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88)
나 빼고 다 회귀자-288화(288/356)
나 빼고 다 회귀자 (288)
Chapter 55. 길드 확장 – 3
“뭐, 파툼이 정말로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마음을 고쳐먹은 건 아니겠지.”
다음 날, 파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기준은 그가 남긴 쪽지를 확인하며 픽 웃곤 중얼거렸다.
고향인 제국을 등지고, 전우라고 의지했던 와이번마저 영원히 잃어 텅 빈 그의 가슴에 기준과 그의 파티원들과 보내는 시간으로 그나마 온기를 좀 더해 보고자 했던 것인데.
그게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가 기준의 마음을 알아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제국에 대한 복수심도 희미해진 것 같던데, 어디로 갔을까.”
“글쎄, 아마 제국이 계속 노릴 테니 그걸 피하려면 미개척지로 향하지 않았을까?”
기준의 중얼거림에, 재회 이후로 어지간하면 그의 곁을 떠나려 들지 않는 비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제국이 노린다고? 왜? 어차피 파툼이 용사를 때려치운 건 다들 알 테고…… 굳이 파툼을 노릴 이유도 없지 않나? 설마 성역에서 난리를 피운 것 때문에?”
“아니, 도둑놈이니까.”
비체의 뜬금없는 말에 기준이 두 눈을 깜박였다.
난데없이 도둑놈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이참,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그 꼬맹이가 들고 다니던 대검!”
“대검? 확실히 성유물이 포함된…… 아.”
기준도 그 말을 듣고 곧장 깨달았다.
아무리 파툼이 용사로서 대단한 대접을 받고 있다 한들 한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기도 하는 성유물을 제국에서 그에게 완전히 내주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원래 대여해 줬던 건데 그걸 들고 나른 건가.”
“그 녀석 입장에서야 자신을 배반한 제국에게 순순히 대검을 돌려줄 이유도 없었겠지만. 나도 현직 용사였을 땐 그 대검을 받을 뻔한 적이 있어. 대가가 자국 황자와의 결혼이어서 바로 거절했지만.”
“원래부터 골든 드라코니안의 피를 이은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대검인가 보네. 하긴 고유 영역의 형태도 그랬지…….”
“므므믐.”
비체가 이상한 소리를 내서 돌아보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반개한 채 기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국에서 나보고 황자랑 결혼하라고 했다니까? 거기에 대해 뭐 생각하는 바 없어?”
“글쎄, 어쩌면 네가 그걸 거절하니까 제국에서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에 더더욱 너를 죽이려 든 것일지도 모르겠네. 빛의 진영이라 대놓고 적대할 수는 없지만 정말 짜증 나는 족속이네.”
“므므므믐.”
아무래도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던 기준은 자신 없는 말투로 반문했다.
“혹시 그 오래전 일에 내가 질투하길 바라는 건 아니지?”
“뭐야, 너 그 말투! 당연히 질투해야 되는 거 아냐?!”
―정곡을 찔렸구나. 예전 일로 음습하게 일일이 확인해 보는 게 정말 악마답다니까.
비체가 화들짝 놀라 외치며 정색하자 루시가 가차 없이 태클을 날려 비체를 침묵시켰다.
그러나 기준도 부끄럽긴 마찬가지였기에 덩달아 고개를 숙이고 볼을 붉혔다.
“비체, 그러니까 그건…… 일방적으로 제국이 요구한 걸 네가 거절했을 뿐이잖아. 너랑 그 황자라는 사람 사이에 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일일이 거기에 질투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을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일이 설명하려고 하지 마! 눈치가 없으면 배려라도 좀 해 줘……!”
“확실히 내가 이런 데 약하긴 해, 경험이 없으니까…… 게다가.”
괜히 주위를 휙휙 둘러본 기준은 자신과 비체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단호하게 선언했다.
“너도 경험이 없잖아. 그래서 우리가 뭘 하려고 해도 결국 쪽팔리고 어색한 상황에 빠지는 거야. 동의해?”
“아, 지금 살짝 다시 레타 바깥으로 나가서 외신들하고 싸우고 싶어졌을지도 몰라…….”
