역을 보호하는 형태로 둘러싸고 있던 제국군 가운데서 새된 외침이 들려왔다.
“절대 안 돼! 그건 멸망을 가속시키는 짓일 뿐이야――!”
―아, 그래 물론 그렇고말고. 만약에라도 이레귤러가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멸망을 앞당길 뿐인 자충수가 되겠지.
뭔가를 억누르듯 양손을 펼쳐 힘을 발하며 헬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재밌고 짜릿해! 내 선택으로 모든 것이 끝장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즐거워!
―미친년이야.
루시가 신랄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기준은 돌아가는 상황에 인상을 찌푸렸다.
비체의 해방이 멸망과 이어진다고?
―다른 세세한 사정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게 계약자에게 힘을 보태 주는 일이기 때문이야. 저들은 이미 계약자를 완전한 고위험군으로 분류하고 있으니까.
“아하, 그러니까…… 결국 신들 가운데 내 편이 없다는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어둠을 절멸시킬 가능성이 수면 위로 부상한 순간 빛의 진영과 어둠의 진영을 막론하고 모두로부터 노려지는 신세가 된 기준.
그나마 그와의 계약을 완수하려 하는 헬도 순수하게 그에 대한 선의로 일을 진행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비체를 구하려는 이상 처음부터 제국과 관계가 틀어질 것을 각오하고 벌인 일이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적대시당할 줄은 차마 짐작도 못 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지금 대륙이 비틀린 상태라는 것.
적어도 그것에 대해서만은 헬과 기준의 생각이 일치했다.
―똑같은 짓을 반복하며 무의미하게 명줄을 이어 가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시대의 막을 내리는 존재가 되어 주지! 종말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황혼이 지나면 여명이 오리니, 황금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여신이시여! 어찌 스스로 균형을 무너트리려 하십니까!”
―균형이 아닌 속박이었지. 그리고 이것이 그 속박을 끊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헬이 번쩍 손을 들어 하늘을 찢었다.
기준은 균열이 확장되는 것을 보며 언젠가 레타 포인트로 비체가 강림했던 때를 떠올리고 있자니.
그때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마치 먹구름이 물러가고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듯, 희미한 빛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준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음…….
또 뭐가 원하는 대로 안 되었는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헬.
―촉수를 꼬물거리는 악마가 나타나 또 분위기를 조져 놓길 바랐던 거겠지.
“……헬은 분명히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어 한다고 하지 않았어?”
―신들을 믿으면 안 돼, 계약자. 저들은 하나같이 겉과 속이 다르고, 한마디 말 속에 수만 가지 속내를 감춰 놓으니까.
―보다 극적인 모습을 원했는데, 설마 정말로 그런 격전에서도 스스로를 지켜 냈단 말이야? 침식까지 되돌렸다고? 이래서야 단순히 감격적인 재회인 데다, 심지어는 내가 둘을 이어 준 것 같잖아? 지옥의 여신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도 분수가 있지.
루시의 말을 보충하듯 헬이 친절하게도 설명해 주었다.
성격이 비비 꼬였다고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에 혀를 내두르고 있자니 헬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것으로 계산은 모두 끝났다. 내 약속은 너와 그 아이를 만나게 해 주는 것뿐이니, 그 외의 모든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야.
“…….”
―그럼, 어디 힘껏 발버둥 쳐 보거라.
헬의 환영이 모습을 감추었다.
동시에 비석들은 더욱 더 크게 흔들리며 이젠 일대에 지진까지 일으키기 시작했고, 신 탓에 기준이 탄 유령선에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던 제국군은 재차 그들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자 했으나― 성역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프런티어 측도 성역을 부수려 한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막아야만 했다.
한편 기준은 방어막이 깨지는 대로 고유 영역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곧 그것도 잊어 먹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신 빛에 감싸인 존재가 천천히 그를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은발이 구불거리며 빛을 반사했고, 크고 선명한 보랏빛의 눈동자는 먼 곳에서도 똑바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그녀가 훨씬 아름다워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기준의 착각은 아니리라.