“아니,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봐. 솔직히 예전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나도 뭘 적극적으로 제안하지 못했어. 하지만 이젠 아니잖아.”
“믓……?”
아무리 생각해도 비체는 마음의 빗장이 지나치게 헐거운 듯했다.
부끄러워하며 소리를 빽빽 지르고 그를 거부하다가도 말 몇 마디에 금세 귀를 쫑긋거리고 기대하는 표정을 띄우다니.
물론 비체가 유독 기준을 상대로 풍부한 감정을 내보이는 이유도 이젠 어느 정도 짐작이 갔지만.
평생 전장에서 온갖 무거운 의무와 책임을 떠안고 전투로 범벅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는 아마도 다른 데에 할애할 감정의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상상 이상의 가능성을 지닌 기준을 만나 그에게 조금이나마 의지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서 그만큼 여유가 생겨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여유를, 마음을 자연스럽게 기준에게 내어 준 것이다.
“솔직히 앞으로도 정신없이 바쁘겠지만 그 사이사이에 우리만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 보고 싶어. 태도로 어물쩍 넘어가지 않고, 보다 확실하게 우리 관계를 규정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래서…… 큼, 네 생각은 어때.”
즉 기준이 지금 한 말을 현대식으로 살짝 과감하게 풀어 보면, 결혼을 전제로 차근차근 교제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된다.
그 말을 알아들은 비체는 기쁨에 볼을 다소 붉히면서도…… 이렇게 쉽게 고개를 끄덕여 줘선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아직 너 좋다는 말 안 했는데? 그렇게 벌써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면……?”
말하다 말고 스스로 연인이라는 단어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비체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루시는 이 둘을 보며 정말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더 멋진 프로포즈를 위해서라도.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 나는 그냥…… 자신이 없어서.”
비체가 끝내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남녀 관계 같은 거 하나도 모르니까, 그…… 어떻게든 내 우위를 유지하고 싶었어, 그래서 그냥 해 본 말이야. 미안…….”
―연애라곤 개뿔 해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만 듣고 연애 고단수를 자처하는 주제에 정작 자신의 연애에는 실수 연발인 사람 같네.
“루시, 미안하지만 지금은 좀 가만히 있어 봐.”
루시를 억제한 기준이 살며시 손을 뻗어 비체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글쎄 나도 하나도 모른다니까. 둘이서 하나씩 차례대로 해 보자. 그럼 곧 익숙해질 거야.”
“응, 알았어. 나도 괜히 허세 안 부리고 솔직하게 대할게. 아니, 너무 갑작스럽게 레타로 돌아오게 돼서 마음이 지나치게 들떴었나 봐, 아하하하하.”
어색한 무드에서 간신히 해방된 비체가 기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안도한 기준이 마찬가지로 웃음을 터트리자 비체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끌어당겼다.
“나 해 보고 싶은 거 생겼다! 일단 이것부터 해 보자!”
“오, 뭔데?”
“키스.”
비체가 엄격하고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다.
“사실 레타로 돌아오는 대로 너랑 하고 싶었거든? 연인이 되려면 필수 코스잖아,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 그동안은 뭐가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아서 못 했으니까, 둘이 함께하게 된 걸 기념하는 의미에서 우선은 키스 먼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안은 했지만 역시 긴장이 되었던 건지 평생 해 본 적도 없는 존댓말을 쓰고 있는 비체의 모습에 루시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 악마 자식, 절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잖아! 무조건 노리고 있다구, 이 기세면 며칠 안 가서 계약자가 그대로 잡아먹――.
비체가 내뻗은 섬광처럼 빠른 스트레이트가 루시를 저 너머로 날려 보냈다.
물론 정령이니만큼 큰 상처는 입지 않았겠지만 아무래도 비체가 용사로서의 능력을 되찾아서인지 같은 빛의 속성인 루시를 상대하는 요령을 터득한 모양이었다.
“그럼, 키스하자?”
“얼마든지.”