“비체――!”
정말 길었다.
아니, 따져 보면 1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으니 길었다는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중간에 한 번 만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길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녀가 무사히 자신에게로 돌아온 것이 기뻤다.
“멍청한 것들, 어느 쪽이든 멸망을 자초하는 것은 마찬가지야……!”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저들에겐 신경을 꺼! 지금은 프런티어를 성역에서 몰아내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황녀님!”
“이미 그들을 잡기엔 늦었어! 지금 지킬 수 있는 것만이라도 지켜라!”
아마도 스카이나는 율영이 기준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비체와 합류하는 대로 전장을 빠져나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기준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렉투스와 약속한 것이 있으니 일단 파툼을 빼내기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귀공, 미쳤나?! 이 분위기에 내가 귀공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였다간 그라티아만 얻어맞을 것이 아닌가!”
“아니, 이제 와서 그걸 걱정한다고?”
“귀공의 존재만으로 제국과 대립각이 세워지는 판에 그라티아가 여전히 귀공과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제국의 명에 불복하는 것이 나아!”
그저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걱정할 필요도 없으리라.
용사로서 모습을 드러낸 기준을 공격하려 한 제국의 모습이 마도구에 선명히 담겨 송출된 이상, 아무리 제국이 대륙의 질서를 주도하는 강대국이라 할지언정 책임을 완전히 회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당장은 이 전장의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르는 듯 기준을 향해 이를 갈고 있을 뿐이지만, 아주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대륙의 여론이 뒤바뀔 터였다.
물론 기준에게 용사로서의 매력이 부족하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수치만 놓고 봐도 지금 기준의 매력(E)은 75.
하물며 전장을 가득 메운 그의 적대자들조차 그가 합당한 자격을 지닌 용사라는 것을 미처 부정하지 못했으니!
“――준!”
비체의 하강 속도는 점차로 빨라졌다.
지금의 그녀에겐 날개가 없었지만 놀랍게도 빛으로 빚어낸 날개가 그녀를 기준에게로 이끌었다.
기준처럼 진짜 신체 구조가 아니라 특수한 스킬로 구축한 날개였으나 그 성스러운 모습은 기준과 맞먹었다.
“비체!”
“준!”
“씁.”
기준은 뒤에서 혀를 차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뱃머리를 박차고 도약했다.
한껏 날개를 펼친 그가 비체와 만나 부둥켜안는 순간, 두 사람의 빛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전장의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실은 남사스러운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빛으로 가렸을 뿐이었지만.
“너, 고백은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거라고 안 배웠어? 누가 시스템 메시지 같은 걸로 하라고 가르쳐 줬어, 응?”
―이 악마는 만나자마자 역사를 날조하네. 대체 우리 계약자가 언제 고백을 했다고 그러는 거야?
“그 과자로.”
―퉷.
루시가 욕지기 대신 빛으로 이루어진 침을 뱉었다.
비체는 빛의 궤적을 뻗어 그것을 깔끔하게 차단하며 기준을 다시 껴안고는 말했다.
“쟤는 왜 성격이 더 더러워졌어?”
“비체, 네가 반가워서 그런 거야.”
어떻게든 계약 정령을 커버해 준 기준이 비체를 품에 끌어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만나고 싶었어.”
“나도, 무척. 그렇다고 이렇게 무리할 건 없었는데……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너를 괴롭힌 신들이 잘못이지.”
비체는 문득 고개를 들어 자신이 빠져나온 균열을 올려다보았다.
한순간이지만 그 너머로 스멀거리는 어둠이 피어난 듯한 착각이 들었으나, 곧 균열이 완전히 닫히며 그것도 사라졌다.
“이젠 돌아갈 필요 없는 거지?”
“아마 다음엔 저들이 우리에게로 올 거야. 그러니 준비해야겠지.”
하지만, 하고 비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은 여기서 빠져나가자. 나를 싫어하는 무리가 벌써 여기저기서 살기를 피워 대는 게 느껴지네.”
사실 기준과 비체가 포옹하는 순간 서로의 빛의 날개를 펼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전장 곳곳에서 둘의 빈틈을 노리는 시선을 감지하고,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막 대신 빛을 확장시켰던 것이다.
“비체 너도 여기저기서 인기가 많았나 보네.”
“프런티어는 늘 나를 영입하려고 안달이었어. 결과적으로는 서로 좋지 않게 갈라섰지만.”
실제로 기준이 헬에게서 무엇을 얻어 낸 것인지 몰라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프런티어 측의 수뇌 몇몇은 비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제야 성역을 공격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둘에게로 포화를 돌리는 이도 있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으니, 제국군과 프런티어, 기준 사이의 삼파전에서 결국 기준을 제외한 그 누구도 소득을 얻지 못하고 어정쩡한 대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베아트리체 언니!”
“겍, 칠현자…….”
“겍?!”
그사이 갑판 위로 착지한 기준과 비체.
반갑고도 묘한 표정을 띠며 비체에게 다가간 율영이 비체의 반응에 황망한 표정을 짓는 반면, 틸라를 비롯한 여성진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위기야, 하지만 동시에 기다리고 있던 기회이기도 해…….”
“여태까지는 상대가 같은 발판 위에 없어 제대로 된 승부를 벌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승부? 일방적인 관전이 아니라?”
“방금 누구야?”
기준은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했다.
반면 여전히 그의 한 팔을 부여잡고 있는 비체는 사뭇 즐거운 표정이었다.
“흠흠, 스승님 말씀 잘 듣고 여자들을 멀리하며 지낸 모양이네. 잘했어.”
―여기선 또 스승님이라고 하는 거 봐. 진짜 한 대만 쥐어박고 싶다니까.
“뭐? 왜? 나 얘 스승님 맞는데? 그야 고백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 대답은 안 했지? 준의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 관계가 발전할 수 있는 상황일 뿐인 거지?”
실제로는 이미 밥이 다 익어 뜸만 들이면 된다는 것을 기준도 알고 비체도 알고 루시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허영마저 사랑스러웠으므로, 기준은 그저 웃으며 대꾸할 뿐이었다.
“그럼 내가 더 노력해야겠다.”
“아니, 글쎄 무리는 하지 말라니까…… 히.”
―리슨 리슨 아이캔트 리슨! ……응?
루시가 듣다 듣다 참지 못해 나서려던 그 순간, 문득 아래에서 지금까지와는 종류가 다른 소란이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지상으로 떨구었다.
―악마, 너 뭐 안 좋은 기운 같이 데리고 왔어?
“그럴 리가. 내부의 악을 완전히 지워 낸 건 아니지만 지금은 내 스킬로 격리하고 있는걸. 그야 차원의 틈이 열리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외신의 기운이 같이 넘어오긴 했지만…….”
아마 그것으로 그들이 비체와 기준을 추적했으리라 그녀는 추측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기준의 권능을 경계하던 외신들이 목표물을 확정한 이상 헬의 말마따나 멸망이 가속하는 것 또한 운명이었다.
기준은 이 속사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으나 비체는 그것을 각오하고 여신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외신들이 기준을 목표로 삼은 것은 변하지 않고, 이르나 늦으나 그들이 기준을 노린다면 자신이 빨리 기준과 합류해 위험에 대해 명확히 알리고 대비하는 것이 좋겠다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이상으로 빨리 기준과 만나고 싶어서이기도 했고.
―그럼 저건 뭐야?
“응? ……아.”
“이런, 젠장.”
그녀들보다 아주 조금 늦게 상황을 파악한 기준이 신음을 냈다.
어째선지 프런티어군이 일사불란하게 병력을 뒤로 물리는 가운데.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 자리에 남은 이가 괴로워하며 몸을 비트는 것이 보였다.
금색이었던 몸이 시커멓게 물들고 몸이 크게 뒤틀리고 있어 자세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한때 파툼이라고 불렸던 존재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