키스는 보통 연인으로 나아가는 단계가 아니라 연인이 성립된 단계에서 하는 게 아닐까, 기준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비체를 거절할 수도 없었고, 자신이 고리타분한 것일 뿐 요즘은 다들 키스 먼저 하는 게 평범한 것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이런 데서까지 자신의 기준을 내세울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키스다!
좋아하는 사람과 키스를 할 수 있는데 그 외에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오빠, 여기 있었네요.”
“앗?!”
지극히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예민이 기준의 손을 잡아당긴 탓에 입술을 쭉 내밀고 다가오던 비체는 그의 입술 대신 뺨 끝에 아슬아슬하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두근거리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그 두근거림을 상회하는 분노가 비체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었다.
“너…… 어제 충분히 얘기했잖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전 딱히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오빠를 찾아왔을 뿐이거든요.”
키스할 기회를 놓친 탓에 실로 무시무시한 기세를 피워 내는 비체를 상대로 담담히 제 할 말을 늘어놓는 예민의 모습은 기준 이상으로 용감한 용사로 보였으나 지금은 기준도 예민이 조금 미웠다.
예민은 비체는 몰라도 기준에게까지 미움을 받기는 싫은 듯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오빠. 길드 일로 상담을 하고 싶었는데, 설마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어요.”
“내가 결계까지 펼쳐 놨는데――!”
또 어느새 용의주도하게 그런 짓을.
어쩌면 루시의 말마따나 비체는 실전 경험이 없을 뿐 지식과 열의로 충만한 사냥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기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결계……? 아, 루시가 이쪽으로 안내해 주긴 했는데요.”
“그 망할 정령이……!”
예민의 답을 들은 비체는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명탐정처럼 눈을 빛내며 방을 뛰쳐나갔다.
둘이 남게 되자 그래도 긴장이 안 되었던 것은 아닌지 휴우, 한숨을 내쉰 예민이 다소 강하게 그의 손을 잡아끌며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황은 남자가 리드해야죠, 오빠.”
“갑작스러운 전개였어. ……아니, 민이 너도 그런 고리타분한 말을 하다니 깜짝 놀랐는데.”
“고리타분이라뇨, 그냥 제 취향 얘기였어요. 그래도 확실히 여기서 차이가 나네요.”
비체가 떠나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예민이 다소 씁쓸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전 계속 기다리기만 했잖아요. 그래서 오빠한테 제 마음을 전달하는 것도 너무 늦어졌는데.”
“어, 음…….”
“아, 혹시 베아트리체 씨랑 우리가 어제 했다는 얘기 신경 쓰이지는 않으세요?”
대답이 곤란한 얘기에 기준이 곤혹스러워하자 예민이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신경 쓰이기는 하는데, 내가 들어 봤자 고민거리만 늘어날 것 같으니까 안 들을래.”
“유난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앞으로의 계획과 밀접하게 연관된 얘기. 우리 파티가 문제없이 오래도록 활동하기 위한 이야기.”
“아니, 점점 더 불안해지는데?”
기준은 돌연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정치적인 이유로 아내를 수십 명이나 거두어야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생각해 보면 지금 그들이 있는 대륙의 상황도 다를 바가 없기는 했다.
하물며 기준은 이제부터 소환자들로 구성된 거대한 집단을 만들고자 구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속력을 얻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은…….
“아, 오빠도 감을 잡고 있나 보네요. 후후, 전 원래 그 사람 엄청 싫어했는데…… 아니, 지금도 싫지만 확실히 이전에 용사였다는 건 알겠더라고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묵직하니 신뢰감을 주는데, 저도 배워야 할 점이 많았어요.”
그래서 묵직하게 대체 무슨 얘기를 했던 건데.
이번에 못한 키스를 인질로 삼아서라도 반드시 비체에게 여자 멤버들과 했던 얘기를 캐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예민이 퍼뜩 고개를 들고는 그를 잡아끌었다.
“우리 회의 있어요, 오빠. 소환자 모집이요.”
“그렇지, 그런데 당장 고민할 일은…….”
“아뇨, 당장이에요.”
예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벌써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고요, 오빠.”